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적함대 Oct 13. 2021

헌법과 수염

기본권의 제3자적 효력

안면은 항시 면도가 된 청결한 상태를 유지하며, 수염을 길러서는 아니 된다. 다만, 관습상 콧수염이 일반화된 외국인의 경우에는 타인에게 혐오감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를 허용한다


우리나라의 사극을 보면 대부분의 남자들은 수염을 기르고 있습니다. 적어도 조선시대까지는 수염을 기르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남자들이 그와 같은 수염을 기르고 다니면 누구든지 이상하게 볼 것입니다. 청학동 훈장님이나 그럴까요? 수염을 기르는 경우도 과거처럼 턱수염과 콧수염을 길게 기르는 것이 아니라 보기좋게 다듬는 정도이지요. 연예인들 중에는 수염을 멋들어지게 가꾸면서 기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은 수염을 깔끔하게 깍고 다니지요. 그래서 면도기 시장도 어마어마합니다. 


지금 다니는 직장에서 수염을 기르고 다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어떤가요? 마음대로 수염을 기를 수 있을까요? 수염을 기르는 권리라는게 있을까요? 만일 회사에서 수염을 기르지 말라고 규정을 만들었다면 어떤가요? 언뜻 보면 안될 것같기도 하고, 그냥 상관이 없을 것같기도 합니다. 요즈음 대부분의 남성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수염을 기르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규정이 있는지 여부도 관심밖이겠지요. 


그런데 외국인 직원은 길러도 되는데 내국인 직원들은 기르지 못하게 하는 규정이 있다면 어떨까요? 회사의 방침이니 무조건 따라야 할까요? 외국인과 내국인을 차별하므로 평등원칙에 위배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사기업에 대하여 기본권을 주장할 수 있는가요?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당시  A항공에는 외국인 승무원 137명이 있었는데, 그 중 20명 이상이 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어떠한 문제제기도 없었습니다).


A 항공입니다. A 항공의 규정을 보면, 기장 중 외국인은 마음대로 수염을 기를 수 있지만 내국인은 수염을 기를 수 없습니다. 기장 길동씨는 베테랑 기장인데요, 2014년경부터 턱수염을 기르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회사에서 수염을 깍으라고 했고, 길동씨는 "외국인과 달리 내국인 직원은 수염을 기르지 못하게 한 것은 차별"이라며 회사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A 항공은 그의 비행 업무를 일시적으로 정지하였습니다. 그 결과 길동씨는 월급의 30%인 320만 원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길동씨는 2014년 12월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한 인사처분에 대한 구제를 신청하였는데, 기각되자, 중앙노동위원회에 재심을 신청하였습니다. 중앙노동위원회는  ‘용모규정은 유효성에 논란이 있을 수 있고, 비행정지에 업무상 필요성이나 합리적 이유가 없고 그로 인하여 입은 생활상 불이익이 크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비행정지가 부당한 처분임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러자 A 항공은 중앙노동위원회의 재심판정에 대한 취소소송(부당비행정지구제재심판정취소)을 제기하였습니다.


문제된 A 항공의 규정은 아래와 같습니다.

▣ 임직원 근무복장 및 용모 규정(이하 ‘용모 규정’이라 한다)제5조(근무용모 원칙)
임직원의 용모는 단정하고 청결을 유지하여야 한다.
① 남직원
1. 두발은 옆머리가 귀를 덮지 않으며, 뒷머리는 와이셔츠 깃에 닿지 않게 하고 단정하고 청결한 상태를 유지하며, 삭발 등 지나치게 짧은 머리, 장발, 지나친 염색, 탈색을 비롯하여 기타 혐오감이나 불안감을 유발할 수 있는 머리 모양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2.안면은 항시 면도가 된 청결한 상태를 유지하며, 수염을 길러서는 아니 된다. 다만, 관습상 콧수염이 일반화된 외국인의 경우에는 타인에게 혐오감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를 허용한다. 



참고로 당시 국가인권위원회는 위 용모 규정에서 외국인에게만 예외적으로 일정한 범위 내에서 콧수염을 허용하는 것은 외국인을 우대하는 것이라기보다 전체 구성원 중 소수자에 대해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는 것으로서 합리적 사유가 있다고 판단하여 A항공의 손을 들어주기도 하였습니다.


재판에서 실제 오고간 논리를 살펴봅니다. 먼저 A 항공은  1) 단정한 복장과 용모를 유지하는 것은 근로자의 기본적인 의무이고, 2) 운항승무원의 불량한 용모나 태도는 고객의 신뢰도 하락으로 직결된다는 점 등을 들어 기업이 경영의 자유에 따라 구성원의 복장과 용모를 제한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길동씨는 1) 운항승무원은 업무 수행 과정에서 승객을 직접 마주하는 일이 거의 없고, 외국인 운항승무원의 상당수와 국내 다른 항공사 소속 내국인 운항승무원도 수염을 기른 상태로 근무하고 있지만 승객들로부터 불만이 제기되거나 징계가 이루어진 적이 없고, 2)  용모 규정은 운항승무원의 인격권과 행복추구권을 과도하게 제한하여 과잉금지원칙에 위배되며, 3) 용모 규정은 ‘승객에게 불쾌감이나 불안감을 초래하는 수염을 길러서는 아니 된다’는 내용으로 제한하여 해석·적용해야 하므로 단순히 수염을 길렀다는 사실만으로 위 규정을 위반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는 점 등을 들어 비행정지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법원의 판단은 무엇일까요? 


재미있는 것은 당시 경쟁항공사인 D 항공은 위와 같이 수염을 제한하는 규정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차별이라고 볼 여지가 많지요. 이러한 문제에서 크게 두가지가 쟁점이 됩니다. 헌법의 기본권은 국가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규정인데, 이를 회사에 주장할 수 있는지, 그 다음 적용된다고 할 때 기본권에 위배되는 취업규칙  및 그에 기초하여 이루어진 징계를 무효라고 볼 수 있는지 문제됩니다.


1심 법원(서울행정법원 2016. 5. 26. 선고 2015구합67014 판결)은, 우선 용모 규정이 남자 승무원의 인격권과 행복추구권을 침해하였다는 주장에 대하여 헌법상 기본권은 개인의 자유로운 영역을 공권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권리이므로 사기업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기본권 침해를 주장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수염을 길렀다는 이유로 한 비행정지가 업무상 필요가 있는지 또는 권리남용에 해당하는지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A 항공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항공사들은 항공 운항의 안전을 확보하고 고객으로부터 만족과 신뢰를 얻는 데 필요한 범위에서 제복을 착용하게 하는 등 복장이나 용모에 대해 일반 기업체에 비해 많은 제한을 가할 수 있기 때문에 용모조항이 이상하다고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외국인 직원과 차별 문제에 대하여는, 직원들의 복장이나 용모에 대해 폭넓은 제한을 할 수 있는 재량이 항공사에 있다고 보는 이상 소속 외국인 운항승무원들의 관습을 존중하여 그들에게 예외적으로 수염을 기르는 것을 허용한다거나 국내 다른 항공사와 다르게 직원들이 수염을 기르는 것을 금지한다고 하여 재량권을 남용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2심법원(서울고등법원 2017. 2. 8. 선고 2016누50206 판결)에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국적에 따른 차별'이라고 보고 1심 판결을 뒤집었습니다. 우선 헌법상의 기본권은 헌법의 기본적인 결단으로서, 모든 법영역에 그 영향을 미치므로 사인간의 사적인 법률관계도 기본권 규정에 적합하게 규율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용모규정은 합리적 이유 없이 내국인과 외국인 직원을 ‘국적’을 기준으로 차별함으로써 헌법의 평등원칙에 위배되고, 수염의 정돈 상태나 형태 등을 기준으로 부분적으로 제한할 수 있음에도 수염을 기르는 것 자체를 전면적으로 금지하여, 내국인 근로자의 일반적 행동자유권을 과도하게 침해함으로써 합리적인 차별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그 결과 내국인이 수염을 기르는 것을 전면적으로 금지한 조항은 헌법과 법률에 위반되어 무효이고, 이를 전제한 비행정지 또한 위법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1심과 2심의 결론이 달리 나왔으니까 대법원의 결론이 중요합니다. 하급심의 결론이 서로 다르면 각각의 결론은 나름대로의 근거가 있으므로 대법원 또한 심도있는 논의를 하게 됩니다. 회사 내부의 법률관계에 기본권이 적용되면, 회사는 직업(영업)의 자유를 근로자는 인격권을 각 주장하는데 이들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가 문제됩니다. 대법원(대법원 2018. 9. 13. 선고 2017두38560 판결)은 기본권의 제3자적 효력과 직업의 자유의 한계에 관하여 정밀한 판단을 하였습니다. 


먼저 헌법상 기본권 또한 개인 사이의 법률관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기업의 경영에 관한 사항에도 근로자와 관계 속에서 존엄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조화롭게 조정되어야 함을 당연히 전제로 보았습니다. 위 법리를 전제로 아래와 같은 점에서 용모규정은 기본권을 침해하므로 무효라고 보았습니다.

(1) 항공사는 고객의 신뢰와 만족도, 직원들의 책임의식 고취와 근무기강 확립 등 필요에 따라 합리적 범위 내에서 취업규칙을 통하여 용모와 복장 등을 제한할 수 있으나, 근로자의 기본권을 침해하여서는 안된다.
(2) 용모조항은, 일부 외국인 직원의 콧수염 외에는 직원들이 수염을 기르는 것을 전면적으로 금지함으로써 일반적 행동자유권을 제한하고 있고, 그에 따라 영업의 자유와 일반적 행동자유권이 충돌한다.
(3) 용모조항은 이익형량이나 조화로운 조정 없이 외국인을 제외하고는 모든 직원들이 수염을 기르는 것 자체를 전면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4) 오늘날 개인 용모의 다양성에 대한 사회 인식의 변화 등을 고려할 때, 수염을 기른다고 하여 반드시 고객에게 부정적인 인식과 영향을 끼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오히려  타인에게 혐오나 불쾌감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신의 외모 및 업무 성격에 맞게 깔끔하고 단정하게 수염을 기른다면 그것이 고객의 신뢰나 만족도 등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5) 기장은 고객들과 직접적으로 대면하여 서비스를 제공하지도 않고, 자신의 일반적 행동자유권을 지키기 위해서 선택할 수 있는 대안으로는 퇴사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수염을 일률적·전면적으로 기르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합리적이라고 볼 수 없다.


이 사례는 회사라는 사적인 법률관계에서도 기본권이 존중되어야 하고, 회사는 영업의 자유의 일환으로 근로자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는 있지만, 그 범위가 합리적이지 못하면 효력을 인정받기 어렵다는 점을 확인하였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처음 지방노동위원회에서 대법원에 이르기까지 계속 결론이 엇갈렷다는 것은 그만큼 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한 시각이 있을 수 있고, 어느 시각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만일 내외국인을 묻지 않고 모든 경우에 수염을 금지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외국에서는 당연히 허용되는 행위가 국내에서 금지됨으로써 시대착오적인 제한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극단적으로 이슬람에서 여성의 복장을 규제하는 것과 다르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비단 수염만이 문제일까요. 염색이나 문신을 금지한다면 어떨까요? 삭발이나 장발은 또 어떤가요? 남자들의 귀걸이나 피어싱이 폭넓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만일 공무원 집단이나, A항공과 같은 서비스직종에서 이들을 제한하면 어떨까요? 누가 그 경계를 정확하게 지을 수 있을까요? 예컨대 머리카락 염색이 여성은 자유롭게 허용되는데 남성들은 금지할 수 있을까요? 갈색은 허용하면서 붉은색이나 노란색은 금지할 수 있을까요? 위 대법원 판결의 취지에 비추어 보면 '타인에게 혐오나 불쾌감을 주는지' 여부가 중요한 기준이 될 것으로 생각되기는 합니다. 다만, 그마저도 주관적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