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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셀린 Feb 21. 2020

바다가 검어

2002

어푸. 
처음은 고등학교 동창들과였다. 어느 해안인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물에 빠진 여고생 둘 도구 해냈었다. 커다란 튜브에 의지하여 한 행동이지만 해안가까지 끌고 나오려니 내가 죽을 맛이었다. 너무 힘들어서 욕 기지가 나왔었고 구급대원에게 인계하고는 곧바로 해변가에 발랑 누워버렸다. 모래는 검었고 햇빛은 하얬다. 민소매 차림 그대로 상체는 까맣게 탔었고 그 해 겨울이 지나도록 색이 돌아오지 않았었다. 
두 번째는 내 생일을 잊었던 친구가 사죄를 하겠다며 번갯불에 콩 볶듯 다녀왔더랬다. 딱 2년 전이었고 걷고 싶었던 사려니 길은 갑자기 폭설이 오는 바람에 입구에서만 서성거렸었다. 횟집에서 포장한 회가 쫄깃했고 제주 에일맥주가 고소했다. 바람은 거세고 차가워서 어렵사리 올라간 오름에서는 머리채가 뽑힐 기세로 불어대었다. 과연 바람 많은 땅덩이였다. 게다가 소금기까지 머금고 있어서 그 찬바람에도 머리칼이 떡이 된 기억이 났다. 짭조름한 미역 냄새도 함께 올라왔다. 이어진 목장에서는 하필 나를 등지고 똥을 누는 조랑말 덕에 말의 항문을 면밀히 관찰할 수 있었다. 짚 냄새가 섞인 말똥내를 피해 오름을 뛰어 내려왔다. 그 덕에 왼쪽 발목을 한 번 접질렸고 사흘 정도 절뚝거렸다. 

고!
이번에도 본의 아니게 충동적이었다. 갑자기 싸게 풀린 제주도 항공권을 귀신처럼 건져낸 친구 덕이었다. 숙소도 별 고민 없이 동선에 맞춰 정하고 적당한 크기의 차를 예약했다. 몇 년 새 제주도 물가는 많이 올라있었다. 웬만한 맛집에서 둘이 잘 먹으려면 십만 원 가까이는 지출을 감수해야 했다. 좋은 기분은 아닐 것 같아 그런 가게들은 피했다. 그렇게 검색하는 데만 거의 삼십 분이 걸렸다. 가격은 좋으면 평이 별로고 음식이 괜찮다 싶으면 너무 비쌌다. 둘 다 만족하려니 숙소에서 꽤 떨어져 있었다. 평소에도 배만 채우면 되는 편이라 이런 식의 시간 소모는 딱 싫었다. 점점 기운이 떨어졌다. 가슴이 답답하고 멍해졌다. 이러려고 제주에 온 것은 아니었다. 

쓱-
목적의식을 가지고 여행을 하면 그것은 이미 여행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연스레 그곳의 공기를 흡입하고 흙을 밟고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며 그들이 먹는 음식을 맛보며 조금이나마 커다란 집단의 발 끝을 슬며시 적셔보자는 것이 의식하지 않은 목적일 것이다. 그 관점에서는 지금 이 시간이 여행이라고 하기엔 조금 지나친 감이 있다. 제주의 지역 특색은 분명히 있을 것이지만 며칠 만에 그것에 도달하기엔 너무나 기저에 자리 잡은 것이었다. 어쨌든 같은 국가의 사람 아닌가. 집단 무의식은 분명 같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곳에 지금 왜 온 것인가. 오래간만에 싸게 풀린 티켓에 홀려서? 평소 흠모하던 제주 음식이 있었던가. 고향은 쌍문동이니 이곳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아예 이유 따윈 생각을 말아야 하나. 굳이?
결국 적당한 곳에서 가성비가 괜찮은 음식을 먹고 알맞은 도수의 술을 매우 적절하게 마시고 목욕재계를 마치고 평온하게 잠을 청하게 되었다. 보송보송한 신생아 같은 기분으로 하얀 이불속에 온몸을 휘감았다. 그때쯤엔 이미 왜 왔을까 하는 의문 따윈 이미 까맣게 잊었다. 시체처럼 곯아떨어졌다. 

식. 
바람 소리에 잠이 깼다. 눈을 감고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자연스레 청각에 신경을 집중하게 되었다. 우아하면서 동시에 거세게 허공을 가르는 기세였다. 이어 찰싹거리는 파도의 움직임도 들렸다. 누군가가 지저귀듯, 기름에 무언가 끓듯 한 소리에 의식은 점점 또렷해졌다. 눈을 떴다. 오래간만에 숙면을 해서 그런지 피로감은 전혀 없었다. 서늘한 새벽 기운에 이불을 둘러매었다. 해가 뜨기 직전이었는지 테라스가 어슴푸레 밝아 보였다. 회색 하늘이었다. 약간의 태양과 하늘을 가득 채운 구름 때문이겠지. 몽실몽실한 구름은 그 주름이 또렷하게 보였다. 중간문을 살짝 열었다. 찬 바람이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거셌다. 둘러맨 이불이 흔들렸다. 한 발 짝 나갔다. 맨발이 무척 찼다. 바람은 멈추지 않고 불어댔다. 다시 더 나아갔다. 회색 하늘이 비친 바다는 검었다. 먹물을 풀어놓은 것 같았다. 바람이 거센 만큼 파도도 높았다. 서로 부서질 때마다 그 입자들이 생생하게 보였다. 여기까지 왔다가 저기만큼 멀어진다. 커다랗고 까맣게 몰고 왔던 바닷물을 시원하게 쓸어가고 하얗고 거친 거품들을 만들었다가 다시 몰려왔다. 부서시고 물러나며 해는 점점 솟았다. 구름의 주름이 진해진다. 그토록 검었던 바다가 조금씩 맑아지는 듯하다. 바람은 멈추지 않았다. 그 순간은 바다와 나 밖에 없었다. 둘이서만 감정을 나누고 있었다. 녹진하게 쌓여있던 일상의 찝찔했던 감정들을 씻겨 주고 있었다. 애써 부서뜨리고 닦아주었다. 나는 가만히만 있으면 되었다. 

아.
내가 이러려고 여기까지 왔구나. 지금의 청결한 의식은 일반적인 휴식으로는 감히 욕심 낼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비록 현실의 문제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잠시 나와 격리할 수 있던 순간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늪 같은 곳에서 깨끗하게 빠져나온 느낌이었다. 당장은 영원히 돌아가지 않을 것 같지만, 테라스를 벗어나는 순간 원래대로 돌아갈 예정임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는데 어쩌면 이렇게 개운하고 시원할까. 그래, 요는 해결이 아니라 분리 같은 것이 필요함이었던 거다. 여행은 사실 이런 것이었어. 남 의대 한 이해는 잠시 접고 싶었다. 지금 단 몇 분은 오로지 세상에 나로서만 존재하고 싶었다. 

오. 
친구가 깼다. 문을 열어둔 탓이었다. 멍하니 뭐 하고 있냐고 얼른 문이나 닫으라고 했다. 아니, 나는 그냥 있었어. 아침 먹으러 갈까? 상큼한 주스 같은 거 마시고 싶다. 맨날 마시는 카페인 그득한 커피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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