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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셀린 Apr 16. 2020

Whispering

2004


 타이밍이 딱 맞게 중환자실에 입실하는 환자들이 더러 있다. 양압방이 준비되어 있고 이런저런 기기들도 세팅이 되어 있으며 병동도 그렇게 바쁘지 않을 그 순간. 그에 맞는 환자가 나타난다. 얼마 전 입실한 그 환자도 그랬다. 역시나 상태가 많이 좋지 않아 인공호흡기는 물론 플로 가드가 열한 개 정도 필요했는데 병동에 딱 그만큼 여유분이 있었다. 운이 좋은 편이었다. 다만 CRRT가 없었으나 의료진은 환자의 젊은 나이와 그래도 희망을 보이고 있는 여러 결과들에 기대어 볼만 하다고 판단했다. 

 정말로 깜짝 놀랄 만큼 상태가 좋아졌다. 이틀 만에 열렬히 돌아가고 있던 열한 대의 플로 가드는 단출하게 세 대로 줄었고 인공호흡기 제거 또한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혈소판이 바닥이었고 호흡이 빠른 편이긴 했지만, 수혈로 부족한 부분을 메우면 되었고 빠른 호흡수에 비해 환자는 그렇게 힘들지 않다고 했다.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며 중간중간 편안하게 조는 모습까지 보였다. 그렇게 슬슬 병동을 옮길 수 있는 컨디션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환자도 안심하였고 무척 협조적이었다. 

 다음 날 전동 예정이었으나 해당 병동에 자리가 없었다. 다행히 환자는 여기가 많이 불편하지 않다며 괜찮다고 했다. 더 좋아진 컨디션으로 그 날 미음을 시작했는데 거의 다 비워냈다. 사실 며칠 만에 시작하는 식사를 그렇게 맛있게 싹싹 비운 환자는 오랜만이었다. 마침 라운딩을 돌던 담당의에게 알렸다. 별 것도 아닌데 서로 기뻐하며 그 날 점심을 바로 죽으로 바꾸었다. 덕분에 반찬다운 반찬을 먹게 되었다며 환자도 미소를 지었다. 시간마다 세팅된 항생제를 투여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였다. 항암을 시작하면서 당뇨와 고혈압이 생겼다고 했다. 언니들과 사이가 좋다고 했다. 드라마틱하거나 역정을 내는 것이 아닌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타입이었다. 듣기 편했다. 간호사들끼리는 ‘모범생 환자’라는 인계를 주고받았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틀 만에 생명의 바닥까지 내려갔다가 차고 올라와 살아남은 심정이. 지금 이 환자의 나직하고 꾸밈없는 말투로 듣고 싶었다. 어쩌면 실례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잊고 싶은 기억일지도 모르니까. 누구는 몸살이 심하게 온 느낌이라고도 했었고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환자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 환자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이 정도 라포 정도면 말 정도는 붙여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여기 오기 전에 있었던 일들이 기억나느냐고 물었다. 드문드문 꿈결처럼 기억난다고 했다. 숨쉬기 어려울 때도 있었지만 금방 괜찮아졌다고 했다. 물 밑 아래로 가라앉는 느낌도 있었다고 했다. 다만 확실히 기억나는 것이 있다고 했다. 며칠 전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몸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갔었다고 했다. 앞을 보고 싶은데 눈꺼풀을 들어올 히마리 하나 없을 정도였다고 했다. 정신은 또렷한데 몸을 움직일 수 없어 겁이 덜컥 나더랬다. 알람 소리도 들리고 중간중간 사람 목소리도 들리긴 해서 죽은 것 같진 않은데 너무나 이질적인 느낌이라고 했다. 몸을 움직일 수만 있었다면 그 공포감에 덜덜 떨었을 것 같다고 멋쩍게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을 그때, 누군가가 분명하게 귓가에 속삭였다고 했다. 환자분은 몹시 위중한 상태였기에 여기까지 오시게 되었고, 지금 인공호흡기를 하고 있다고. 이 장치가 엄청나게 힘든 치료법이라서 진정제가 투여되고 있다고. 아마 지금은 강력한 근이완제가 들어가고 있어 몸은 움직일 수 없겠지만 제 목소리는 들릴 수도 있다고. 지금 체온을 잴 것이며 많이 높은 편이라 아이스팩을 겨드랑이 사이에 끼울 거고 곧 가래를 뽑을 거라고. 

 나는 아직 죽은 것이 아니구나, 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했다. 그 속삭임이 자신을 얼마나 안심시켰는지 모른다고. 나지막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고 지금 어떤 행위를 할 것이라 예고하고 무언가를 하곤 했단다. 나중에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며 그 사람이 누군가 찾고 싶었지만 그게 꿈인지 현실인지 확신이 안 서서 묻기가 조금 그랬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환자의 손을 꽉 잡았다. 그건 현실이었다고. 정말로 괜찮은 간호사를 만났던 것 같다고. 상태가 안 좋았을 때 지체 없이 중환자실로 올 수 있었던 것도 꽤 운이 좋은 편이었는데 거기에 좋은 간호사까지 만나서 이렇게 빨리 좋아질 수 있었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잘 드셔서 아마 더 나아져서 전동을 갈 수 있을 거라고 전했다. 그러고는 에둘러 양압방을 나왔다.


 삶의 바닥에서 가까스로 올라온 환자의 심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속삭였던 간호사가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았다. 지금 엄습하는 것은 순간의 반추뿐이었다. 나는 과연 어떤 간호사인가. 아니, 어떤 사람인가. 환자를 사람으로 대하자고 입으로만 까불대는 편은 아니었을까. 언제부턴가 완전한 진정 상태의 환자들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거라고 멋대로 추측했던 것이 오산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냥 인간 됨됨이가 별로였는데 그저 안 그런 척 쿨한 척 일하던 간호사였을지도 모르겠고. 타성에 물든다는 것은 어쩌면 바깥에서가 아니라 스스로가 낳아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태 지나온 환자들을 떠올리며 누군가에게는 미안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괜찮았냐고 물어보고 싶어 졌다. 이 느낌이 후회는 아니다. 대체 무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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