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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셀린 Oct 18. 2020

깜빡이지 않는

2010

 두어 시간을 쉬지 않고 걸었다. 계속 무언가 샀고, 가끔 목이 마를 때는 선 채로 차가운 음료를 마셨다. 꿀꺽꿀꺽.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소리가 옆에서도 들릴 만큼 시원하게 들이켰다. 하나 둘 늘어가던 쇼핑백은 더 이상 감당이 안 되어 여러 개의 내용물을 하나로 합쳤다. 그래도 네 개의 백. 날카로운 물건은 없지만 혹시나 찢어질까 봐 한 번 더 포장하기로 했다. 필요한 것은 다 샀을까 하고 생각해보다가 퍼뜩 떠오른 게 있어서 다시 발길을 돌려 가게로 향했다. 이제 다 산 것 같은데. 나중에 틀리거나 모자라는 게 있으면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너무 피곤했으므로. 점점 무거워지는 쇼핑백을 내내 들고 다녔더니 이두근이 뻐근하다. 손가락 마디까지 아릴 지경이다. 택시를 탈까, 버스를 탈까 잠시 고민을 했다. 둘 다 시간은 비슷하게 걸리는 애매한 거리. 몸은 천근만근이라 택시 쪽으로 마음이 기울 무렵 마침 텅 비어있는 버스가 도착했다. 자질구레한 걱정을 금방 잊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을 크게 내쉬며 좌석에서 털썩 소리가 나도록 주저앉았다. 버스기사가 나를 훌쩍 쏘아보았다. 조금 머쓱하여 이어폰을 꺼내어 음악을 듣는 척했다. 버스 안에는 나 포함 세 명 정도였다. 


 부서를 옮겨야 할까. 어차피 내년에 플로팅 갈 예정이라 그 부평초 같은 시간이 벌써부터 싫다. 그래서 부서이동을 지금 한다면 말 그대로 물에 떠다는 시간을 생략할 수 있다. 어떤 간호사들은 그 간극이 숨 돌릴 틈으로 여겨진다고도 했다. 정말 그런 시간일까. 나는 그런 방식이 맞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지금 그 부서에서 업무 중인 혹은 업무 경험이 있는 간호사들에게 주로 어떤 환자들이 있는지, 분위기는 대체적으로 어떤지 물어보곤 했다. 급하게 꾸려진 부서이기에 우여곡절이 많았고 지금도 해결이 잘 되는 편은 아니라고 했다. 가면 고생문이 열릴 것이라고. 내가 가게 되면 연차가 낮은 편도 아니라 아마도 거의 세팅을 시작해야 할 것이라고도 했다. 하드웨어적인 문제라기보단 부서 내의 소프트웨어 같은 것을 새로 정립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물론 모두들 최선을 다하고는 있지만 이미 길게는 이십 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그들만의 역사가 새겨진 기존의 부서의 그것을 따라잡기는 당연히 역부족인 것이다. 무엇보다 각 부서에서 각출되어 바로 업무를 시작했기에 보는 눈도 다르고 중요하게 여기는 간호 중재도 다를 것이라는 분위기가 쉽게 예상되었다. 각자 여태 해오던 방식을 버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누군가 맞을 수도 있고 내가 틀릴 수도 있겠다. 크게 보면 어쨌든 환자를 위한 방식의 차이일 텐데 그러한 태도가 서로 모래처럼 씹히는 느낌이 아닐까 싶다. 물과 기름까지는 아니겠지만 각자 혹은 따로 또 같이 겉도는 느낌. 심지어 아주 애매하고 미미하게. 누구도 뭐라 하기 힘든 구조와 특성일 것이다. 걱정이 슬슬 되었다. 


 깜빡 졸았다. 창문에 머리를 쾅 부딪히고 누가 볼 새라 나도 모르게 안 잔 척. 밖을 보니 다음 정거장에 내려야 했다. 잊고 내리면 안 된다는 결심을 하며 모든 짐을 꾸리고 무사히 내렸다. 우리 동네 버스정류장은 횡단보도가 이어져 있어 신호만 맞으면 바로 길을 건널 수 있는 구조였다. 언뜻 흐름을 보니 하필 지금 녹색 신호등이 15초 정도가 남았다며 깜빡거리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삼십 미터가 채 안 되는 횡단보도라 후딱 뛰면 건널 수는 있겠지만 지금은 짐이 많았다. 이대로 뛴다면 탁탁 이어지는 중력의 반동에 슬관절까지 쑤실 것 같다. 그렇다고 이 짐들을 가진 채 길 한가운데 서있기도 싫었다. 얼른 집에 도착해서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짐을 하나하나 천천히 풀어내고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데워 마시고 바스락 거리는 홑이불에 몸을 말고 잠들고 싶었다. 역시 아까 택시를 탔어야 했나. 그렇다면 이런 걱정은 안 해도 되잖아. 신호등이 14초가 되었다. 뛸까. 말까. 손바닥이 시려 왔다. 오른쪽 신발 뒤축도 살짝 벗겨진 느낌이다. 왜 늘 오른쪽 신발만 벗겨지는 것일까. 척추 어딘가부터 살짝 뒤틀린 축이 발 뒤꿈치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일까. 13초. 코 안 쪽도 간지러운 것 같다. 마스크를 벗고 시원하게 코를 풀어버리고 싶다. 그러고 나서 샤워 전에 차가운 맥주를 한 잔만 따라 마실까. 12초. 그래, 건너자! 오른쪽 운동화의 앞축을 툭툭 차고 바로 힘을 주었다. 흰검 흰검 흰검 흰검의 사다리처럼 그려진 길바닥에 발을 내디뎠다. 높이뛰기를 위한 도약을 하는 운동선수처럼 보폭을 크게 하며 종아리를 휘저었다.


 나는 가겠다고 했다. 누가 보면 느닷없는 결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2주 정도 굉장한 고민을 한 결과였다. 10월부터 바로 ACU3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같은 공간에서 일할 때는 나름대로 의지가 되던 친정, MICU1이 예비지에서 이사를 가버리고 휑한 공간에서 꿈 척 꿈 척 살림을 꾸리고 있다. 다행히 몇몇 아는 간호사들도 있어 크게 낯설지 않고 무엇보다 중환자실의 모든 부서에서 지원 사격하고 있어 그런 휘몰아치는 기운이 엄청난 도움이 된다. 그러니 새로운 세팅은 무슨. 아직은 적응에만 올인하고 있는 중이다. 안 힘든 척, 괜찮은 척을 해야 하는 단계. 초조해 보이면 망한다. 연못 안에서 발목에 쥐가 나도록 휘젓고 있는 백조처럼 굴어 댈 것이다. 시스템과 환자에의 적응,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깜빡이는 신호등 아래의 횡단보도를 건너기로 했고 아직은 녹색 등이 켜진 상태다. 누가 억지로 밀친 것이 아니다. 스스로 내린 결정. 분명히 나는 시간 안에 무사히 건널 것이다. 응당 그럴 것이다. 두 손은 여전히 무겁고 오른쪽 운동화는 제대로 신겨지지 않았지만. 나는 건너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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