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풀리고 햇살이 따스해지자 중저음의 배기음을 우렁차게 울리며 할리데이비슨를 탄 라이더들이 무리지어 도로를 달린다. 휴무일에 맞이하는 봄날의 아침은 라이더들의 질주로 깨어난다.
새롭게 편집된 강화 나들길 안내 자료에 따르면 예전의 7-1코스는 그 이름이 20코스로 바뀌었고 부제도 갯벌 보러가는 길이다. 전체 20개 코스는 변함이 없다.
7코스와 7-1코스는 화도 공영주차장에서 여차리 제방길 까지 나오는 구간에서 겹치는 부분이 있다. 마니산 자락을 지나오는 길인데 성공회 내리성당이나 마니산 청소년 수련원은 부득이 다시 보게 된다. 7-1코스는 7코스를 걸은 뒤 6개월 후에 걸었다.
걷는 방향을 화도 공영주차장에서 분오리 돈대로 정했기 때문에 강화터미널 5번 탑승대에서 화도행 4번 버스를 탔다. 순환버스가 아닌 경우, 보통 강화터미널에서 20분 정도면 강화도내 웬만한 목적지에 도착한다.
화도 공영주차장에 도착 후 머릿속으로 배낭에 챙긴 것들을 떠올려 본다. 미처 챙기지 못한 것들이 생각나면 가까운 편의점에서 구입한다. 길을 걷는 도중엔 구멍가게 만나기도 쉽지 않으니 간단한 간식거리를 준비해 가는 것이 좋다.
코스를 출발하여 마니산 쪽으로 꺾어들면 100여 년 된 내리성당이 있는데 대규모 공사 중이었다.
임야엔 경칩이 지나면서부터 파릇한 싹들이 돋아나며 바야흐로 땅의 축제가 시작되었다.
마니산 끝자락을 끼고돌며 고개를 넘는 도중에 산비탈을 개간하여 밭으로 꾸며 놓은 곳이 있다. 밭의 경계를 돌아가며 나무말뚝을 박았는데 말뚝 사이는 고무호스로 연결하고 말뚝 위엔 고무장화를 거꾸로 씌워 놓은 모습이 특이하다. 폐기물을 적절히 활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조금 더 걸으니 산골짝엔 사찰 건축이 한창이다. 통나무 기둥이 세워졌고 목공들이 지붕에 올라가 작업 중이다.
마니산 청소년 수련원을 지나오면 드디어 멀리 갯벌이 보이기 시작하며 멀리 바다가 아련하다.
이곳에서 보이는 강화 갯벌은 우리나라 서남해안의 갯벌 면적 중 11.4퍼센트나 차지할 정도로 넓은 갯벌이다. 아울러 캐나다 동부 해안, 미국 동부 해안 그리고 북해 연안, 아마존 강 유역 갯벌과 더불어 세계 5대 갯벌로 꼽힌다.
잿빛 갯벌 먼 곳에 바지락 등을 채취하는 어촌계 사람들의 모습이 가물거린다. 갯벌이 넓게 펼쳐진 곳은 직선거리로 4킬로미터나 나간 곳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강화도를 걷다보면 의외로 논이 많다. 특히 제방길 안쪽으로 자주 보인다. 강화섬 쌀은 맛이 좋아 인기가 높다. 산과 바다 그리고 넓은 농경지와 도읍지와 가까운 위치 등 이런 조건으로 인하여 강화도는 외세를 피하는 피난처로 손꼽혔던 거 같다.
지나는 제방길과 길가 풀들은 아직 옅은 황토색이다. 이제 봄맞이 준비를 시작하나보다. 길옆으로 펼쳐진 갯벌은 끝이 안 보이는데 흐린 하늘색과 맞물려 하늘과 갯벌의 경계가 애매하다.
하늘은 흐렸지만 걷기엔 적당한 날씨다. 춥거나 덥지 않고 약간 서늘한 날씨가 오히려 좋다.
동막 해수욕장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지점에서 큰 연못 같은 곳을 지난다. 흥왕 낚시터다. 수면의 얼음은 다 녹았고 물 색깔이 갯벌 색과 비슷하다. 하늘, 갯벌, 물이 온통 잿빛이다. 잿빛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어, 잿빛으로부터 도망치지 못하고 그 속에서 허우적대는 느낌이다. 걸어도 여전한 잿빛이다. 흥왕 낚시터는 텅 비어있다. 낚시터 옆의 마니산 자락이 초록의 생명으로 태어나야 물 색깔도 맑아질 것이고 물가에 사람들이 앉을 것이다.
보통 썰물 때에는 바닷가로 난 코스를 걷는다. 다만 밀물 때를 대비해 바닷가를 우회하는 코스도 마련돼 있다. 당일로 걷기를 마치는 코스는 대부분 오후 시간에 바닷가를 걷기 때문에 밀물을 만나 우회한 기억은 없다.
흥왕 저수지를 지나니 갯벌에 굵게 패인 수로를 만난다. 밀물 때는 보이지 않던 물길이다. 수로 곁엔 밀물을 기다리는 파란색의 작은 고깃배들이 갯벌에 묶여있다.
3월 초에 만나는 길의 색깔은 단조롭다. 하지만 요란하고 컬러풀한 일상에 지쳤다면 이 길이 필요하다. 20초마다 바뀌는 현란한 광고, 집요하게 요구하는 구매의 충동질, 의지를 무력화시키는 시각과 청각에 대한 무차별 공격에서 자신의 소리를 찾고 싶을 때가 있다. 이런 문명의 발광에서 벗어나 무채색에 가까운 바다와 한 시간 넘게 이어지는 잿빛 갯벌을 보며 계속 걷다보면 영향 받지 않은 고유한 자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작지만 가치 있고 소중한 생각들이다.
동막 해수욕장 가까이에 오면 전망 좋고 운치 있는 카페들이 보인다. 갈릴리, 더 뷰... 등. 바닷가에 위치해 있어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며 큰 창을 통해 바다를 볼 수 있다. 실내를 벗어나 바다 바로 앞에 설치한 테이블도 있다. 날씨만 따뜻하다면 훨씬 운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다.
동막 해수욕장엔 길을 걷는 두 사람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서 있다. 그 옆으로는 저어새 서식처라는 안내판도 있다. 저어새 보호를 위하여 적극 협조 해달라는 글이 쓰여 있는데, 보호를 원한다면 사람 출입을 막아야지 사람이 몰려드는데 무슨 보호가 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 저어새는 좀 더 아늑한 곳으로 거처를 옮겨 갈 것 같다.
해변의 갈매기 수십 마리가 어려워하는 기색 없이 사람 근처로 날아든다. 새우깡 받아먹는 것에 익숙해졌는지도 모르겠다. 바다와 모래밭 그리고 갈매기가 빚어내는 풍경엔 낭만이 있다.
갈매기가 나는 하늘 아래 젊은 연인이 손을 잡고 걷는다. 당신이 세상이었던 시절. 당신이 있음으로 세상에 부러울 것 없는 순간, 그런 행복감에 젖어 있는 시간이리라. 그들의 세상엔 단 두 사람만 있을 것이다. 파도치는 해변을 흰 털 강아지가 달린다. 바닷물에 코를 박기도 하는데 짠 물을 마시진 않겠지. 촐랑촐랑 뛰다가 뒤돌아보고 다시 앞으로 뛴다. 줄에서 풀린 강아지도 모처럼 신나는 시간이다. 이들은 시간이 멈추길 바란다. 너무 빨리 흐르는 이 시간이 아깝다. 느릿느릿 해변을 걷는다. 말없이 마주 잡은 손의 촉감에 집중하며, 손을 통해 전해지는 따스함으로 너의 마음을 다 가진 것 같은 풍요로움에 빠져든다.
동막 해안을 따라 나란히 길을 걷다 보면 동막해변 가는 길이라고 글과 그림이 그려져 있는 7-1 코스 안내판이 서 있고 그 밑엔 긴 의자가 놓여 있다. 포토존 이다. 내가 이곳에 있었다는 흔적을 남기려면 그 의자에 앉아 바다를 배경으로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면 된다. 흔적을 남길 필요도 있겠지만 누군가는 아무런 흔적 없이 살고 싶어 한다. 사실 그런 흔적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가 있기도 하다.
해변을 보니 삼각대를 세워 놓고 폴짝폴짝 뛰는 세 명의 여학생이 보인다. 자동으로 놓고 점핑을 하는데 타임이 잘 안 맞나 보다. 몇 번을 반복한다. 내가 내려가서 찍어줄까 하다가, 저것도 재미다 하며 그냥 지나친다. 그들이 누리는, 함께하는 즐거움을 방해하지 말아야지. 그들도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세월은 흐르고 추억만 남게 되리라는 것을.
동막 해변 끝, 언덕 위에 분오리 돈대가 있다. 오늘 걷기의 도착점이다. 지난 번 낮에 이곳을 들렀을 때에는 웨딩 촬영 온 팀을 보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곳에서는 일몰이 장관이다. 해가 지기 전부터 동막 해변을 물들이며 기우는 저녁노을을 보러 여러 명이 카메라를 들고 기다린다. 바로 옆의 분오리 선착장엔 횟집이 늘어서 있어 저녁의 여유로움 속에서 인생의 맛을 즐길 수 있다.
걷기를 마치고 강화 버스터미널로 돌아올 때는 분오리 돈대 버스 정류장에서 1번 순환 버스를 타고 오면 된다. 바로 앞 동막해변 정류장 통과 시간이 각각 2시 47분, 3시 47분, 4시 47분이니 그전에 나가 기다리면 버스를 탈 수 있다.
코스 전체를 걸을 시간적 여유가 없다면 동막 해수욕장과 분오리 돈대만이라도 돌아볼 것을 권한다. 특히 해질 때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