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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현 Nov 10. 2024

동구릉 숲길

지난 8월에 서울의 지하철 8호선이 경기도 북쪽으로 별내까지 개통되었는데 그 노선에는 동구릉역이 포함되어 있다.

동구릉은 목은산 모임에서 9년 전에 조선의 왕릉 순례를 하면서 한번 다녀간 적이 있다.

그 당시에는 구리에 있는  동구릉이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가기가 쉽지 않았는데 이제 지하철역이 생겨서 어렵지 않게 가까이 갈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왕릉을 가끔 찾는 이유는 역사적인 장소를 탐방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왕릉을 둘러싼 주변의 숲(특히 소나무숲)이 몇 백 년 동안 잘 보존되어 울창한 숲길이 좋고 겨울에도 푸른 숲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숲길을 봄에 두 달(5-6월), 가을에(10-11월) 두 달만 개방하여 일반인들도 이 숲길을 걸어 볼 수 있게 했다.

오늘은 이 동구릉 숲길을 걸어보기로 한다.


지하철 8호선(별내선이라고도 함) 동구릉역 3번 출구에서 열두 명이 모였다.

전철역에서 나와 휴대폰  ‘길찾기’가 가리키는 대로 곧장 10 분쯤 걸어가니 동구릉 입구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매표소에서 경로우대 입장권을 받으려고 하니 직원이 출입구 쪽으로 가라고 손짓한다. 노인들은 출입구 앞에 있는 신분증 인식기에 신분증을 갖다 대기만 하면 통과할 수 있다. 서울 시내의 4 대 궁궐 입장도 이렇게 하는데 여기서도 같은 방식으로 입장하는구나.

입구에 들어서면 안내도가 서  있다. 동구릉東九陵은 이름 그대로 왕릉과 왕후릉이 아홉 언덕에 모셔져 있으니 이곳을 꼼꼼히 다 돌아보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다.

 먼저 이곳에 능터를 처음 잡은 조선의 제1대 임금 이태조의 건원릉부터 찾아가기로 한다. 태조 임금은 이곳에 능터를 정하고 근심을 덜었다고 한양으로 돌아가던 길에 쉬어가던 마을을 망우리忘憂里라고 불렀다 한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작년에 망우 역사문화공원을 걸으면서 들은  적이 있다.

건원릉은 입구에서 제일 먼 곳에 자리 잡고 있어 가는 길이 꽤 긴데  길 양쪽에는 오래된 소나무 숲이 울창하다.


1960년대에 동구릉이 아직 사적지로 지정되지 않고 방치되어 황무지의 언덕 같은 상태로 있을 때에 이곳은 봄가을에 학생들의 소풍지로, 겨울에 눈이 오면 아이들의 눈썰매장이 되기도 했었다. 1960년대가 끝나갈 무렵 겨울방학에 내가 동아리 활동하던 등산부에서는 겨울원정 산행 대신 대관령으로 스키 훈련을 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 해 겨울에 심한 폭설이 내려 강원도로 가는 교통이 끊기고 대관령행은 기약 없이 연기되고 있었다. 우리는 버스길이 뚫리기를 기다리는 동안 서울서 가까운 동구릉에 와서 눈 덮인 비탈길에서 스키를 신고 걷는 연습을 하며 초보자의 걸음마를 시작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동구릉에 발을 디뎌 보았고 동구릉을 알게 되었다. 오늘 이 길을 다시 걸으니 50여 년 전의 그날이 기억난다. 그때 신성한 구역을 침범하며 무지한 행동을 했었구나 하고 잠시 부끄러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후 2년쯤 후에 동구릉은 사적지로 지정되어 문화재 보호구역이 되고 2009년에는 드디어 조선왕릉이 모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이다.


건원릉을 향해 걸어가는 도중 이런저런 옛날 생각을 하는 사이에 현릉이라고 하는 제5대  문종의 능을 먼저 만난다. 5대 왕이라니 그렇다면 2대 정종, 3대 태종, 4대 세종왕릉은 어디에 있지? 하는 의문이 잠깐 생긴다. 생각해 보니 태종은 서울의 남쪽 대모산기슭 헌인릉에 모셔져 있고 세종은 여주의 영릉에  모셔져 있고 정종은 개성 근처에 능이 있다니 아들과 손자는 이곳으로 안 오신 거네?  이태조께서 이 왕가의 가족과 후손들이 사후에 이 자리에 모이도록 미래를 내다보고 길지라는 이 터를 잡으셨을 텐데..? 두 번째 왕비인 신덕왕후는 정릉에 있고 아들과 손자는 다른 곳으로 갔으니 태조 임금께서는 지하에서 서운해하실 것 같다.  


문종릉을 지나 얼마 가지 않아서 멀리 홍살문과 정자각 그리고 봉분 하나가 보이는데 봉분이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지 않고 풀이 삐죽삐죽하게 자란 것이   멀리서도 보인다. 태조의 능이 틀림없는 것 같다. 태조의 유언에 따라 봉분 위에 잔디가 아니라 억새풀을 고향 함흥에서부터 가져와 심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능침 위로는 올라갈 수 없어 석상들이 있는 봉분에는 가까이 가지 못하고 아래에서 참배한 후에 홀로 외롭게 누워있는 태조의 능을 뒤로하고 내려온다. 내려오는 길 오른편에서  인조의 두 번째 왕후인 장렬왕후의 휘릉을 만난다. 그 옆에 동구릉숲길이 시작된다는 현수막이 있다.

현수막에는 이 숲길이 앞에서 말했듯이 10월부터 11월까지 개방된다고 적혀 있다. 안내도에 의하면 이 숲길을 따라 끝까지 가면 영조의 원릉에 이른다.

울창한 숲길에 들어서니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600년 이상 보존되고 훼손이 적어 오래된 소나무 고목들이 빽빽이 늘어서 있다. 숲 사이로 올려다 보이는 맑은 하늘에 흰 구름도 아름답다. 이 숲길은 오르막 내리막길이 적당히 계속되어 등산하는 기분도 난다.


내리막길이 끝나니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원릉이다. 영조는 조선의 문예부흥기를 이끈 왕으로 칭송받았지만 태조와 마찬가지로 부자 갈등에 관한 이야기를 후세에 많이 남긴 왕이다.


이외에도 역사책이나 문학작품과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선조와 인목왕후의 능도 동구릉에 있고 다른 추존왕이나 왕후의 능이 더 있지만 오늘 모두 다 돌아보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다시  입구로  돌아오니 벌써 두 시간이 지났다.


점심에는 입구 근처에서 보아둔 식당이 있어 예약을 하지 않고 들어가 보니 만석으로 빈자리가 없다. 할 수 없이 그 옆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가니 다행히 한쪽에 우리가 앉을자리가 남아 있다. 잠시 후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오는데 예약한 단체손님들인가 보다. 왁자지껄한 가운데서 정신없이 점심을 먹고 나서 찾아간 한옥 카페는 손님은 많아도 장소가 넓어서 다행히 비교적 조용하다. 운치 있는 야외 좌석도 있어 우리는 오붓하게 그곳에 앉는다.


새로 개통된 지하철 8호선 덕에 편하게 동구릉에 와서 역사공부도 하고 숲길도 걸으며 만족하게 하루를 보냈다.

오늘 걸은 거리는 10.5km,  시간은 2시간 20분, 걸음수는 13800 걸음이다.


2024년 10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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