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예보에 오늘 아침에는 날씨가 추울 테니 옷차림을 단단히 하라고 일러준다.
오늘은 60여 년 전에 우리들의 놀이터요 소풍지였던 덕수궁을 둘러보고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 옛 교정이 있던 곳도 찾아보며 추억을 끌어내보기로 한다.
그 당시 정동 일대에는 남녀 중고등학교가 여럿 있어서 그때 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에게는 특히 이 거리가 추억이 많은 장소가 될 것이다.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 앞에서 우리는 열다섯 명이 모였다. 날씨도 화창하다. 우리 동창회의 동기회장은 친구들이 추억의 장소를 거니는 것을 사진으로 찍어 내년 졸업 60주년 기념일을 위해 동영상으로 만들겠다고 사진사까지 대동하고 등장한다.
때마침 대한문 앞에서는 수문장 교대식이 진행되고 있어 관광객들도 많이 모여들고 있다.
우리는 대한문으로 들어가서 금천교를 건너기 전에 우선 오른쪽 돌담 안쪽 길을 따라간다. 그곳에는 우리가 예전에 겨울이면 스케이트를 타던 연못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 이렇게 좁은 연못에서 스케이트를 탔다고? 실제로 연못은 많이 좁아진 것 같다. 연못 옆 궁궐담 밖으로 세종대로(구 태평로)가 확장되면서 담장이 안쪽으로 밀려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때는 덕수궁 담이 돌담도 아니었고 철제 울타리여서 바깥 길에서도 담장 안의 연못이 보였다. 우리는 어느 해 겨울 체육시간에 이 연못에서 스케이트 시험을 보았던 기억을 한다.
그다음에 가 볼 곳은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을 지나서 그 옆의 석조전과 그 정원이다.
오래된 옛 앨범을 들치다 보면 덕수궁에서 찍은 사진들이 많은데 특히 석조전 연못 앞에서 석조전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들이 많다.
석조전은 대한제국의 황궁 건물로 당시에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신고전주의 양식의 서양식 석조건물로 사진에 아주 멋지게 나왔었다. 석조전 앞에는 유럽식 연못도 있는데 그때 미술시간에는 이 연못 주변에서 사생대회도 했고 가을이면 국화꽃 전시회도 관람하곤 했다. 여고를 졸업한 후에도 친구들은 여기서 데이트를 많이 했다고 고백한다. 그 후 석조전은 고궁박물관인 적도 있었고 미술관이 되기도 했으니 정원과 함께 젊은이들에게 아주 좋은 데이트 코스였을 것이다. 이제 궁궐의 내부가 옛 모습으로 복원된 석조전 동관은 국립현대미술관이 된 서관과 더불어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이 많이 찾는 서울의 명소이다.
우리는 예전 사진에서 자주 보았던 연못가 그 자리에 앉아서 단체 사진도 한 장 찍으면서 석조전의 기둥이 코린트 식이니 이오니아 식이니 하며 다투어 그 옛날 역사시간에 배웠던 것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다.
그런데 석조전 왼편 언덕에 낯선 건물이 한 채 보인다. 얼마 전까지도 못 보던 붉은 벽돌의 근대 서양식 건물이다. 가까이 가서 안내판의 설명을 읽어보니 돈덕전이라고 덕수궁의 부속 건물인데 고종 즉위 40년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1902-3년) 영빈관 같은 건물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돈덕전에서 예정된 기념식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대한제국은 망했고 건물은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가 2023년에야 비로소 복원했다고 한다.
고종은 황제와 제국의 권위를 위해서 석조전이라는 황궁을 지었으나 궁에서 살아보지도 못했다고 하니 이 두 건물들은 모두 주인을 잘못 만나 비운의 건물이 된 것이다. 새로 복원된 옛 돈덕정과 석조전을 보며 가슴 아픈 우리의 근대사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
돈덕정에서 내려오다 오른편에 덕수궁 돌담길로 통하는 문이 있다. 평성문이라는 이 문을 나가면 길이 양쪽으로 갈라지는데 오른쪽은 오르막길로 나중에 새문안로와 만나고 왼쪽으로 내려가면 시립미술관(예전에는 대법원이 있었다)과 정동교회가 있는 사거리를 만난다. 우리 중에는 12년이나 이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서 초중고교에 다녔다는 친구도 있다.
덕수궁길의 오르막 고개에 이르니 왼쪽 아래로 넓은 공터가 있고 그 뒤로는 고층건물이 둘러서 있어서 예전의 풍경이 어땠는지 상상할 수도 없다. 다만 이 길에서 변하지 않고 남아서 기억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덕수궁의 돌담을 비롯해서 미국 대사관저의 돌담과 축대 그리고 백 년이 된 구세군 회관의 건물뿐이다. 그나마 기억할 것이 두세 가지라도 남아 있으니 반갑다!
구세군 회관 건너편에 우리가 다녔던 여고의 옛 교정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고 일대는 온통 공사장으로 변하여 가림벽으로 가려져 있다.
미대사관저의 돌담 왼쪽으로 고종의 길을 가리키는 이정표와 그 길로 들어서는 입구가 있다. 조선 말기에 고종 임금이 덕수궁을 나와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하던 길이어서 고종의 길이라고 부른 다. 이 길의 중간쯤에 올라가니 우리가 다니던 옛 교정의 빈 터가 내려다 보인다. 저만치 운동장이 있었고 수영장과 테니스 장이 여기 있었지 하며 제 각기 여기저기를 손으로 가리키며 옛날을 추억한다. 수영장이 있었다고 짐작되는 곳에 지금은 잔디가 덮여 있고 운동장 쪽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흔적으로 회화나무 고목 한 그루가 어수선한 공사장 한가운데서 외롭게 서 있다. 이 고목 아래서 우리들은 소녀 적 꿈을 키웠는데.. 우뚝하게 둘러선 고층 건물들 앞에서 회화나무는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다.
우리는 고향에 돌아왔으나 옛 선인들처럼 “산천은 의구하되..”라고 흥얼거릴 수 없게 되었다. 문화재 복원공사가 끝날 때까지 회화나무가 꿋꿋하게 잘 살아남아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곳은 원래 덕수궁에 속한 선원전이 있던 자리여서 지금 그 선원전 터를 발굴하고 다시 복원하기 위해 한참 공사가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공사장 옆에는 구 조선저축은행 사택이었다는 고건물이 아직도 남아 있으나 앞으로 철거될 예정이라고 한다.
잠시 상전벽해의 의미를 새삼 실감하며 고종의 길을 계속 올라가 본다. 얼마 가지 않아 돌담 사이에 작은 문이 나오고 이 문을 지나니 오른편으로 높은 곳에 하얀 탑이 하나 보인다. 옛날 러시아 공사관 터라고 한다. 이곳은 지금 정동 공원이 되어있고 높고 긴 계단 위 언덕 에는 이국적으로 생긴 탑 하나만이 우뚝 서서 하얗게 빛나고 있다. 구 러시아 공사관의 본채는 전쟁 때 없어지고 탑만 남아있는 것이라고 한다.
고종의 길은 정동공원에서 끝나므로 우리는 가던 길을 되돌아 다시 덕수궁 쪽으로 간다.
좀 전에 보았던 구세군 회관 옆으로 난 덕수궁 돌담길은 (이 길도 고종의 길이다) 영국 대사관과 접해 있는 길인데 오래 동안 막혀 있다가 개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길은 덕수궁 내부를 통과해야 하는 길이기 때문에 덕수궁의 휴무일(월요일)에는 닫힌다. 오늘은 목요일이어서 길은 열려 있고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아주 많다. 길 입구 왼쪽에 오래되어 보이는 회화나무가 한 그루 서 있기에 멈춰서 보니 조선 초에 인수대비의 집무실이 있던 자리라고 적혀 있다. 선비나무라는 별명을 가진 회화나무는 옛 선비들이 좋아해서 궁궐 안에 많이 심었다고 하여 궁궐 안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덕수궁 내부를 통과하는 고종의 길이 끝나니 영국대사관 입구가 나오고 곧 성공회 성당 옆에 이른다. 유럽의 네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이 성당도 백 년이 넘는 근대 건축물로 서울에서는 보기 드문 이국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오늘은 우리의 어릴 적 추억의 장소를 찾다 보니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우리나라 근대화 시기의 역사적인 문화유산까지 탐방하게 되었다.
점심도 역사적인? 곳에서 먹어야지 했는데 우연히 그런 우동집을 발견했다. 전에도 가끔 와서 먹던 우동집인데 이 식당이 60년 전통을 가졌다는 사실은 오늘에서야 알았다.
지금의 젊은이들이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서 왕년에 이 길이 자신의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즐겨 찾던 데이트 코스였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 있을까?
오늘은 만보 조금 더 걸었다. 7.65km에 걸은 시간은 1시간 40분 정도이다.
2024년 10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