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오리지널 <먹보와 털보> (2021)
어쩌면 <먹보와 털보>는 그렇게 대한민국 예능의 역사를 뒤바꿨던 전무후무한 프로그램을 함께 만들고도 초라하게 떠나야만 했던 그의 분신에게 전하는 김태호 PD의 '선물'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먹보와 털보>는 여러 모로 내가 기억하는 '김태호' PD의 작품같지 않은 프로그램이었다. 오늘날엔 흔하디 흔한 시즌제 없이 매주 새 아이템을 내놓으며 한 프로그램을 10년 이상 연출한 유일무이한 지상파 예능 PD. 그렇게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자신의 작가주의적인 면모를 잃지 않으며 매주 에피소드마다 완벽한 기승전결을 가져가는 PD. 이전에도 이후에도 어디서도 볼 수 없던 촌철살인같은 화법의 위트가 넘치는 (궁서체) 자막들. 자신이 짜 놓은 완벽한 틀 아래서 출연자들에게 갖은 생고생(?)을 선사하며 그 안에서 웃음과 휴머니즘을 건져올리던 2010년대 모든 예능 PD 지망생들의 우상. 그 '김태호'PD가 예능 PD로서 아니, 언론인으로서 희노애락을 함께했던 MBC를 떠나 처음 대중들에게 내놓은 예능 프로그램 <먹보와 털보>의 릴리즈를 기다리며 난 오랜만에 새 '예능 프로그램'을 기다리는 벅찬 설렘을 느꼈다. 자신들을 먹여살리는 한 가지 포맷에 갇혀 그것을 세 개의 지상파 방송사가 재탕, 삼탕까지 우려먹는 일이 10년 이상 반복되고 있는 예능계의 구태의연한 모습에 환멸을 느꼈던 탓일 수도 있겠다.
내가 <먹보와 털보>가 '김태호'PD 답지 않은 작품이라고 느꼈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악평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와 반대로 <먹보와 털보>는 우리 예능계가 당연하게 답습해오던 구태의연한 불문율 안에서도 매주 신선하고 창의적인 특집들로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했던 김태호 PD가 그러한 갑갑한 틀에서 벗어나 '예능'이라는 범주 안에서 정말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세련되고, 멋진 것들을 보여주려는 새로운 '이정표'와도 같은 작품이라 여겼다. 지금까지 해오던 그답지 않은 작품이기에, 너무 좋았다.
그 답지 않은 작품에서도 한 가지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바로 그만의 '디테일함'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무한도전의 '무도리' 로고부터 매주 새로운 포맷을 진행할 때마다 함께 디테일하게 바뀌는 특집 로고들, 그리고 해를 거듭할수록 비주얼적으로 진화하는 '해골' 자막까지. 김태호 PD는 '디자인'의 중요성을 무엇보다 인지하는 연출자였다.
그리고 <먹보와 털보>는 그의 디테일한 디자인 감각을 체감할 수 있는 작품이다. 에피소드 중간중간 재치있게 등장하는 먹보와 털보의 '용', '사자' 캐릭터들, 기존 예능처럼 쓸데 없이 화면을 덧바르는 의미 없는 자막들은 모두 걷어내고 한 땀 한 땀 질감이 다르게 쓰고 디자인한 힙한 느낌의 자막들. 여행 장소가 바뀔 때마다 바뀌는 인트로 시퀀스. 아마 매주 새로운 에피소드를 만들어내야 하는 지상파 예능에서라면 시도조차 요원했던 것이었을 테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이런 '디테일함'이 김태호PD의 예능을 한 층 더 섹시하고, 세련되게 만든다. 역시 '장인'에게는 '만듦의 자유'를 쥐어주어야 한다. ('경주'에서 수학여행 컨셉으로 진행한 8화에서는 엔딩 크레딧에 제작진의 출신 고등학교를 함께 적어넣었다. 그저 괄호 사이에 학교 이름을 적어넣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고 찡하게 만드는 그의 디테일함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이번엔 다른 점들로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 보자면, <먹보와 털보>는 겉으로 볼 땐 김태호 PD가 그렇게 좋아하는 일정한 '틀'이 없다. 그저 먹보(정지훈)와 털보(노홍철)가 바이크를 타고 대한민국 방방 곡곡을 여행하며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내용이다. 좀 더 젊은 느낌으로 만들어진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를 보는 느낌이랄까.
그런 점에서 <먹보와 털보>는 '완벽한 틀 안에서 출연자들에게 다양한 미션을 부여하고, 그들에게 시련을 선사하며 웃음과 감동을 뽑아내는' 기존 김태호 PD의 예능 철학에는 조금 벗어나 있다. 비디오는 대부분 바이크로 풍광이 아름다운 도로 위를 달리는 그림들이고, 오디오의 대부분은 이를 바라보는 두 남자의 감탄사와, 노홍철이 연신 감탄사처럼 외쳐대는 '넷플릭th' 뿐이다. 일반 예능에서 음식을 먹을 때 가장 중요한, 맛 표현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다.
<먹보와 털보>에서 김태호 PD는 지극히 관찰자적인 입장에서만 움직인다. 지금까지 거의 '준출연자'의 느낌으로 연출자가 프로그램에 많이 개입하는 방식을 고수해 왔던 그는 이젠 그저 여행 장소만 정해줄 뿐, 모든 것을 오롯이 노홍철과 정지훈에게 맡겼다. 그리고 정지훈은 동생이면서도 형같은 듬직함으로 여행을 이끌었고, 노홍철은 여행 내내 분위기 메이커를 담당했다. 그렇게 회를 거듭할수록 둘은 어울리지 않는 듯 어울리는 오묘한 케미를 시청자들에게 선사했다. 무엇보다 둘은 자유롭고 싶은 순수한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이 바이크 여행에 어떤 사람들보다 잘 어울렸다.
<먹보와 털보>는 에피소드 하나하나는 이렇다 할 틀이 없이 자유롭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즌 전체가 완벽한 한 편의 드라마처럼 기승전결을 잘 갖추고 있다. 처음엔 사사건건 부딪히던 두 남자가 여행을 통해 점차 마음을 나누며 서로를 이해한다. 그렇게 투닥거림은 어느새 우정의 표현으로 바뀌어 간다. 점차 합이 맞아가는 둘의 하이파이브처럼. 이것이야말로 쉬지 않고 매주 에피소드 하나를 뽑아내기 바빴던 김태호PD가 궁극적으로 자신이 '예능'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창조하고 싶었던 하나의 '마스터피스'였을 것이다.
그 외에도 이상순과 이효리, 실리카겔의 김춘추 등이 참여한 경쾌하면서도 세련된 OST 등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들이 많지만, 무엇보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반가웠던 건 우리가 잠시동안 잊고 있었던 '털보' 노홍철의 모습이었다.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무한도전'에서 하차한 이후, 리얼 버라이어티보다는 교양적인 면이 많이 가미된 '쇼양' 프로그램들 위주로 출연했던 그의 예전 모습은 유튜브 '오분순삭'에서만 볼 수 있었다. '무한도전'의 모든 에피소드를 자신만의 전매특허인 '언변'과 특유의 긍정적이고 발랄한 분위기로 쥐고 흔들던 노홍철의 모습을 <먹보와 털보>를 통해 오랜만에 다시 볼 수 있었다. 정말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그만의 철학이 제대로 묻어나는 노홍철의 패션 센스와, 여행 내내 들고다니는 모든 소지품과 바이크에 넷플릭스 로고를 붙여넣는 '돌+아이'적인 면모도 예전 그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전보다 마음대로 뛰어 놀 수 있는 '자유' 속에서 노홍철은 전보다 더 즐거워 보였고, 편안해 보였으며, 자유로워 보였다. (야무지게 일은 잘하지만 어수룩하고 순진한 정지훈을 세치 혀로써 지배하는 그의 모습 역시 '사기꾼'은 죽지 않음을 보여줬다.)
<먹보와 털보>를 보면서 어쩌면 유재석이 김태호의 '리더'와도 같은 사람이라면, 노홍철은 그의 '페르소나'같은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태호 PD가 유재석을 직업인으로서, 인간으로서 존경하는 느낌이라면, 그에게 노홍철은 그가 프로그램을 통해 표현하고 싶은 것들을 자유롭게 표현해주는, 마치 프로그램 안의 '나'의 분신처럼 느껴진다. 유재석이 <무한도전>을 이끌었던 사람이라면, 노홍철은 <무한도전>을 만든 사람이다. 그 유명한 무한도전의 인트로 동작이 그에게서 탄생했고. 그가 버릇처럼 내뱉던 '좋아, 가는거야!'와 같은 말들은 프로그램의 철학을 만들었다. 물론 그의 실수이자 그의 잘못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지만, 어쩌면 <먹보와 털보>는 그렇게 대한민국 예능의 역사를 뒤바꿨던 전무후무한 프로그램을 함께 만들고도 초라하게 떠나야만 했던 그의 분신에게 전하는 김태호 PD의 '선물'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p.s <먹보와 털보>의 시즌 2를 고대하며, 꼭 1화는 '홍철 헤이스팅스'와 리드 헤이스팅스의 눈물겨운 부자 상봉(?) 장면으로 제대로 때려주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