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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주원 Mar 16. 2018

'법'과 '국민 정서'로 비벼낸 맛있는 비빔밥

MBC <국민정서를 녹여라! 판결의 온도>


 <스트레이트>나 <PD수첩>에서 다루는 국민들을 공분하게 만드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에 비하면 <판결의 온도>가 다루는 사건들은 그보다는 조금 가벼운 사건들이다. 하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2,400원 가지고도 횡령죄로 해고되는 버스 기사와 달리 이 사람보다 상상을 초월할만큼 큰 죄를 짓고도 툭하면 구속 영장이 기각되고 툭하면 2심에서 집행 유예를 받거나 특별 사면되어 풀려나는, 스스로 법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충분히 떠올릴 수 있다. <판결의 온도>가 다루는 사례들과, 그 사례들을 재료로 다뤄지는 이야기들은 단순히 이 사건 자체를 이야기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그런 어이없는 판결을 내리는 사법부에 좀 더 신중하고 엄정한 판단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15일, MBC에서는 <국민정서를 녹여라! 판결의 온도>라는 제목의 교양 파일럿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지금까지 우리 사법부가 행한 재판에서 나온 판결들 중 사람들의 일반적인 상식, 즉 '국민 정서'로 납득하기 힘든 케이스를 선정하여 그 배경과 법리를 논쟁하는 토크쇼를 표방했다.


 <예능 예찬>이라는 제목을 달고 교양 프로그램을 이야기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하지만 요즘은 워낙 장르의 구분이 모호해진 시대니까, 요즘 교양 프로그램들은 예능이라는 양념을 더한 '쇼양'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는 시대니까, 사실 예능적인 요소를 담고 있는 프로그램이라면 한 번쯤 다뤄볼 가치가 있는 것 같다.


 사실 그 이전에 내가 이 프로그램을 다뤄보고 싶었던 이유는, 꼭 글로써 다뤄보고 싶을 정도로 프로그램이 좋았기 때문이다. <판결의 온도>는 '법률'을 다루는 교양 프로그램이다. 이전에도 방송에서 법률을 다룬 프로그램들은 종종 있었다. 대표적으로 SBS에서 방영했던 <솔로몬의 선택>이나, TV조선에서 방영했던 <TV로펌 법대법>이 있다. 하지만 <판결의 온도>는 앞의 두 프로그램과 그 소재를 다루는 지점이 매우 달랐다.


 <솔로몬의 선택>은 굉장히 일반적이지 않은 사례를 가지고 패널들이 웃음을 더한 다양한 추론을 내놓고, 역시나 다양한 개성을 지닌 변호인들이 각자가 생각하는 의견을 내놓으며 답을 듣는 방식이었다. <TV로펌 법대법>은 각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변호사들이 일상생활 전반에서 나올 수 있는 법률문제를 상담해주는, 단순한 '법률 정보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니 법조인들에 비해 법에 대한 지식이 턱없이 부족한 일반인들에게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하시면 좋아요.'라고 법조인들이 꿀팁을 알려주는 식이었다.

 

 하지만 <판결의 온도>는 그 시작 지점부터가 달랐다. 사법부가 내리는 판결과, 일반 국민들이 생각하는 판결에 괴리가 심하다고 말하며, 이를 '국민 정서'라는 말을 빌려 의문을 제기해 처음부터 법과, 사법부에 대립각을 세웠다. 사람들에게 법을 '가르치려고' 했던 앞의 프로그램들과 근본적으로 큰 차이를 뒀다.


 특히, '섭외' 부분에 있어 좋은 점과 나쁜 점이 뚜렷해 보였다. 사실 '법'에 대립각을 세우는 프로그램을 만들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 프로그램이 탄핵 정국 이후에 등장했다는 사실도 이를 반증하고 있다. 여차 하면 프로그램이 '국민 정서'로는 그 판결이 전혀 납득할 수 없는 것이라며 사법부를 성토하는 그림이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

 그래서 <판결의 온도>는 패널을 섭외함에 있어 그 '균형'을 맞추고자 했다. 사법부의 입장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전직 판사 신중권 변호사는 프로그램에서 사법부의 입장을 대변했다. 사건을 해석함에 있어 더욱더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는, 그래서 너무 외로운 판사의 입장을 이야기하면서 자칫 한쪽으로 분위기가 쏠릴 수 있는 프로그램에 균형을 맞췄다. 자극적인 언론 보도를 통해 판결을 접할 때는 상식적으로 볼 때 이상한 판결을 내렸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을, 신중권 변호사가 쉽게 풀어 설명해주는 법리적 해석을 통해 '국민 정서'와 별개로 시청자들이 그 판결을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게 했다.

 섭외 부분에 있어서의 백미는 '국민 정서'를 이야기하는 판결 저격수에도 전직 판사인 이정렬 변호사를 배치했다는 것이다. 제작진이 섭외에 많은 공을 들였다는 것이 명백해 보였다.

 사법부의 입장에 선 사람이 '법리가 이러저러하다'라고 말하는 그림은 자칫, '무지한 너희들은 이렇게 법에 대해서 모르니까'라는 식으로 보일 수 있었다. 패널들이 아무리 다양한 대화를 쏟아내도 '법은 이렇습니다'라고 말해버리고, '아... 그렇군요.'로 끝난다면 이것은 '논쟁'이 아닌 '배움'으로 끝날 수 있었다. 하지만 법조인으로서 국민 정서의 편에서 말하는 이정렬 변호사는 사법부의 입장도, 일반 시민으로서의 입장도 모두 대변할 수 있는 패널이었다. 사법부의 입장을 견제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 입장을 이해하기도 하는 이정렬 변호사의 모습은 프로그램에서 논쟁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는 역할을 했고, 자칫 사법부와 국민 정서 사이의 온도차만 확인하고 말싸움만 된 채 끝날 수 있는 프로그램의 질감을 좀 더 유연하게 만들어 줬다. 이를 통해 <판결의 온도>는 판사들의 입장에선 우리의 판결에 대해 국민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좀 더 신선하게 느낄 수 있고, 일반인 입장에선 이런 사건을 판결하는 판사들의 고민이 어떤 것인지를 느끼게 할 수 있는, 말 그대로 판결에 국민 정서를 녹이는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쉬움도 있었다. '섭외' 부분에 있어서 <판결의 온도>에는 '여성 패널'이 없었다. '미투 운동'이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시점에, 여성 변호사가 패널로 참여할 수 있었다면 그 존재만으로도 더 균형 잡힌 프로그램이 될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앞으로 정규 프로그램이 된다면 언제든 개선할 수 있는 지점이다.

 

 또한 프로그램이 너무 빠른 호흡을 가져가다 보니, 시청하면서 시청자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했던 것도 아쉬웠다. 앞으로 정규로 편성된다면 패널들의 토크와 함께 시청자가 전하는 좀 더 날것의 의견도 다뤄 중간중간 지점을 마련한다면, 시청자의 지적 유희를 더 충족시킬 수 있는 풍성한 프로그램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아직까지 파일럿이 1회 방영되었기에 이 프로그램의 미래를 내다보는 것은 조금 성급하다. 하지만 내 생각에 <판결의 온도>는 충분히 정규 편성까지 생각해 볼 만한 프로그램이다. 국민들이 품는 사법부의 판결에 대한 의문은 예전부터 공공연한 것이었지만, 방송에서 다루기에 너무 까다로운 주제였다. <판결의 온도>는 그런 예민한 소재를 '예능'과 '웃음'이라는 훌륭한 윤활유를 사용해 사법부를 자극하거나, 보는 시청자들을 실망시키지 않고 효과적으로 풀어냈다. '웃음'은 분명히 어떤 까다롭고 뻣뻣한 아이템도 부드럽게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정치나 법과 같은, 지금까지 다루기 힘들었던 주제들이 '교양'과 함께 '예능'을 만나야 하는 이유이며, 궁극적으로는 권위주의와 계층 갈등과 같은 사회의 괴리를 타파하고, 말뿐이 아닌 진정한 화합의 민주주의로 가기 위해 방송이 해야 하는 역할일 테다.


 그런 의미에서 <판결의 온도>는 다시 시청자의 품으로 다가서려 하는 MBC의 마음가짐을 이 프로그램이 가장 잘 보여주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트레이트>나 <PD수첩>에서 다루는 국민들을 공분하게 만드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에 비하면 <판결의 온도>가 다루는 사건들은 그보다는 조금 가벼운 사건들이다. 하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2,400원 가지고도 횡령죄로 해고되는 버스 기사와 달리 이 사람보다 상상을 초월할만큼 큰 죄를 짓고도 툭하면 구속 영장이 기각되고 툭하면 2심에서 집행 유예를 받거나 특별 사면되어 풀려나는, 스스로 법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충분히 떠올릴 수 있다. <판결의 온도>가 다루는 사례들과, 그 사례들을 재료로 다뤄지는 이야기들은 단순히 이 사건 자체를 이야기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그런 어이없는 판결에게, 좀 더 신중하고 엄정한 판단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프로그램이 밋밋하지 않게 훌륭한 퀄리티로 방송되었다는 것은 다시 좋은 친구가 되고자 시청자에게 손을 내미는 MBC에게 분명한 호재이며, 그런 면에서 <판결의 온도>는 지금 MBC에 무엇보다 필요한 프로그램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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