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그덕 히어로즈 1회>
종편과 케이블이 자리를 잡기 전, 그 땐 볼만한 채널이라곤 6번, 7번, 11번밖에 없었다. 그 시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채널은 11번, MBC였다. 내 기억 속의 MBC는 방송국들 중 가장 세련된 예능 프로그램을 만드는 방송국이었다. 물론 <무한도전>의 영향이 가장 컸다. 그 당시 시쳇말로, '대한민국 예능의 역사는 무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그 당시 대부분의 예능이 소위 단물 빨아먹기(?)식으로 큰 틀을 잡아놓고 조금씩 포맷을 땜질하거나, 게스트에 의존하는 식으로 한 주 한 주 프로그램을 꾸려갈 때, '젊은 혁명가' 김태호 PD의 <무한도전>은 게스트에 의존하지 않고 멤버를 고정했고, '특집'이라는 말로 매주 새로운 아이디어로 만든 새로운 포맷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변화무쌍한 새로운 시도를 매주 하는 모습은 최초로 인터넷 방송을 예능에 접목시킨 <마리텔>같은 프로그램의 초석이 되었을 테다.
그저 상황 설명이나 받아쓰기에 불과했던 자막은 <무한도전>에서 '해골'과 같은 특색있는 CG와 결합하며 재치있게 특정 상황의 재미와 웃음을 살려 내는 훌륭한 양념이 되었다. 이런 '자막'의 특징은 이후 <라디오 스타>와 <무릎팍 도사>에서 발전했다. <무릎팍 도사>에선 이야기가 산으로 갈 때, 실제 에베레스트 산 장면을 썼고, <라디오 스타>는 한 방 먹은 게스트의 머리 위에 CG로 돌을 떨어뜨렸다.
그렇게 자막이 계속 발전해서 지금은 적절한 비유로 상황을 묘사한 다음, 그것을 뒷받침하는 영상을 함께 버무리는 게 MBC식 '위트가 담긴' 예능 자막이다. 가령 어떤 게임이 청도 소싸움을 연상시킨다면, 자막과 함께 실제 소싸움 영상을 삽입해 웃음을 배가하는 방식이다. 지금의 모든 MBC 예능이 이 기믹을 사용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상황에서 효과를 발휘한다. 이는 MBC 예능을 상징하는 하나의 '아이덴티티'로 자리매김했다. 이것이 나와, 우리가 기억하는 MBC 예능의 전성기다.
아무래도 잡설이 너무 길었던 듯 하다. 이런 말을 장황히 늘어놓은 이유는, 안타까움 때문이다. 한때 '예능왕국'으로 군림했던 MBC의 지금은 안타깝기 그지 없기에. 그런 상황 속에서 파일럿 예능인 <삐그덕 히어로즈>가 월요일 첫 전파를 탔다.
<삐그덕 히어로즈>는 전형적인 게임 쇼의 포맷을 취한다. 조금 유치하게도 어벤져스의 '실드' 컨셉을 차용했다. 게임을 통해 나약하고 평범한 출연자들에게서 영웅적 기질을 발견하겠다는 것이 프로그램의 기획 의도다. 하지만 전혀 새로운 것이 없었다. 처음 출연진이 소집되고 이들을 골탕먹이기 위해 함정을 준비하는 것도, 파워와 스피드 훈련을 빙자한 슬랩스틱 쇼를 하는 것도 <무한도전>과 무한도전 초창기의 <무모한 도전>이 했던 것들과 다를 게 없었다. 호두 깨기도, 먹물 묻히기같은 언젠가 본 듯한 식상한 게임들의 연속이었다. 사실 '영웅'이라는 컨셉도, 과거 무한도전에서 했던 <지구특공대> 특집과 내용 면에서 거의 비슷했다. '파워' 분야에서 1등을 한 샘 해밍턴에게 황금 수트를 하사하며, 과거 <무리한 도전>에서 에이스에게 황금 쫄쫄이를 입히던 것까지 그대로 차용했다. 함께 저녁을 먹고 잠자리 게임을 하는 장면은 <동거동락>이나 <1박 2일>이 보였다. 게임 쇼에서 가장 중요한 '게임'에 대해 큰 고민을 한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이런 프로그램이 무조건 실패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건 굉장히 고통스러운 창작의 과정이다. 과거의 프로그램에서 좋은 것들을 차용하는 것을 분명 나쁘게만 볼 수 없다. 어차피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어떤 사람이 어떻게 프로그램을 끌고 가느냐에 따라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웃음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특히 요즘 예능은 시청자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PD의 촘촘한 기획만으로는 80%정도 밖에 채울 수 없다. 오히려 기획에서 가능성을 많이 열어둬야 한다. 그리고 나머지 20%는 프로그램의 성격에 맞는 적절한 출연자를 잘 섭외하여 기획 단계에서는 예상할 수 없는, 생각지도 못한 출연자들의 예능적 역량과 케미를 기대해야만 한다. 게임 쇼에서는 출연자들이 재미나고 맛깔나게 게임을 살려야 한다. 그것을 잘한 프로그램이 tvN의 <신서유기>다. 게임 자체가 엄청나게 신선하고 신박하지는 않아도 신서유기 멤버들만이 만들어내는 특유의 케미는 시청자에게 빅재미를 선사했다.
<삐그덕 히어로즈>의 출연진들은 어떤가. 출연진들은 프로그램이 의도하는 바에 부합하는 사람들이었다. 첫 방송에서 끈끈한 케미를 기대하기 힘듦에도 멤버들의 합은 나쁘지 않았다. 특히 홍진경, 안정환, 유병재, 샘해밍턴과 같은 예능인들은 중간중간 그들 개인의 역량에서 웃음을 뽑아냈다. 우현을 통해 MBC에서 6월 민주 항쟁의 스토리가 나오는 것은 감개무량했지만, 우현을 비롯한 나머지 멤버는, 나쁘지는 않았지만 프로그램에 완벽히 녹아든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고정 멤버보다는 게스트 같다는 느낌이 강했다.
물론 우현이나 허정민, 자이언티, 세븐틴의 호시는 배우이고, 가수이기에 예능인들만큼 효과적으로 프로그램에 몰입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므로 그런 출연진들의 특징을 파악해 캐릭터를 부여하고, 프로그램과 팀 전체를 함께 이끌어나갈 '리더'가 필요하다. 그것을 <무한도전>에서는 유재석이, <신서유기>에서는 나영석 PD와 강호동이 맡았다. 아마 홍진경이 그런 역할을 해줬어야 할 듯 하다. 홍진경 개인으로선 프로그램에서 나름의 역할을 다했다. 호리호리한 몸에서 나오는 몸개그와, 특유의 백치미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아직까지 프로그램 전체를 이끌어나갈 '리더로서의' 역량은 부족했다. 그게 힘들어 떼를 쓰는 과정에서 안정환과 또 다른 웃음을 만들어내기도 했지만, 프로그램을 진행함에 있어서는 조금 답답해 보였다.
아직 2회가 남아 있기에 섣부르게 실패했다고 판단하긴 이르다. 2회에서 출연진들이 더 나아진 케미를 보여준다면 훨씬 큰 가능성을 기대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포맷을 만듦에 있어, 조금 더 세련되어지기 위한 고민은 필요해 보인다. 과거 <무한도전>을 위시한 MBC 예능이 전성기를 맞이했던 그 때와 지금은 많은 것이 달라졌다. 물론 <라디오 스타>나 <무한도전>나, <나혼자 산다>같은 프로그램들이 아직 건재하지만 빠르게 변하는 세상만큼 예능 트렌드도 계속해서 바뀐다. 그리고 이를 tvN과 JTBC같은 방송사들이 따라가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는 와중에, MBC의 예능은 그저 영광스러웠던 그 때에 머무르며 기획에서 나오는 프로그램의 포맷은 점점 낡아가고 있다. 사람을 아무리 잘 써도, 포맷이 낡으면 빛이 바랜다. 계속해서 새로운 것들을 시도하던 과거의 MBC의 모습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