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새로운 글을 쓰기 위해 브런치에 매거진을 만들며 '예능 예찬'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내가 쓰는 영화 리뷰 매거진인 '정호진의 영화 예찬'과 구색을 맞추기 위해 붙인 제목이었다. 하지만 계속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내가 예능을 '예찬'하기 위해 이 글을 쓰려는 것일까.
예능 PD를 준비하겠다고, 사회가 속칭 '언론고시'라 부르는 이 고된 길을 걸어야겠다고 결심한 3년 전부터 '예능'은 내게 이미 남들과는 다른 것이었다. 가족들이, 혹은 친구들이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웃고 있을 때, 언젠가부터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웃음기가 사라지고 긴장이 바짝 들었다. 만약 그 프로그램이 잘 빠진(?) '웰 메이드' 프로그램이었다면 그 이유를 찾기 위해서, 재미없는 프로그램이라면 왜 재미없는지 그 이유를 찾아야 했다. 더 이상 가족들이, 친구들이 그런 것처럼 '심심풀이'로 TV를 볼 수 없었다. 좋아하는 것이 일이 된다면 너무 즐거울 줄 알았는데. 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으면서 내 삶 전체가 즐거운 기운으로 물들기를 바랐는데. 오히려 난 내가 좋아하는 한 가지 '취미'를 잃고 말았던 것이다.
처음 PD가 되고 싶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품어왔던 생각인데, '예능'은 정말 불안한 장르다. 일단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예능 프로그램이라고 하는 것의 본질은, '리얼'을 추구하는 프레임과 스토리를 통해 시청자에게 '웃음'을 전달하는 것이다. '리얼'과 '웃음'. 이 중 하나라도 어그러지면 '예능'의 필요성은 증발해 버리고 만다. '리얼'하지 않다면 차라리 드라마를 보는 것이 낫고, '웃음'이 없다면 시사교양 프로그램을 보는 것이 나을 테니까. 예능은 '리얼함'과 '웃음'을 담보하고 있다고만 한다면 드라마와도, 시사교양과도 쉽게 융합할 수 있는 변화무쌍한 매력을 지녔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예능'이라는 장르 자체를 불안한 장르로 만든다.
그것이 왜 '예능'을 불안한 장르라고 말하는 이유냐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은 '리얼함'과 '웃음'을 함께 보여준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어렵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코미디 프로그램'의 몰락에서 그 점을 읽을 수 있다. 한 때 전성기를 구가했던 '개그 콘서트'를 대표로 하는 '콩트' 위주의 코미디 프로그램들이 맥을 못 추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의 웃음은 철저히 '장치' 속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과거 코미디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던 시절에는 그런 '장치'들이 신선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런 '장치'들은 '예상 가능한 웃음'으로, 결국은 '노잼'으로 변모했고, 사람들은 더 이상 그런 것에 웃음과 시간을 투자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리얼'을 무기로 자유롭게 흘러가는 이야기 속에서 예상치 못한 웃음을 자아내는 '예능 프로그램'이 새롭게 군림할 수 있었던 큰 이유일 테다.
웃음이 참으로 역설적인 이유는 그것이 '예상할 수 없을 때' 등장해야만 가장 거대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분명히 말했다. '예상할 수 없을 때'. 한정된 시간과 비용으로 그 예상할 수 없는 순간을 찾아내야 한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예상할 수 없으니까. 조금이라도 예상하며 만들어나가는 순간 그것은 의도된 것이 되어버리니까.
조금이라도 그것이 예상 가능한, 속된 말로 '뻔한' 상황 속에서 벌어졌을 때, 다시 말해 제작진이 의도한 상황이라는 것이 드러날 때 시청자들의 반응은 빠르게 차가워진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예능 제작진의 시간과 비용은 한정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피치 못하게 최소한의 흐름을 이어가기 위한 대본이 필요하고, 의도된 상황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용인되는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매우 애매하다. 하지만 대개 그것은 용인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트렌드가 바뀌며 예능 프로그램들은 그 딜레마를 나름의 전략을 가지고 해결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한 가지 포맷을 가지고 오래도록 끌고 가는, '단물 빨아먹기'식 예능은 절대 성공할 수 없다. 오히려 사회적인 이슈가 발생하고, 트렌드가 바뀔 때마다 가장 예민하게, 능동적으로 반응하고, 변화하는, 또 그래야만 하는 장르가 '예능'이다. 그렇게 한 예능 프로그램만이 요즈음의 살벌한 방송 정글에서 살아남는다.
난 이 '예능 예찬' 매거진을 통해, 그러한 예능 프로그램들의 성공과 과오를 분석하고, 복기할 것이다. 아마 '비판적 시각'을 유지하기 위해 공을 칭찬하기보다는, 과를 비판하는 글이 더 많을 것이라 예상한다. 하지만 공을 칭찬하는 것도, 과를 비판하는 것도 모두 예능에게는 '예찬'이리라. 예능이 불안한 장르인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매 순간 개척해나가야만 하는 장르라는 것이다. 성패에 관계없이 예능은 계속해서 새로운 이슈와, 새로운 트렌드를 개척해 나가야만 한다. 성공한 프로그램도, 실패한 프로그램도 결국은 예능 프로그램이 진일보해 나가는 과정이다. 수많은 프로그램들이 태어나고 스러져가는 과정 속에서 배워야 할 것들을 머리로, 몸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 변화의 물결에 스스로 몸을 내맡겨야 한다. 그것이 예능 PD가 되어 가는 과정일 테다.
물론 그 과정에서 나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TV'라는 취미를 잃을 것이다. 더 이상 '편안함'을 얻기 위해 TV를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난 억울해하지는 않는다. 찰리 채플린이 말하지 않았는가. 인생은 가까이서 볼 때는 비극이지만 멀리서 볼 때는 희극이라고. 예능 PD가 되기 위해,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는 예능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그 자체가 그 순간순간은 내게 고되고 힘들겠지만, 먼 미래의 언젠가 내 삶을 뒤돌아볼 때 그것은 희극이 되어줄 것이라고 믿는다. 이 '예능 예찬' 매거진을 쓰기 시작하며, 난 다시 이런 생각을 통해 내 마음을 다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