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회 스웨덴영화제 청년앰버서더 - vo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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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보면 어린 지영과 은영이 세계지도를 보며 가고 싶은 나라에 스티커를 붙이는 장면이 나온다. 아무런 고민 없이 '미국'을 선택하는 지영과 달리, 은영은 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속한 세 나라에 스티커를 붙인다. 그리고 그중 은영이 처음 선택한 나라는 '스웨덴'이었다. 왜 이렇게 모르는 나라에 가려고 하냐는 지영의 말에 은영은 거긴 한국사람이 없지 않으냐고 말하며 몰라도 된다고 얼버무린다.
영화 속 똑똑하고 당차며 야무진 은영이 그런 선택을 했던 이유를 가만히 유추해 보면, 아마도 그곳이 '성숙'한 사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합리적이지 않은 이유에 기댄 세상의 다양한 차별적 시선을 어려서부터 느끼며 살아온 은영. 그 어린아이의 눈에도 오랜 기간 동안 모든 사람의 인간적인 삶과 자유, 평등을 보장하는 사회 모델을 발전시켜 온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사회는 하나의 '이상향'과도 같았을 것이다.
내게도 '스웨덴'은 세계 속 수많은 선진국들과 조금은 다른 결로 느껴지는 나라였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스웨덴'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은 아마도 '복지 국가'일 것이다. 탄탄한 세금 제도를 바탕으로 모든 개인들이 같은 자유와 평등을 보장받는 것을 가장 큰 철학으로 삼는 나라. '라곰'이라는 말처럼 타인을 넘어서는 '화려함'보다는 '적당함'과 '온건함'을 지향하며, 소박하고 담백해 보이지만 그 안에서 무엇보다 만족스러운 '행복'을 건져 올리는 사람들의 나라. 그런 '스웨덴'의 존재는 모든 사람들이 남보다 더 부유하고, 풍족해지기만을 원하는 철저한 경쟁 사회가 즐비한 현대 자본주의 세계의 모습과는 달랐다. 자본과 산업의 발전이 가져다준 이 파티가 절대 영원할 수 없음을, 심지어 그 끝을 달려가고 있음이 가시화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좀 더 '지속 가능한' 삶이란 무엇인지를 꾸준히 세상에 알려온 하나의 성숙한 '현자'와도 같았다.
그런 '성숙'한 세상 속 사람들의 시선이 담긴 영화들을 즐길 수 있는 '스웨덴 영화제'가 우리나라에서 어느덧 11번째 돌을 맞았다. 제 11회 스웨덴 영화제 프로그램북의 인트로의 제목에는 이번 영화제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영화를 통해 연대의 가치와 서로의 안부를 묻다'
'나의 일상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당신의 안녕'이 절실하다며, 지속 가능한 일상을 위해 우리는 더욱 진솔하고 치열하게 연결과 연대의 의미와 가치를 물어야만 한다는 인트로의 글에서 이 영화제가 지향하는 바가 깊이 와닿았다. 사람으로 사는 진정한 행복은 '물질적' 풍요가 아닌, '사색적' 풍요에서 온다고 생각하는 내 인생철학에 가장 가닿아 있는 말처럼 느껴졌다. 인간은 자신만의 '사색'을 다른 개체와 나눌 수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생물이다. 다른 이들과 함께 사색하고, 그 생각들을 서로 나눌 때 그 세상은 더 행복해지고, 더 올바른 방향으로 발전한다.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는 사회는 타인을 경쟁해야만 하는 '적'으로 여기지만, '사색적 풍요'를 추구하는 사회는 타인을 함께 살아가야 하는 '구성원'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스웨덴 영화는 그런 '사색적' 유희를 충족하기 가장 좋은 소재 중 하나다. 북구인들만의 이성적이고 냉철한 시선과 역설적이게도 그 차가움 속에 담겨있는 따뜻한 감성 또한 느낄 수 있는, 생각할 만한 포인트들을 남기는 영화들이 많다. 내가 본 스웨덴 영화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보리vs매켄로'였는데, 누군가는 반드시 승리하지만 또한 누군가는 반드시 패배해야만 하는 스포츠의 세계 속 두 테니스 선수의 삶을 조명하며 누구보다 강인해 보이지만 또한 잔인한 승부 앞에서 누구보다 연약할 수밖에 없는 그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견지한 한 편의 웰메이드 스포츠 영화였다. (정확히 말하면 '보리vs매켄로'는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가 함께 만든 영화이기는 하지만 대본을 쓴 론니 산달 감독이 스웨덴 사람이므로 스웨덴 영화로 생각하고 소개하였다. 론니 산달 감독은 이번 스웨덴 영화제의 개막작이기도 한 '타이거즈'의 감독이기도 하다.) 또한 영화 '렛미인'에서는 인간 소년과 우정과 사랑을 나누게 된 소녀 뱀파이어의 이야기를 통해 '악한 괴물'과 같은 클리셰로서만 다뤄지던 뱀파이어를 새로운 차원의 '잔혹 동화'로 풀어내며 보는 이에게 생각할 만한 포인트를 많이 남기기도 했다. 이번 스웨덴 영화제에서도 영화를 통한 사색을 즐기는 '성숙한' 사람들을 위한 3편의 극영화와 4편의 다큐멘터리가 관객들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번 영화제에서 프리다 켐프 감독의 2021년 작품인 영화 '노크'가 가장 기대된다.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한 여자가 새 아파트에서 남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노크 소리를 들으며 자신에 대한 믿음조차 의심하기 시작하는 이야기라고 소개된 심리 스릴러 영화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도 가장 큰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가스 라이팅' 효과를 쉽게 떠올리게 하는 시놉시스인데, '가스 라이팅'으로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은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내게는 너무 감사하게도 '제11회 스웨덴영화제'의 청년 앰버서더로 참여할 수 있게 되어 더욱 뜻깊은 영화제가 되었다. 스웨덴 영화제 청년 앰버서더로 참여한 사람은 '웰컴 키트'를 받을 수 있었는데, 스웨덴을 상징하는 노란색을 메인 컬러로 깔끔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스웨덴에 설명하고 있는 다양한 책자들이 담긴 노란색 파일이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스웨덴이 자원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담은 'Re:waste'라는 책자였다.
현재의 생산 및 소비 패턴은 대부분 선형적 시스템에 기반해 있다.
자원을 채굴하여 가공하고 사용한 뒤 쓰레기로 폐기한다.
이는 지속 가능하지 못하기 때문에, 현재의 시스템을 순환 경제로 전환해야 한다.
참으로 공감할 수밖에 없는 생각이었다. 편하게 사고 편하게 버리는 세상보다는, 각자가 조금의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덜 소비하고 덜 버리면서 좀 더 건강하게 지속 가능한 상태를 오래 유지하고자 하는 스웨덴 사람들의 성숙한 철학이 잘 느껴졌다. 그 외에 깔끔하게 디자인된 스티커, 티셔츠와 그립톡, 노트와 포스트잇 등 실용적인 제품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생각과 의견을 모으고, 합의를 거치는 과정보다는 오로지 결과만을 지향하며 '빨리빨리'가 하나의 미덕으로 통하는 대한민국 사회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스웨덴 사회가 보여주는 과정 지향적인 사회적 합의와 그 철학에서 건강한 사회의 모습을 향한 어떤 자극을 느끼게 되는 듯하다. 모쪼록 이번 스웨덴 영화제를 통해 성숙한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본 다양한 담긴 영화들을 접하며 나 스스로도 이를 통해 '사색적' 유희를 향한 갈증을 채우고, 생각의 시야를 좀 더 넓힐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