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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주원 Mar 24. 2022

모두가 '괜찮은' 세상의 민낯

영화 <우아한 거짓말>


형) 우아하다; 고상하고 기품 있으며 아름답다. 


 '우아하다'라는 단어는 그 뜻마저도 수많은 미사여구로 가득하다. 말 그대로 '고상'하고, '기품'있고, 아름다운 단어다. 그리고 영화 <우아한 거짓말>은 그런 '우아함'을 '거짓말'이라는 단어와 연결 짓는다. 누군가를 속이고 기만하는 '거짓말'에 과연 '우아하다'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것일까. 


 그런 고민을 하게 된 건 아마도 영화를 보기 전, 제목을 보고 이 영화가 '상황'이라는 무적의 단어에 기대어 '거짓말'을 하는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를 느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흔히 이야기하는 '착한 거짓말'이라는 어구처럼 이 영화도 '사정이 있었다', '이유가 있었다'는 말 뒤에 숨어 누군가를 속이며 살아가는 '거짓말쟁이'들을 위한 헌사이자, 어쭙잖은 자기 위로로 끝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말이다. 


 결과적으로 그런 걱정은 영화를 보고 나서 기우(杞憂)였음이 쉽게 드러났다. 영화 <우아한 거짓말>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휘두른 '거짓말'이라는 칼의 끝은 결국 '자신'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영화의 메시지에 맞게 제목을 더욱 엄밀하게 고쳐보자면, 이 영화의 제목은 <우아한 거짓말>보다는 <우아하기 위한 거짓말>이 되어야 더 맞지 않을까 싶다. 극 중에서 천지가 '자살'을, 화연이가 '가출'을 한 것도 결국 그들 스스로 마지막까지 '우아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고, 그 거짓말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택한 '마지막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영화가 말하는 '우아함'이란, '괜찮음'이다. 


  '괜찮다'는 건 무엇일까. '괜찮다'는 건 외부의 어떤 충격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춘기의 소녀 '천지'와 화연'에게는 '괜찮다'는 건, 또래 친구들의 따돌림과 놀림에도 자기는 그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의연하고 굳건하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은 괜찮지 않았다. 괜찮지 않음에도 괜찮다고 거짓말을 해야 했다. 친구들의 괴롭힘과 따돌림에 점차 상처가 깊어지고, 스스로가 무너져가는 순간에도 그들은 그 거짓말에 기대어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그들이 은신하고 있다고 생각한 그 거짓말이 거꾸로 그들을 더욱 옥죄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결국 버틸 수 없어진 그들은 결국 그 마지막 수단을 선택하고 말았다. '천지'와 화연'이 속이고 있었던 건 타인이 아닌, 그들 자신이었다. 그리고 스스로를 다독이기 위해 자신에게 했던 그 '거짓말'은 결국 스스로를 해치고야 말았다. 


 

 영화 속에서 그런 '거짓말'이 필요한 것은 비단 '천지'와 '화연'이 뿐만이 아니다. 만지와 천지의 엄마인 '현숙'은 팍팍하기만 한 현실 속에서도 자신의 두 자식들을 위로 삼아 어떻게든 스스로에게 '괜찮다'는 말을 되뇌며 사는 사람이다. '미란'과 '미라' 자매도 자식들은 돌보지도 않은 채 방탕한 생활을 하며 돌아다니는 아빠 '만호'로 인한 불우한 가정환경 속에서도 서로를 바라보며 '괜찮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미라'는 스스로를 향한 우아한 거짓말을 지키려다 '천지'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내기도 했다. 


  '거짓말'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만지'가 실타래 속 '천지'가 자신에게 남긴 편지를 발견하고 안심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영화 <우아한 거짓말>이 보는 이를 가장 먹먹하게 만드는 장면이다. 그전까지 '만지'는 동생 '천지'의 죽음을 마치 형사처럼 하나의 '사건'으로서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친구들이 따돌린다고, 괴롭힌다고 죽느냐며 동생을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를 비치기도 했다. '동생 죽고 쿨한 년이 쿨한 거냐'는 말을 하기도 했던 '만지'는 눈물을 흘리기 전까지 동생의 죽음 앞에서 '쿨한 태도'를 보였다. '천지'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에 최대한 감정을 섞지 않으며 스스로에게 '괜찮다'라고 거짓말을 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멋졌던 언니라며, 날 잊으면 안 된다고 적혀 있던 '천지'가 남긴 편지를 읽는 순간 '만지'는 무너져 내리고 만다. 거짓말 뒤에 숨어서 만지는 계속해서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힘들다고, 아프다고 말했던 동생의 구조 신호에도 차갑고 쿨한 말로 일관하며 동생의 아픔에 시종일관 무관심한 태도, 그런 자신의 그런 무관심함이 어쩌면 동생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자책. 편지를 읽은 순간 거짓말이라는 둑은 무너지고, 미안함과 안도감의 눈물은 둑을 넘어 콸콸 쏟아져내렸다. 


  이 영화가 내게 울림을 줬던 이유는, 아마 내 삶 속에도 그런 거짓말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일 테다. 나뿐만 아니라 이 사회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사회 속에서 우리는 '감정'을 표출하는 것을 지양한다. 감정을 표출하는 것은 미숙하고, 경솔한 행동이라 여긴다. 우리는 최대한 감정을 숨김으로써 사회에 잘 적응했다고, 난 '괜찮은' 사람이라는 신호를 외부에 보내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스스로 알고 있다, 그 누구도 '괜찮지' 않다는 것을. 사회생활을 하면서 상처받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게 크고 작은 상처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스스로에게 되뇐다. 괜찮다고. '우아한 거짓말'을 너무 잘 소화해서 상처가 된 일들을 쉽게 잊고, 치유하는 개인의 능력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단연코 상처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런 상처는 결국 곪게 되고, 종국에는 터지기 마련이다. 몇 년째 뉴스와 신문을 통해 듣고 있는 'OECD 자살률 1위 국가 대한민국'이라는 말은 아마도 우리가 스스로에게 하고 있는 '우아한 거짓말' 때문은 아닐까. 영화 속에서 추상박이 자신의 화상을 긴 머리로 가리듯, 왜 우리는 타인에게 심지어 가족에게도 상처를 가린 채 괜찮은 것들만 보여주려고 하는 것일까. 그에 대한 대답은 이미 영화 속에서 추상박이 한 바 있다. 


"원래 가족이 더 모르는 거야. 그래서 가족이야.
모르니까. 평생 끈끈할 수 있는 거지." 

 

  그렇다. 어쩌면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가족과도, 사회와도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일 수도 있겠다. 우리가 각자의 마음에 난 생채기를 모두 드러낸 채 산다면, 그 끔찍함에 누구와도 교류할 수 없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고 나니, 이 글을 '괜찮지 않을 땐 괜찮지 않다고 말하자'는 뻔한 결말로 마무리지을 수 없겠다는 생각에까지 가닿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아함'을 좇기 위해 자신의 삶의 대부분을 거짓말로 채워야만 하는 사회는 절대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 <우아한 거짓말>은 단순히 '학교폭력'과 '집단 따돌림'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그저 아름답기만 할 것 같은 10대 때부터도 '우아해야만' 하는, 이를 위해 힘겹게 스스로를 향한 '괜찮다'는 거짓말을 멈추지 않아야만 하는 우리 사회에 건네는 '위로'와도 같은 영화다.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일이라면, 위로의 말이라도 건넬 수 있어야 한다. 


  

 몸에 생긴 물리적인 상처가 아물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마음에 생긴 상처도 그렇다. 처음엔 죽을 것만 같던 일들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렇게 큰 일이었냐는 듯 작아 보이고 사소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마지막, 천지가 스스로에게 건넨 것처럼 보이는 도서관 책장 속 마지막 실타래가 전하는 메시지는 우리에게 큰 울림을 가져다준다. 평소에는 모르는 척하며 살지만, 우리는 분명히 안다. 모든 사람에겐 크던 작던 삶이 할퀴어놓은 상처가 있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서로 상처를 굳이 보여주지 않더라도 스스로에게 괜찮다는 말을 쉼 없이 건네고 있을 누군가에게, 괜찮냐는 작은 위로를 건넬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  


잘 지내고 있지?
지나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지?
     고마워, 잘 견뎌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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