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긴 쉼표라도 마침표는 아니다.
코로나19가 시작된지도 이제 벌써 반년이 넘어간다.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 코로나가 시작되었을 때 만해도 이 상황이 이렇게까지 장기간 지속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중국에서의 첫 번째 코로나 발발 이후, 곧바로 한국이 다음 차례를 맞았기 때문에 다른 국가들까지 퍼져갈지 생각하지 못했고 이것이 얼마만큼 유행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막연하게 이전에 유행했던 사스와 메르스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길어야 2, 3개월 정도? 그 이후론 다시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상황은 우리가 모두 아는 바와 같다.
올해 초, 어느 모 신문 기자가 ‘한국인이어서 미안하다’는 기사를 쓸 정도로 다른 국가들의 눈총을 받던 한국은 이제 모범적으로 상황을 잘 관리하고 있는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가 되었고, 그 사이 다른 나라들의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어 결국 WHO가 ‘팬데믹’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WHO가 선언한 첫 번째 팬데믹 1968년 ‘홍콩 독감’과 두 번째 팬데믹 2009년 ‘신종플루’가 있었지만 체감상 이번 코로나19는 역사책에서나 보던 1918년 ‘스페인 독감’에 버금가는 수준이 아닐까 한다. 말 그대로 우리는 그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초유의 사태 한복판에 있는 것이다.
사람들로 가득하던 거리는 멈췄고, 공장은 가동을 줄였으며, 세계 이곳저곳으로 사람들을 실어 나르던 비행기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휴가를 받고 공항 격납고에 잠들어 있다. 정말 이 정도면 신(God)이 너무 정신없이 달려왔던 인간들에게 너희들 잠깐만 멈춰보라고 강제로 코로나를 내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다행히 한국의 우리들은 그동안 이런 전 세계적인 상황에서 빗겨 있었다. 물론 ‘신천지’와 ‘이태원’이라는 위기도 있었지만, 그때는 감염 지역이나 그룹이 특정되어 있던 상황이라 그래도 잘 관리가 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실제로도 확진자도 잡히는 듯 보였고 날씨가 따뜻해지며 느리지만 점차 조금씩 일상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다른 나라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국은 백신이나 치료제가 나올 때까지 이 정도로 가겠구나" 하는 희망도 있었다.
그러던 지난 8월 15일,
광화문에서 모두가 아는 바로 그 사태가 터져 버렸다.
내가 보기에 현 상황은 앞서 두 번의 위기 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다.
이전에는 상대적으로 인원수가 적은 특정 종교나 사회적 그룹이었다면, 이번 사태는 사회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그룹 중 하나이면서 현재 상황을 믿지 않는 다수의 사람들과 얽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금 발생하는 신규 코로나 감염자 중 20%를 넘는 이들의 감염경로를 확인할 수 없다고 한다. 이전에 5% 아래로 관리되고 있는 것에 비하면 무려 4배를 넘는 높은 수치다. 지금은 강화된 사회적 거리두기로 잠시 주춤하는 듯 하지만, 이 사태의 원인인 그들의 태도와 상황인식은 그대로인데 과연 이 상황이 나아질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이제 누구든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코로나를 옮길 수 있고 나 또한 그럴 수 있다’라는 서로에 대한 불안이 우리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와는 달리 최악을 피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내 순진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제 한국에 사는 우리들도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본격적인 코로나 시대의 일상을 시작하게 되었다. 매일매일 현실판 ‘지뢰 찾기’ 게임을 하는 것처럼 사는 그런 일상 말이다.
원하지는 않았지만 나도 이제 본격적으로 코로나 시대의 일상을 살게 되었다. 뭐... 이미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은 어쩔 수 없지. 빈 A4용지를 꺼내어 내가 잘하는 것을 해 보았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생각을 푸는 것. 빈 종이에 선을 긋고 내가 걱정해도 바꿀 수 없는 것은 무엇이고, 내가 바꿀 수 있는 걱정해야 할 것들은 무엇이 있는지 적어갔다. 그런 다음 스스로에게 아래의 질문을 던져 보았다.
이런 코로나 상황의 일상에서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일단,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바로 외부 미팅이나 활동을 모두 줄이는 것.
그전까지는 <인사동 코트>라는 종로에서 진행하던 공간 관련 외주 프로젝트도 있었고, 상황도 첨차 나아지고 있었던 때여서 마스크를 쓰는 것 외에는 일상에 큰 변화를 주지 않았지만, 815 사태 이후로는 상황을 심각하게 보고 집과 개인 작업실만 왔다 갔다 하며 외부의 접촉을 최소화하고 있다.
올해 초 이태원에서 진행하던 <아씨이태원> 공간도 5월에 정리했고, 진행하고 있는 몇 건의 프로젝트들이나 작업들도 별 영향 없이 하고 있어서 당장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고 있는 상황은 아니다. 올해 2020년 남은 하반기는 그렇게 내 나름대로 코로나 속 일상을 조용히 지낼 예정이다.
요즘 내 일상 속 하는 일들을 정리해보았다.
대략 다음 3가지다.
정신없이 돌아가던 일상을 멈춰보니 제일 먼저 내가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보게 되는 것 같다. 때마침 얼마 전 소년중앙에 올라온 '김은혜'기자님과의 아래 인터뷰 기사도 그런 계기를 던져준 것들 중 하나다.
대학교 때부터 현재까지의 지난 20년 간의 나를 한데 모은 듯한 기사를 읽어가며, 내 이야기라기보다는 내가 아는 누군가의 과거 이야기를 듣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평소 가끔 '이제껏 뭐하고 살았나' 하는 자책스러운 생각을 종종 하곤 하는데, 그래도 이렇게 정리된 낯선 내 과거 이야기를 보니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에게 조금은 기특했다.
그리고 집에 쌓여 있는 물건들도 조금씩 정리하고 있다. 쓰지 않는 팔 것은 '당근마켓'이나 '중고마켓'에 올리고, 무료로 기부할 것과 버릴 것을 분류하고 있다.
또 한 가지, 보이는 물건들을 정리하는 것처럼,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 - 글로 쓰고 싶었던 생각의 단편이나, 한 줄 콘셉트로만 일단 던져둔 아이디어들과 같은 내 머릿속 생각 창고에 쌓아 두었던 것들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 작업을 하는데 올해 초부터 쓰고 있는 도구인 '노션 Notion'이 큰 도움이 된다. '노션'은 처음에 적응하기 좀 어려울 수 있지만, 적응되면 아주 좋은 툴이다. 아직 안 쓰신 분들이 계신다면 꼭 써보시길 권한다.
마지막으로 매번 '해야 하는데'라고 생각만 하고 외부 활동이나 외주 프로젝트 진행으로 매번 우선순위가 밀려 못했었던 일 관련된 정리들도 조만간 시작할 예정이다.
지난해 7월 챕터1을 마지막으로 공식적으로는 쉬고 있는 팝아트 프로젝트 'Project Face Drawing(프페드)'를 비롯한 개인 브랜드 정리와 회사인 프리키컴퍼니의 리브랜딩 작업과 백만 년 동안 미뤄놨던 홈페이지 리뉴얼, 그리고 지난 프로젝트들의 포트폴리오 최신화들도 할 일 중 하나로 들어가 있다.
내게는 그동안 누군가를 만나거나, 책이나 유튜브를 보며, 순간순간 떠올랐던 생각들이나 느낌들을 스샷 찍듯 일단 저장해 둔 글감들이 많다.
'나중에 시간 날 때 글로 풀어봐야지'라는 생각만 하고 방구석 한쪽에 던져놓듯 쌓아만 두고 그대로 1, 2년이 훌쩍 지나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런 밀려있는 글감들은 내 생각 창고에 쌓여있는 미실현 아이디어들과 더불어 나를 괴롭히는 대표적인 고민이기도 하다.
무엇이든 쓰지 않으면 약해진다.
내가 자주 쓰는 '생각'이나 '말'과는 달리 '글'은 너무 오랫동안 쓰지 않았다. 짧은 글이지만 한 때 자주 생각을 써서 올리던 페이스북도 어느 때부터 바쁘다는 핑계로 가끔 근황 보고하는 정도의 글쓰기만 겨우 한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나의 미숙함이 드러날까 두려워서, 혹은 나와 생각이 다른 누군가의 눈치를 보느라 내 생각이나 느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피해온 것은 아닐까 하는 반성도 해 본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나도 모르게 내 그림이 의뢰자나 일에 너무 얽매여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가져본다. 언젠가부터 일이나 의뢰를 위한 그림이 아니라, 그저 그리고 싶어서 그림을 자유롭게 그려본 적이 너무 오래된 것 같다.
어제오늘 하루 종일 쓰고 고치고 있는 이 글처럼 시간이 걸리고 아등바등 꼴이 좀 보기 싫더라도 이젠 나 스스로를 가둔 이 조심함의 감옥에서 그만 나올 때가 되었다.
평소 내가 쓰는 시간의 대부분은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정리하고, 팀을 모으고, 구현하는 활동이다. 사실 내게는 의뢰자가 있는 '외주 프로젝트'나 나 스스로가 클라이언트가 되는 '오리지널 프로젝트' 사이에 본질적인 큰 차이를 두지 않는다. 단지 결정권이 외부의 누군가 인지, 아니면 나 자신인지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내 인생의 위기나 분기점에서 나를 구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 것은 늘 내가 만든 프로젝트였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학생에서 사회인이 될 무렵에는 '문화놀이터 프리키'라는 아트마켓 프로젝트가 그랬고, 오랜 직장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자유인으로의 첫걸음 무렵에는 'Project Face Drawing(프페드)'라는 팝아트 프로젝트가 나를 새로운 사람들과 기회들로 이끌었다. 2017년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위기의 순간에 나를 구했던 'My self funding shop 마셀펀' 프로젝트도 있다.
아직도 내 안에는 아이디어 단계에서 일단 던져만 둔 프로젝트들이 여전히 많다. 평소에는 바쁘게 돌아가는 외부 프로젝트와 활동들로 그런 오리지널 프로젝트들이 늘 할 일 우선순위에서 미뤄지곤 하는데, 지금과 같이 강제적으로 외부 활동을 줄여야 하는 코로나 상황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의도치 않은 선물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제 그동안 못했던 프로젝트들 중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온라인 기반으로 작고 가볍게 시작할 만한 것이 있는지 내 머릿속 생각 창고를 뒤져볼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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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4일 낮,
안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