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사평역의 나무숲을 거닐며
요즘 특별한 외부 미팅이 없으면 거의 아씨이태원 공간에 있다.
이곳에 오기 위해선 4호선과 6호선 지하철을 이용하여 '녹사평역'을 통해서 오는 것이 제일 빠른 방법이기 때문에 작년말부터 이 역은 집 근처 역을 빼곤 가장 자주 들르는 지하철역이 되었다.
녹사평역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꽤나 멋진 역이다.
큰 돔 형태의 천정을 지붕으로 그 아래 깊고 길게 수직동굴처럼 뻗은 공간 아래로 사람들이 오르내릴 수 있는 계단과 에스컬레이터들이 멋지게 얽혀있다. 맨 아래 바닥에 위치한 개찰구 입구 뒤편으로는 수많은 나무 기둥들이 마치 숲처럼 세워져 있는 설치 작품까지 어우러져 다른 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인상적인 매력이 있는 곳이다.
특히 나무 기둥 설치 작품은 이 역에서 지하철에 내리거나 탈 때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개찰구 뒤편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드나들때 꼭 한 번은 보게 되는데, 볼 때마다 ‘멋지다. 다음에 잠깐 한 번 가봐야지’라고 생각하며 지나가곤 했다.
오늘도 아씨이태원으로 가는 길에 녹사평에서 지하철을 내려 개찰구를 통과하며 어김없이 그 생각을 하며 스쳐 지나가려는 참이었다.
그런데, 문득 내가 막연하게 가봐야지라고 생각만 하고 지나친 지 몇 개월이나 지난 것을 깨달았다.
"그래, 오늘은 생각만 하지 말고 그냥 들어가 볼까?"
오늘은 다른 때와 다르게 발길을 돌려 그동안 눈으로만 보고 지나갔던 공간 속을 지나갔다.
이 동영상은 그때의 나의 시선을 기록한 것이다.
몇 개월간 눈으로만 봐왔던 이 공간을 걸어 통과하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40초 남짓한 짧은 시간이었다.
이렇게 쉬운 것을 하는데 미루고 미루다 몇 개월씩이나 걸렸다는 것이 너무 우스워서 속으로 나도 모르게 실소가 나왔다.
그리고 그 작품 속을 한동안 이리저리 거닐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 이 작품을 거니는 것처럼, 내가 마음만 먹으면 쉽게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차일피일 미루다가 시간만 아깝게 버리고 있는 다른 것들이 있지는 않을까?
" 마음먹었을 때 바로 하면 생각보다 쉽게 할 수 있는 것인데 좀 더 좋은 시기 기다리다가 혹은 준비가 부족하다는 생각에 아직도 하지 않은 것들이 있지는 않을까?
어쩌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아직 많다는 착각을 하며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에 하자.
다음에 보자.
그런 말들로 우리는 오늘도 못다 한 미룬 것들을 쌓아가며, 마음은 있는데 시간이 없다는 말을 많이 하곤 한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가 너무 어렵게만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때로는 어떤 생각이 드는 바로 지금. 가던 길을 멈추고 잠깐만 발걸음을 돌리기만 하면 되는 건지도 모른다. 막상 해보면 생각보다 그렇게 어렵거나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게 쉽게 생각날 때 조금만 시간을 내어하는 작은 행동들이 쌓이다 보면 어느새 미뤄놓았던 많은 것들이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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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11일 낮
녹사평역 나무 숲 속을 거닐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