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허구, 실재와 가상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가상은 실재만큼 견고하고, 실재는 가상만큼 유령스럽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통념은 그 반대이다. 우리에게 현실은 너무나 강력하고 깰 수 없는 무언가로 다가온다. 반대로 가상은 그 가상만의 영역을 쉽사리 벗어 나오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곰곰이 생각해보자.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은 정말로 무엇일까? 중요한 것은 그것이 명확하고 객관적인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실과 타협해야지!", "그게 현실인걸?" 같은 말에서 자주 등장하는 '현실'이란 곧 '현실에 대한 믿음'이다. 때로는 냉소적으로, 때로는 종교적으로 믿어지는 그 믿음은 사회의 다원화와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현실에 적극적으로 침투하고 있다. 그것은 처음엔 가상의, 관념적인, 일종의 환상에 가까웠을 테지만, 이 단계에 이르면 그 자체로 현실로 여겨진다. 다수에 의해 현실로 여겨지는 환상은 더 이상 환상이 아니게 되고, 그것의 사실 여부나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현실이자 사실로서 기능하게 된다.
이것을 쉽게 보여주는 사례는 트럼프 시대의 미국에서 찾을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주류 언론들과 척을 지며 시작했다. 오바마의 취임식과 비교했을 때 더 썰렁한 트럼프의 취임식을 두고 언론과 인터넷은 둘을 비교하는 사진을 올리며 조롱했다. 취임식 참석 인원이 신임 대통령의 능력이나 자질 따위를 판단할 수 있는 수치는 아니지만, 유권자들에게 휑한 취임식장의 사진이 주는 느낌은 의식적인, 혹은 ‘이성적’인 판단에 앞선다는 점—사실 어떤 정치적 사안에 대한 '판단'은 당신이 '느낀' 것을 정당화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을 생각해보면 그 조롱은 트럼프와 그 측근들에게 상당히 불쾌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해명을 시작했다. '해명'은 정치적으로 훌륭한 대응책이 되지 못하기 마련이지만, 진짜 문제는 그들의 해명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숀 스파이서 공보비서관은 트럼프의 취임식 바로 다음 날인 2017년 1월 21일 취임식 사진에 대해 잔디 보호를 위한 백색 커버 때문에 사람이 더 적어 보이는 것이라며, 지하철 이용객 숫자나 TV 시청률 등의 수치를 보았을 때 트럼프의 취임식을 지켜본 사람이 오바마의 취임식 때보다 더 많다고 주장했다.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단순한 조롱은 거짓 해명 때문에 정치적 논란이 되었고, 그다음 날인 22일 캘리언 콘웨이 백악관 선임고문은 수습을 위해 NBC와 방송 인터뷰를 진행했다. 첫 브리핑부터 잘못된 내용을 전달한 경위를 묻는 진행자의 질문에 캘리언 콘웨이는 이렇게 답했다.
"아니요, 아니요, 그걸 그렇게 과장하지 마세요.
당신은 그게 거짓말이었다고 말하는데, 숀은 대안적 사실을 제공한 겁니다."
물론 '대안적 사실'은 거짓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든 거짓말이든, '대안적 사실'이라는 포장은 적어도 트럼프를 지지하는 이들에게는 '믿을 수 있는 것'이라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나면? 그것을 믿어야 하는 이유를 실컷 찾아내기 마련이다. 그렇게 누군가의 거짓말, 망상 따위가 현실을 손쉽게 왜곡시키는 것이다. 후에 이어 서술하겠지만, 미래의 주요 기술로 여겨지는 가상현실, 인공지능 등은 가상의 것을 현실로 끄집어내는 속성이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이런 현상은 더욱 빈번하고 심각해질 것이다.
'팔러'라는 SNS가 있다. 2020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트럼프를 지지하는 이들이 모인 곳이다. 이들은 왜 그곳에 모였을까?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4년 동안 트럼프 지지자들이 집단적으로 인식하는 사회적 현실은 나머지 집단의 것과는 매우 동떨어진 방향으로 구성되었다. 큐아넌QAnon으로 불리는 대안우파적 음모론의 총집합이 그것을 잘 보여주는데, 이들은 미국 민주당과 그들을 지지하는 유명인들, 세계 인사들이 '딥 스테이트'의 하수인이며 그들이 파충류 외계인들이 영생할 수 있게끔 하는 물질을 가진 아이들을 인신매매로 넘긴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힐러리가 피자가게 지하에서 아동 인신매매 시설을 운영한다는 식이다. 또한 정치인이 딥 스테이트로부터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며 트럼프 전 대통령을 일종의 메시아로 여긴다.
여기까지는 그저 정체불명의 팻말이나 들고 다니는 '지하철 광인'들이 흔히 할 법한 정신 나간 소리 정도로 보인다. 그러나 큐아넌과 지하철 광인의 차이점이 있다면 큐아넌은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매개체 삼아 그 세를 크게 불렸다는 점이다. 이들은 인터넷 공간을 이용해 서로 교류하고 행동하며 '큐아넌' 세계관을 공고히 만들어갔다. 한 설문에선 트럼프 지지자의 50% 이상이 큐아넌의 음모론을 믿는다고 답했고, 대선과 함께 치른 하원 선거에선 큐아넌을 표방한 공화당 후보가 당선되는 등 제도권 정치에도 발을 들였다. 그러나 트럼프가 대선에서 패배한 이후 자신이 믿고 있던 현실과 실제 외부 세계의 부조화를 목격한 큐아넌 음모론자들은 지속적으로 가짜 뉴스(그들이 믿는 현실을 담은 뉴스)를 생산하고, 온-오프라인 상에서 폭력적으로 반응했다. 이 때문에 레딧과 페이스북, 트위터, 틱톡 등 그들의 활동거점이었던 SNS에서 퇴출당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대안으로 철저한 정치적 중립(정확히는 비非규제)을 표방하던 '팔러'라는 SNS 서비스를 찾아갔다. 팔러의 사용자 수는 2020년 초까지 100만 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대선을 앞둔 11월에는 800만 명에 이르렀다. 대부분이 '대안적 사실'에 대한 믿음을 갖고 유입된 트럼프 지지자였고, 그들은 팔러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그들만의 사회적 현실을 구체화하며 그에 대한 '신앙'을 키워갔다. 그리고 마침내 이를 실현하려 행동에 나섰다. 대통령 선거 결과를 중국과 민주당의 조작으로 몰아가며 의사당을 점거하는 폭동을 벌인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이런 음모론들을 망상 덩어리로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이 신앙으로 말미암아 발전시켜온 가상의 현실이 '우리의 세계', 혹은 당신의 현실에 충분히 강력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팔러는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이유로 트럼프 지지자들이 공유하던 '위험한 가상의 현실'을 방치할 뿐만 아니라 발언의 자유를 수호하겠다며 '테러 지지'를 규제하라는 요구를 무시했다. 애플과 구글은 각각 앱스토어와 플레이스토어에서 팔러를 삭제함으로써 응수했고, 호스팅 서비스를 제공하던 아마존 역시 서비스 제공을 중단했다. 팔러 측은 아마존을 반독점법 위반으로 고소했으나 아마존 측은 팔러에 게시되어있던 다수 하원의원과 테크 기업 CEO들을 상대로 한 살해 협박, 백인우월주의 게시글 등을 근거로 자사 서비스 정책을 위반했음을 주장했고 법원은 아마존의 손을 들어주었다. 팔러의 서비스는 일시 중단됐고, 이후 러시아 업체를 통해 서비스를 일부 재개했다.
다수 사회 구성원들이 옳다고 믿는 규범을 무시하고 폭동을 일으킨 트럼프 지지자들에게 아무런 제제를 가하지 않는 SNS 서비스가 강제로 중단되었다는 이야기는 어떤 면에서 보면 평범하거나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조금 뒤로 물러나서 다시 생각해보면 어떨까. 우리에게 무료로, 혹은 아주 적은 요금으로 인터넷 상의 가상공간을 제공해주는 기업들이—그것이 위험하든 그렇지 않든—한 집단이 공유하던 사회적 현실을 부수려 한 것이다. 심지어 그들을 위해 공간을 제공한 SNS 서비스를 사실상 사용할 수 없는 불구 상태로 만들어 놓기도 했다.
물론 이번에는 그 대상이 어느 정치인 겸 사업가를 지지하면서 상대 진영 정치인들에게 살해 협박을 일삼고 의사당에서 폭동을 일으킨 음모론자였다. 그렇기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거대 테크 기업들의 통제에 별다른 불만을 품지 않았지만, 그 대상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여론 형성에서 인터넷이 기존의 기성 매체보다 더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시점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공간이라고 여겨지는 인터넷 상의 가상공간마저 기업과 같은 특정한 세력이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은 새삼스럽지만 분명히 위협적이다.
우리는 가상이 곧 현실이 되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비단 음모론자들 뿐만 아니라 우리들 역시 실재하는 현실과 괴리가 있는 가상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현실이라 생각하는 것은 현실에 대한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믿음이라 앞서 언급했다. 결국 가상은 실재를 초월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현시점에서 미래 사회의 중추가 될 기술로 여기는 것들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이를테면 소셜미디어와 인공지능, 가상현실, 가상화폐 같은 것이다. 이런 기술들은 모두 가상의 것을 실재의 영역으로 도입하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사안에 대한 이야기는 앞에서 길게 늘어놓았으니 일상적인 이야기를 한 번 해보자. 예를 들어, 인스타그램은 실재하는 현실의 이미지를 올리는 곳이 아니다. 그곳은 가상의 공간이지만,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그 가상의 공간은 현실을 반영하는 대신 현실에 가상의 것을 반영시키고 있다. 인스타그램을 즐기는 이들은 그곳에 자신이 원하는 자신의 모습을 반영한 가상의 자아를 만들기 위해 분위기 좋은 맛집을 찾아다니고 잘 꾸민 자신의 모습이나 깔끔하게 정돈된 집을 찍어 올린다. 그런 것들은 실재하지 않았지만 가상의 공간에서 태어난 것들로, '실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지라도 가상의 것 자체로서의 주체성을 지닌다. 그 결과 그 이용자들은 보다 '인스타그래머블'하게 바뀌는데, 곧 가상이 현실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페이스북 상의 수많은 프로필들 역시 인스타그램의 그것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소셜미디어의 발달은 실재하지 않는 '가상'(믿음)이 실재하는 현실에 미치는 영향을 크게 키웠다. 내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믿음과 관념은 페이스북을 비롯한 소셜미디어를 통해 구체화되고, 자신을 그 믿음에 알맞게 변화시킨다.
클라우드 서비스는 어떤가? 에버노트의 마케팅 문구는 간단히 답한다. "에버노트는 당신의 두 번째 두뇌입니다." 만일 두뇌에 있는 기억이라도 클라우드에 없다면 그것은 권위를 잃는다. 반면 두뇌에 없는 기억이라도 클라우드에 있다면 충분히 기억으로서의 권위를 갖는다. 그러니까, 클라우드 서비스는 인간의 기억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억이 클라우드 상의 기록을 모사한다고 볼 수도 있다. 전 세계에 퍼진 클라우드는 사람의 기억보다 더 많은 것을 자세히 기록하고 보존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은 완전한 가상의 인격을 보여줄 것이고,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은 실재와 가상의 감각적 경계를 허물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가상의 것은 실재하는 것에 보다 더 폭넓고 실감 나게, 강력하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여론은 가상의 공간에서 이끌어지고, 알 수 없는 이들에 의해 쉽게 조작되기도 한다. 뉴스는 실재로부터 벗어나 독자의 믿음을 충족하는, 혹은 그들이 원하는 '느낌'을 주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그것이 가짜 뉴스였음이 드러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오히려 취사선택을 통해 가짜 뉴스는 반대파만 갖고 있는 문제라는 프레임을 강력히 하면서 페이스북의 수많은 가상의 인격들에게 만족감을 안겨줄 것이다. 가상은 더 이상 실재에 기생하지 않고, 오히려 실재가 가상에 기생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써놓으니 엄청난 전환이 올 것처럼 읽히지만, 우리는 이미 이런 것에 충분히 익숙하다. 그러니 걱정할 것은 없다. 그저 얼마나 더 엉망진창이 될지 지켜봐도 될 일이다. 현실은 그렇게 나약하다. 그렇지만 바꿔 말하자면, 우리의 믿음과 관념은 생각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 더 강력해질 것이다. 당신이 무엇을 믿고, 그것을 믿는 이들이 얼마나 많으며, 자녀 세대에게 어떤 믿음을 물려주는지 같은 것들이 현실을 변화시킬 것이다.
오늘의 현실은 어제의 믿음을 보여주고, 오늘의 믿음은 내일의 현실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