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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캥 May 31. 2020

인간이라 미안해-1

실외기 거치대에 지은 비둘기 집

내 집 마련기-2 작성을 전부 마쳤지만 브런치에 올리는 것은 좀 보류하기로 했다. 대출 과정부터 아파트 계약 얘기까지는 별 일이 아니었지만 그 과정에서 너무나도 개인적인 얘기가 많아 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지금은 이사온 집에서 산 지 보름이 되었고, 집 정리 마무리하고 있는 단계이다.




새 집에 입주하고 거의 모든 정리가 끝날 때쯤, 에어컨 실외기 쪽을 보니 비둘기들이 곱게 집을 지어놓고 살고 있었다. 비둘기 퇴치용 철망이 무색하게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살고 있던 것이다. 어디서 풀과 흙을 물어왔는지 실외기 거치대에는 이미 하나의 생태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어떻게 비둘기가 여기에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보다 먼저 들었던 생각은, 대체 전 집주인은 뭘 하고 살았길래 이때까지 이렇게 방치해뒀을까 하는 생각.


이게 실외기실이여 새집이여


어처구니없는 모습에 곧 사진을 보내며 부동산에 항의를 했고, 청소비용 10만원을 받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이후 에어컨 설치와 함께 비둘기 퇴치작업까지 같은 날에 진행을 하려다 보니 날짜 조율에 시간이 좀 걸릴 수밖에 없었다.


비둘기 퇴치작업 업체가 있는줄 처음 알았다.


전에 살던 집은 고층에다가 도심 가운데 위치해서 그런지 비둘기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현재 집은 공원도 가깝고 중층이니 비둘기가 서식하기에는 최적의 환경, 할수있는 것은 얼른 실외기를 설치한 후 비둘기가 들어오지 못하게 차단막을 설치하는 것. 돈 쓸 필요없이 뭔가 직접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했지만 난 공대에서도 버림받은 문돌이 인재, 깔끔하게 포기하고 작업을 요청하기로 했다.


사실 완벽히 퇴치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실외기와 차단막 설치 날짜가 다가오는 지금, 며칠 전에 출근 준비를 하다가 무심코 밖을 보았다. 예외 없이 그날도 비둘기들이 아침햇살을 즐기며 쉬고있는 걸 보았다. 어차피 곧 공사를 할 터이니 일부러 쫓아낼 필요는 없는 상황, 그래도 뭔가 창문을 열고 소리를 쳐서 쫓아내고 싶은 짓궂은 생각이 들었다.


하찮은 인간놈들!


며칠 전에도 놀라게 해서 쫓아낸 적이 있었는데 오늘은 좀 달랐다. 비둘기들이 좀처럼 도망가지 않는 것이었다. 몇 번 소리를 치고 펜스를 손바닥으로 두들겨도 가만히 쳐다보기만 할 뿐, 이 놈 봐라 만물의 영장을 얕보지 마라 하면서 주먹을 허공에 휘둘러대니 그제야 몸을 옮겨 마지못해 날아가는 비둘기 두 마리. 그런데 거기에 남은 것은...


살면서 처음 본 비둘기알


바로 비둘기 알 두 개였다(사진의 세 개는 나중에 찍은 것). 문을 벌컥 여는 인간을 보고도 도망가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 알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자 양심의 깊은 구석을 찌르는 느낌이 들며, 출근하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쓰레기가 된 기분



퇴근 후 다시 열어보니, 비둘기는 여전히 알을 품고 있었고 알 개수는 그 사이 하나가 더 늘어나 있었다. 심지어 날 쳐다보는 비둘기 눈빛도 뭔가 좀 매서운 기분이었다.


방해하지 마라 인간


실외기 설치를 불과 5일도 남겨놓지 않은 상황, 5일 안에 알이 부화되어 벌레를 먹여 키워도 새끼들이 날아 떠날 확률은 지금 사지도 않은 로또가 당첨될 확률보다 높을 수가 없었다. 자식을 품고 있는 어미에게 본의 아니게 엄청난 상처를 주게 될 것이 자명하니 더더욱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알이 하나 더!


그다음 날 퇴근 후, 젠장 알이 하나 더 늘어있었다. 심지어 이 비둘기는 알을 발견한 이후로 밥도 안 먹고 사는지 그 자세 그대로 알을 품고 있었다. 밤에 살짝 보니 머리를 오른쪽 날개에 묻고 자고 있었다. 마음은 더욱 불편해지는 상황.



뭐야 이건?!


그다음 날 아침 상황, 알을 품던 비둘기는 온데간데없고 웬 흰 비둘기가 대신 알을 품고 있었다. 그럼 부모가 교대로 알을 품고 있는 건가? 비둘기도 가족을 이루며 사는지 처음 알았고 자식을 위해 맞벌이 부부가 교대로 연차를 사용하는 게 인간 사회랑 비슷해 보였다. 수컷은 그저 씨만 뿌리며 돌아다니는 줄 알았는데 웬걸, 둘 중 누가 수놈인지는 모르지만 식음을 전폐하고 알 품기에 올인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지키고 있는 놈이 애비 아니었나? 그럼 얘는 뭐지?


여태까지 확인된 것은 검은 비둘기 두 마리가 집을 지키고 있으며, 한 놈은 알을 품고 한 놈은 펜스에 앉아 경계를 하고 있다는 것 정도, 그리고 가끔 흰 놈이 와서 알을 대신 품어준다. 이 정도였다. 이들의 복잡한 사정이야 내가 조류학자가 아니니 알 일이 없겠지만 마음이 불편한 것은 이 집의 주인으로써 이들을 조만간 쫓아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새들도 가족사가 꽤 복잡한가 보다.



비둘기 알을 조심스럽게 옮기는 방안도 생각해 보았지만 일단 너무 위험했다. 새알을 옮기다 추락한 사람이 있다면 아마 다윈상 후보로 노미네이트가 될 수도 있는 일이다. 청소업체 아저씨들에게 좋은 방법이 있지 않을까 생각도 해봤지만 이들의 주 업무는 어찌 됐건 청소, 유해조수로 분류된 비둘기들에게 베풀 자비가 있을 것 같진 않다.


훈훈하고 아름다운 결말을 기대하고 여기까지 읽어온 사람들에겐 맥이 빠질 수도 있지만 아직도 정해진 것은 없다. 어미 비둘기는 여전히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알들을 품고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오늘 밤을 보내고 있다.


집은 제발 부수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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