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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up de Chance

뜻밖의 행운, 우연, 그리고 삶의 아이러니

by knok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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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레이니데이 인 뉴욕’ 이후로 우디 앨런을 한국에서 다시 볼 수 있어 기쁘다. 이번에도 늘 먹던 맛 그대로다. 감독의 최근작이자 첫 프랑스어 영화인 ‘Coup de Chance’ 는 2023년에 개봉하였으며 동해 베니스 국제 영화제 초청작이다. ‘뜻밖의 행운’ 이라는 뜻의 제목은 허무와 낙관의 이중적인 면모를 내포하며 영화 전반에 걸쳐 우연과 행운, 그리고 아이러니에 대해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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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부유한 사업가 남편과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내고 있는 여자가 출근길에 우연히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 새로운 사랑을 발견하고 도피를 꿈꾸며 시작된다. 전작들에서 수없이 나온 이야기 흐름이고 오히려 이번에는 시작부터 새로운 인연과 만나는 장면이 나와 김이 빠질 정도였다. 그러나 시대를 막론하고 돈과 열정, 예술적인 삶의 대비와 그로 인해 이어지는 일탈은 클래식한 주제다. 주인공 파니 또한 어린 날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옛 인연과 사랑에 빠지면서 자신이 지금 누리고 있는 세속적인 혜택과 편의의 위대함을 잊어버린다. 그러나 그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알랭이 쓴 글의 주제처럼 우연과 행운, 아이러니에 의해 혼란스럽고 유머러스한 방향으로 전개된다. 알랭이 파니에게 로또와 인간이 태어날 확률에 대해 열변을 토하면서 하는 ‘태어난 것 자체가 기적이다’ 라는 말은 너무나 진부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다른 관념들과 마찬가지로 삶을 관통하는 하나의 태도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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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운드 트랙 또한 탁월하다. 허비 행콕의 ‘Cantaloupe Island’ 가 흘러나올 때 나도 모르게 영화관에서 어깨춤을 출 뻔했다. 그밖에도 냇 애덜리와 같은 모던 재즈의 향연이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이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모던 재즈가 스릴러에도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조명 연출에 대해서도 눈길이 갔다. 특히 파니가 알랭과 본격적으로 연애를 시작하면서 두 집을 왔다갔다하는 장면에서 색 대비가 도드라졌다. 알랭의 보헤미안 집은 점점 아름다운 오렌지빛으로 물들고, 반면에 파니와 장의 집은 푸른 색이 점점 짙어지더니 나중에는 심해의 검은 빛깔처럼 불길하게 변한다. 후반부로 갈수록 보이지 않는 갈등이 심화되면서 인물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색이 가라앉는 장면이 인상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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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나는 영화를 보기 전이든 본 다음이든 대중없이 리뷰를 살펴보는 편이다. 스포에 민감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의 감상에도 섣불리 치우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개봉하기 전까지 한국에서의 공백이 길었기 때문에, 종종 생각이 나면 왓챠피디아 같은 리뷰 사이트에서 어디선가 먼저 영화를 본 사람들의 글을 읽어보곤 했다. 그러면 대부분의 우디 앨런의 리뷰에서 ‘자기복제’ 라는 키워드가 빠짐없이 나오는 걸 알 수 있었다. 영화를 보는 도중에 우연히 그 단어가 생각났고, 영화관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생각을 거듭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나의 의견은 이렇다: 우디 앨런을 포함해 일부 창작자들이 마치 오명처럼 가지고 있는 ‘자기복제’ 라는 속성에 대해서는, 어떤 창작자가 사랑에 대해 평생에 걸쳐서 글을 써왔다고 해도 누구도 그것을 가리켜 자기복제라고 하지 않는 점을 들어 반박할 수 있다. 우디 앨런은 특히 이 영화에서 더 도드라지는 우연과 행운, 아이러니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해 왔다. 비록 그의 영화들이 내용상으로 서로 비슷한 플롯과 서사를 취하더라도, 그것들은 서로 다른 은유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외람된 이야기지만, 늘 먹던 맛이어서 좋은 점은 영화를 처음 볼 때 으레 파악해려고 애쓰는 부분(서사나 인물)에 들어가는 집중력을 배경과 장식적 요소로 돌릴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무대 연출과 미장센에 꽤 신경을 쓰는 감독들은 지나간 장면을 되돌릴 수 없고 멈출 수도 없는 영상 매체의 특성을 생각했을 때, 들인 수고에 비해 조금 저평가를 받을 여지가 있지 않나 싶다. 파리의 가을, 에르메스, 그리고 허비 행콕을 어떻게 한시간 남짓한 시간에 소화할 수 있을까.


그리고 정말 외람된 이야기로, 한국판 제목인 ‘럭키데이 인 파리’ 는 정말… 내가 우디 앨런과 그의 영화에 대해 가지고 있던 환상들을 와르르 부수는 느낌이라 아쉽기 그지없다ㅠ. 스캔들 후의 첫 수입된 영화기도 하고 비교적 흥행한 ‘레이니데이 인 뉴욕’ 의 후광이 필요해서였을까? 아무리 그래도 ‘럭키데이’ 는 영화의 주제와도 맞지 않고 ‘뜻밖의 행운’ 이라는 원제와 뉘앙스며 분위기 차이가 심하지 않은가 싶다ㅠ. 제목이야 어쨌든 마침내 우디 앨런을 수입해주신 해피송 대표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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