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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esoo Jung Jun 20. 2021

[제3장] 지극히 인간적인 사이코패스를 위하여

제3장 쿠지

이 글을 비롯한 본 매거진에 담긴 글은

[소설] 사실 또는 작가의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허구적으로 이야기를 꾸며 나간 산문체의 문학 양식입니다. 


[제3장] 쿠지


    나무가 흔들린다. 이렇게 비와 바람이 조화로운 날이면 나는 기분이 좋아진다. 아니, 신이 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날씨엔 항상 10 에비뉴 55 스트릿 코너쯤에 자리한 FIKA라는 카페에 가서 오픈 샌드위치와 샷 추가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한 후 자리에 앉아 창밖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렇게 허공을 긋는 빗줄기 하나하나에 시선을 집중시켜 보면, 비워 보려고 노력했던 머릿속이 금세 여러 가지 생각들로 가득 차곤 했다.

    나는 생각을 멈출 수 없는 인간으로 판단된다. 보통은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들조차도 나의 의식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숨을 쉬는 것. 눈을 깜박이는 것. 걸음을 내딛는 것. 남들은 무의식적으로 하는 것들이라는데 나에겐 자동으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모든 육신의 행위가 나의 의식의 관심을 필요로한다. 그렇기에 무척 피곤한 어떤 날에는 숨을 쉬는 것 조차 귀찮아진다. 생각을 멈춘다면 나는 전기가 공급되지 않는 기계처럼 늘어질 것이다. 아마 죽을 수도 있어.

    이제 FIKA는 사라졌지만 같은 자리에 COOGEE가 생겼다. 이곳은 네이비빛으로 가득 차있다. 잔은 쨍한 밝은 파랑이다. 잔을 든 캥거루의 검은 실루엣이 잔들마다 깔끔하게 새겨져있다. 카운터 반대편엔 검정색 하이 테이블이 자리하고 있는데, 그와 세트인 검은 하이 체어에 앉아 발걸이에 발을 올려놓고 작업을 하면 집중이 참 잘 된다. 산미가 덜한 쪽의 커피만 고집하던 난, 산미 있는 콜드브루도 맛보시라며 주신 사장님 덕분에 커피의 산미를 음미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면 여전히 이곳이 아닌 곳에선 인상을 찌푸리며 잔을 내려놓는 일이 빈번하다. 결론은 COOGEE의 콜드브루는 산미를 막론하고 맛이 좋다.

    캥거루가 들고 있는 잔에도 캥거루 그림이 새겨져있을까. 콜드브루와 라즈베리 요거트를 주문해 놓고 픽업대 앞에서 기다리던 중, 다른 모양의 같은 색깔, 같은 문양이 그려진 잔들이 쭉 늘어서 있는 것을 보며 문뜩 든 생각이다. 문양을 새긴 사람도 이런 생각을 했을까. 이것은 참으로 시시콜콜하고 쓰잘데 없는 생각이다.

    요거트와 커피가 놓여진 트레이를 받아 들고 가득 담긴 음료가 흘러 넘칠까 조심스레 창가  테이블로 걸어간다. 물질의 세계를 사는 나를 바라보는 나는  걷는 꼴을 보며 웃는다. 살금살금도 엉거주춤도 아닌  사이의 무언가.

    드디어 무사히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고 앉는다. 오늘은 이 날씨를 즐겨야 하기 때문에 하이체어의 안락함을 포기한다. 삶은 가치판단의 연속이고, 취향이 확실한 것과 현재의 감정 및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는 것은 선택에 소모되는 시간과 에너지를 줄여준다. 여러 가지를 경험한 것이 취향을 알게 해주고, 감정에 대해 분석해 본 것은 지금 나의 감정을 빠르게 인지할 수 있게 해주며, 외부 상황을 신속하게 파악하는 것은 타인의 감정이 감지되지 않는 선천적 특성의 영향을 받았다. 감정적 공감의 결여. 그러니까 타인의 감정이 저절로 전달되지 않기에 표정, 상황, 성격 등 다른 정보들이 필요하다. 그래야 함께 대화하는 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다. 그 정보들을 매우 빠르게 처리해야한다. 상황파악이 빨라 질 수 밖에 없다. 주변 사람들 선택이 빠른 이들을 가젤이나 버펄로를 보듯 하며, 충동적 (좋게 말하면 강한 추진력)이라 이야기하는데, 선택이 빠른 모두가 충동적인 것은 아니다. 남들이 10분에 10개를 고려한다면, 나는 5분에 10개를 고려한다. 결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기에 나는 버펄로 일 수 없을 것이다.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빗줄기를 바라본다. FIKA는 아니지만 여전히 생각은 끊임없이 흐른다. 나는 나 자신을 여전히 지켜보고있다.

    시선을 돌리니 시멘트 바닥이 눈에 들어온다. 매끈한 FIKA의 바닥을 예상한 것인지 새삼 어색하다. COOGEE가 FIKA를 대신할 수는 없다. 뭐가 더 낫다를 논하는 것은 아니고, 각각 고유성을 가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예전 뉴질랜드에 있을 때 매일 붙어 다니던 독일 친구가 한 말이 생각이 난다. 로렐은 나랑 같은 연수 과정중에 있었는데 나보다 일년 먼저 시작해 반학기 먼저 끝냈다. 로렐은 뉴질랜드를 떠나며 ‘너무 아쉬워하지 마. 대신 라미르가 있잖아.’ 라는 말을 했다. 나는 그 말을 하는 로렐에게 화가 났다. 누군가가 본인의 존재를 대체할 수 있게 되어도 진짜 괜찮은 것인가. 나에게 로렐은 그 정도의 존재가 아니다. 로렐은 로렐이기에 나의 세계에서는 로렐의 공간이 따로 존재한다. 그런 로렐을 로렐이 하찮게 취급하는 것 같아 화가 났다. 물론 라미르도 소중한 사람이지만 사람이나 친구라는 공통점 하나만으로 서로가 서로를 대체할 수 있지 않다. 나는 화를 없애며 대답했다. ‘라미르도 좋아. 그렇지만 라미르는 로렐이 아니잖아.’

    커다란 빗줄기가 창을 때려 큰 소리와 함께 진동이 느껴졌다. 창에 잠시 머리를 기댔던 나는 덕분에 현재로 돌아 올 수 있었다.

    이곳의 창은 통유리로 되어 있다. 이곳은 복층 구조로 되어 있기에 천장부터 바닥까지 꽤 넓은 면적이 모두 투명하다. 유리창의 끝, 천장과 맞닿은 부분을 쳐다보면 웅장함까지 느낄 수 있다. 칠 년 전 제주도에 갔을 때 우연히 풍차 바로 앞에 설 수 있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랑 크기만 다를 뿐 같은 종류의 느낌이다. 감정이 들어올 때면 크기와 종류가 함께 인지된다. 인지된 감정을 느끼기로 선택을 했을 때 나는 그 감정을 감정의 방에 밀어 넣는다. 그제야 비로소 감정이 느껴진다. 종종 풍차 앞에 설 때와 같이 감정의 크기가 너무 큰 경우엔, 감정에 비해 내가 가진 감정의 방이 너무 작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행용 가방에 물품을 양껏 욱여넣고 지퍼가 잠기지 않아 위에 올라앉아 채워야 하는 것처럼, 감정이 밖으로 삐져나오기 전에 방에 얼른 밀어 넣고 문을 닫는 것만 같다. 그런 벅찬 감정이 들 때면 솔직히 어떻게 표현을 해야 가장 적절한 것인지 모르겠다. 감정의 인지, 느낌, 표현 모두 통제가 가능한 나 같은 사람들은 진실한 감정표현조차도 의식해야 할 수 있다. 차라리 다른 이들 처럼 선택이 불가능 했으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감정표출이 통제가 된다는 것은, 그러니까 표현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람 개개인의 방식을 파악하고 그에 맞춰 나의 감정을 오해의 여지 없이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매번 전달 하고 싶을 때마다 적절한 방법을 선택을 해야하는 것은 무척이나 귀찮다. 게다가 아무것도 안한다면 감정을 느끼고 있더라도 아무것도 표현되지 않아 여러가지 오해를 불러오기 쉽상이다.

    맺힌 물방울을 피해 컵을 들고 한 모금 마신다. 콜드브루가 목구멍을 타고 위장까지 내려가는 게 느껴지는 듯하다. 소화제 박스 앞면에 그려진 인체 모형도를 상상하며 커피가 지금은 어디쯤 지날까 상상을 해본다. 웃기다. 아까 캥거루가 그려진 커피잔을 들고 있는 캥거루가 그려진 커피잔 처럼, 나는 항상 생각하고 그 생각 중에는 황당하고 어이없는 것도 많으며 그 때문에 웃긴 경우도 많다. 하지만 웃음이 밖으로 표현되지는 않는다. 나에게 감정표현이란 소통의 방법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에 혼자 있을 때는 거의 선택되지 않는 행위이다.

    컵을 내려놓으며 손에 묻은 물을 냅킨으로 닦고  쪽을 바라본다.  카페의 특성상 내가 앉은 자리에서는  블록 넘는 거리에서부터 걸어오는 사람까지도   있다. 그러니 고개를 돌릴 필요도 없이 눈동자만 움직인다면 기다림을   정도 줄일  있다.

    아직 약속 시각까지는 9분이나 남았으니 책을 읽으며 기다리기로 했다. 가방에서 책을 꺼내며 랩탑도 함께 꺼내 옆에 두었다. 육체적으론 최대한 효율적인 삶을 지향한다.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 새파란 책표지에 눈이 자극된다. 시간을 멈추는 법. 몇 년 전 친구에게 받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최근에야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평균수명의 몇 곱절을 사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보통이 아니라는 것. 특히나 인류가 불가능하다고 굳게 믿는 것이 가능한 삶을 사는 것은 피곤하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책 속 의사처럼 망상에 빠져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할 것이며, 사실로 인정을 받더라도 이후엔 더는 인격체가 아닌 대상화 되는 경우가 많다. 두려움의 대상이나 기피, 혹은 연구대상. 있는 모습 그대로를 온전히 이해해 줄 수 있는 누군가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 세상의 모든 가치 중에 단 하나만 고르라고 한다면 주저함이 없이 이것을 선택할 것이다.

    중간 부분에서 살짝 왼쪽으로 치우친 부분을 펼친다. 나는 이 작가의 표현력이 마음에 든다. 나 대신 정확한 단어를 찾아 순간 순간의 감상을 묘사한 것과 같은 문장이 적지 않다. 나는 항상 정확한 단어를 찾아다니려 힘쓴다. 나로선 수고로운 작업을 대신해 준 것이기에 감사한 마음이 느껴진다.


    ‘사람들의 입에서는 동굴에서 쏟아져 나오는 박쥐 떼처럼 웃음이 터져 나왔다.’


    참으로 마음에 드는 문장이었다. 감정표현이 자동적인 게 아닌 나는, 누군가에게 내 현 감정을 전달할 필요가 없는 혼자일 땐, 나의 감정은 항상 내면에 머문다. 객석에서 박장대소하는 많은 사람을 볼 때면 항상 그들의 입에서 나비 떼가 나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비가 하나둘 늘어나 결국 입에 다 머금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터져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웃긴 상황에서 사람의 감정이 그런 식으로 표출되는 것이지만, 난 입 속 나비떼가 아니라면 그런 표정이 나올 수 없을 것이다.

    마음에 쏙 드는 표현이라 빨간 볼펜을 딸각거리려던 찰나, 책에 비치는 이질적인 그림자에 멈칫했다. 리가 드디어 약속 시각에 늦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것을 깨우친 것일까?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라는 한국의 속담을 근거로 든다면 이 그림자가 리의 것일 확률은 아주아주 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도 있다. 그림자의 주인을 보려 고개를 치켜드는 2초간 여러 가지 가능성이 머릿속에 오고 갔다.


    “실례지만…….”


    역시 속담은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인간의 행태를 아주 잘 담고 있는 것들이 많다. 그림자의 주인은 아주 정중한 어투로 책을 꺼내며 내 랩탑에 붙은 스티커의 출처를 물었다. 스티커는 사 년 전 내가 약 일 년간 운영하던 팟캐스트 로고인데, 사람 얼굴 실루엣에 뉴욕 사진을 합성한 짙은 남색 색감의 것으로, 짧은 시간을 투자했지만 결과물이 참 마음에 들었을 뿐만 아니라, 주제인 감정과 이성의 분리라는 것이 명확하게 표현되기도 했기에, 시간이 꽤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내 랩탑 한쪽 편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떼어내기 귀찮은 것도 있고.


    “제 팟캐스트에요.”

    “네?”

    “제가 팟캐스트를 운영했었는데, 그 로고를 스티커로 만든 거에요.”


    이 자의 놀람은 부정적인 것일까 긍정적인 것일까? 내 팟캐스트를 아는 사람인 것 같다. 그리고 굉장히 특이한 사람이다. 사람들 중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팟캐스트의 스티커를 붙인 랩탑을 가진 사람을 카페에서 봤다고 다가와 말을 거는 사람이 많은가? 보통의 그런 반가움은 마시던 커피와 함께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다수이지 않은가?

    청취자라면 내가 사이코패스라는  알고 있을 텐데 대화를 하고 싶은 것이라면……? 나는 하려던 말을 삼키고  사람의 다음 반응을 기다리기로 했다.  자의 다음 반응이 사이코패스에 대한 범죄자적 인식이 없어졌다는 (적어도  사람에겐) 증거일  있을 것이다. 활동의 결과가 의도대로 왔다면 그것을 실제로 보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저도 사이코패스예요.”


    예상치 못한 답변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잠시 멈추더니.


    “안님이신거죠? 팟캐스트 청취자였어요. 아니, 청취자예요. 지금도 종종 들어요.”


    그리고 이번엔 좀 더 길게 멈추더니, 이내 다시 이어나간다.


    “안님의 설명에 의하면 저도 사이코패스일 거에요. 아, 사이코패스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구사하는 소시오패스일 확률이 더 높겠어요. 어려서 부모님께 지속적인 학대를 받았거든요.”


    이 자는 사이코패스의 특성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내가 사이코패스라는 것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듯 하다. 보통 사람들은 첫 만남에 불행한 유년 시절을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막연한 부정적인 감정이 들게 하고, 사람들은 그것이 그 사람에게 드는 감정이라고 쉽게 착각을 한다. 첫 만남에는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 관계를 쌓는 것이 무난한 선택이다. 사회성이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사이코패스는 문장이나 단어에서 자동으로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예를 들어 행복이라는 단어에서 좋은 기운을, 죽음이라는 단어에서 나쁜 기운을 느끼지 않는다. 단어와 문장은 뜻을 전달하는 도구일 뿐이다. 이 자는 그것을 잘 알고 있기에 그리고 내가 사이코패스라는 것 또한 정확히 인지하고 있기에, 스스럼없이 처음 만난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여전히 이 자가 말을 건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기엔 주어진 정보가 불충분하다. 가능성은 여러가지이고, 이 자는 일반적이지 않아보이기에, 확률을 따지는 것은 멍청한 짓일 것이다.


    “앞자리에 잠시 앉아도 될까요?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요.”


    반가움이 전부라면 인사만 나누고 갔을 것이다.


    “아, 잠시 후에 친구를 만나기로 했는데, 일단 앉으세요.”


    팟캐스트나 브런치를 시작한 후에 나에겐 귀찮은 상황졌다. 개중 절반은 사이코패스를 하나의 흥밋거리로 생각하는 독자나 청취자들이 나에게 연락해  정확한 설명을 요구하는 경우였다. 주제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에겐 귀찮더라도 얼마든지    있지만,  글을 읽거나 팟캐스트를 들었다는 사람이 나에게 바란다면   자가 멍청하다고밖에 생각할  없다.  들었으면서 똑같은 소리를   듣길 원하는가? 이미 아는 정보일 텐데? 내가 눈앞에서 직접 다시 설명한다고 해서  자가 알아들을까? 예의상 귀찮음을 감수했지만 낳는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또 다른 반은 나를 마치 인터넷에 떠도는 성격테스트 중의 하나로 이용하려는 자들이었다. 실제로 진지한 자세로 자신의 기질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하나하나 고찰해 본다. 짧은 시간에 끝나는 것도 아니기에 가볍게 묻지 않는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은 구체적이고 자세한 질문을 하며 모순을 짚어 주는 것뿐인데 실제로 그걸 필요로 하는 사람은 긴 시간을 부탁한다. 이질감을 느끼며 삶을 살아왔던 사이코패스의 정서적 피로도가 해소되는 일은 개인적으로 굉장히 유의미한 일이기에 이런 사람들의 부탁에는 시간을 들이는 것이 아깝지 않다. 그렇지만 자신의 기질일 수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한없이 가볍게 말하는 사람들을 상대한 후엔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진다. 그 사람들한테는 순간의 즐거움일지 모르겠지만 난 일말의 긍정적 감정이 들지 않는다. 그런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것은 쓰레기통에 쳐넣는 것이랑 다르지 않다.

    전할 것은 다 전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들었다면 나는 더는 그들과 그 주제에 대해 가볍게 나눌만한 것이 없다. 만약 이 자도 가벼운 부류라면 적당히 예의 있게 상대하다 리와 이른 점심을 먹으러 갈 생각이다.

    아직 판단하기엔 정보가 부족하다. 일반적이지 않아 보이는 이 자는 나에게 꼭 말을 걸어야만 하는 그런 이유를 가졌을 수도 있다.


    “반가워요.”


    나는 예의를 차리며 인사를 건넸다.


    “반갑다기보단 흥미롭다고 생각하고 계시죠?”

    “흥미로움이 반갑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요즘 예상에서 벗어난 일이 딱히 생기지 않고 있거든요. ”

    “얼마 전 이메일을 하나 받지 않으셨나요?”


    스턴박사의 메일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오래간만에 이런 상황이 펼쳐지니 온몸에 전율이 밀려 들어온다. 스턴 박사의 메일과 더불어 이 자의 등장은 상당히 안정적이었던 나의 삶의 엄청난 자극으로 다가온다. 상당한 양의 희열도 밀려들어온다. 나는 그것을 온전히 느끼며 침묵을 지켰다. 궁금하긴 하지만 난 대답하지 않더라도 딱히 잃을 것은 없다. 본인이 먼저 접근했고, 대화를 이어가고 싶다면 먼저 의도를 밝힐 것이다.


    “아, 죄송합니다. 일반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상하고 예의없게 여겨질 수 있겠네요. 저는 킴 배링턴 이라고 합니다. 뉴욕 대학교에서 심리학 석사를 하고 있어요.”


    뜬금없는 자기소개? 지금은 소개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름이나 직업 따위는 우리의 대화에 중요한 정보가 아니다. 우리는 친구를 하자는 게 아니지 않은가. 이 자도 이런 사실을 잘 아는 것 같고, 나도 이 자가  그래서 자기소개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넘겼다. 게다가 일반 사람? 단어 선택이 이상하다.

    갑자기 잠시 대화의 초점이 어그러져 주위 상황을 살폈다. 가까운 곳에서 비 오는 거리의 향과 살짝 차가운 공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리였다. 리는 내 시야 밖에서 킴을 노려보고 있었다. 킴의 뜬금없는 자기소개에는 리의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가 한 몫했을 것이다. 잔뜩 가시를 세운 꼴이 주일학교 선생이었을때 아이들과 브롱크스 동물원에 가서 봤던 호저랑 꼭 닮았다. 호저는 고슴도치의 큰 버젼인데 리는 고슴도치라고 하기엔 너무 덩치가 컸다.


    “언제부터 거기에 호저처럼 서 있었어?”

    “호저는 뭐야? 막 왔어. 아, 예, 리 더니든입니다. 안의 친구예요. 그런데 스턴의 메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고 계시죠?”


    호저를 언급 할 시간에 리의 입을 막아 버렸어야 했다. 본인이 경계하는 자에게 정보를 술술 넘기고 있는 리를 보며 참 모순적이라고 생각했다. 가시를 세우든 꼬리를 흔들든 하나만 했으면 좋겠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한 사람으로부터 긍정과 부정의 감정이 동시에 흘러 들어온다. 너무 오래간만에 만나 무척이나 반갑고 동시에 짜증나는 소중한 인간. 리. 스턴의 메일임을 밝히지 않으려던 계획이 이제는 불가능해지자 난 잠자코 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 리님 이실 것 같았어요. 전 안 님의 팟캐스트 청취자에요. 자주 언급하셨잖아요. 그쵸? 아, 스턴 박사는... 주기적으로 제가 다니는 학교에 와서 이런저런 세미나를 해요. 대부분은 다 사이코패스 관련 주제들인데. 원래 계절학기 수업을 원했지만, 웨버 교수님이 반대하셨지요. 웨버 교수님은 학과장이세요. 아, 뭐, 아무튼 그래서 저는 세미나 동안에 스턴 박사와 학과 사무실에서 자주 마주치는데, 제 생각엔 스턴박사가 안님이나 다른 사이코패스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무언갈 꾸미고 있는 것 같아요. 그 사람의 입에서 체크 박사님과 안님의 이름이 나오는 걸 들었거든요. 실례가 안 된다면 안님께 몇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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