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의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마주한 이브 탕기Yves Tanguy(1900-1955)의 작품 ‘Il sole nel suo portagioie(보석 상자 속의 태양)’.
처음 보는 작가와 작품이었다. 맞닥뜨리는 순간 내 안의 자유로움이 확 열리는 기분에 사로잡혔고 머릿속에 여러 문장이 떠올라 그 앞에 꽤 오래 서 있었다.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몇몇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이 그림이 가진 독특함에 더 관심이 갔다.
“이브 탕기는 자신의 이야기를 대신할 주인공으로 생물과 무생물의 중간 어디쯤인 조형을 선택한 듯하다. 희한한 형태이지만 완벽한 추상은 아닌, 가로등이나 천 같은 사물, 광물, 동물, 인체 등을 연상하게 하는, 그러나 어느 부류에도 속할 수 없는, 어쩌면 ‘생명을 갖기 직전’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형태들을.
‘이것들’은 어디까지가 땅인지, 어디서부터 하늘인지 모르겠는, 어쩌면 바닷속이거나 우주 일지도 모를, 그래서 꿈일 수도 있는 공간에 다리 혹은 지지대를 가진 몸으로 서 있거나 서로를 지탱하며 붙어 있다. 작가는 매우 작은 형태-실제 크기 3mm 정도-까지 그림자가 진 덩어리로 그렸다. 아주 작은 의미도 공간에 정확히 놓고 싶었던 거다. 무게를 가진 것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자기만의 기호를 반복적으로 사용해서 동일한 의미를 드러내길 원하는 작업과, 이브 탕기처럼 고유한 형태로 풍경을 만들어내는 경우에는 차이가 있다. 이런 그림에선 결국 내용이라든지 주제보다는 시각적 효과가 더 중요해 보인다. ‘의미를 전달하겠다’는 의지보다는 ‘형상을 만들어내겠다’는 의지가 더 우선한다. 의미는 그다음, 작가는 펼쳐놓는 사람.”
여기까지가 그때의 메모를 다듬은 내용이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찾아본 그의 다른 작품들은 내가 본 그림의 변주로 가득했으며 비슷한 방식 안에서 무한했다. 고유한 스타일이 풍기는 본질적인 분위기는 동일했으나 각각의 그림에 붙일 수 있는 장르는 다 달라 보였다. 아, 이렇게 치밀하고 자유로운 방식으로, 이렇게 많이 그릴 수 있다는 걸 알았을 때 그는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형태 다음도 생각하게 되었다. 정확히는 이야기를. 그림자 때문일까, 흐르는 시간 속 포착된 장면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것들’의 목적도 궁금하다. 벌이는 행위가 사랑인지 축제인지 일상인지 알 수는 없지만 눈, 코, 입이 없는 형상들은 여전히 어떤 분신처럼, 이야기를 말하는 대역처럼 느껴진다. 마음이나 생각이 모양을 가졌다면 이브 탕기의 경우엔 이렇게 생긴 걸까?
“아이디어를 현실로 바꾸면 훨씬 작아 보인다. 세상의 것이 아니었지만 세상의 것이 된다. 상상에는 한계가 없다. 물질세계에는 한계가 있다. 예술은 두 영역 모두에 존재한다.” 릭 루빈, <창조적 행위: 존재의 방식>, 26쪽
그의 그림이 내게 매력적인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작업 전면에 세운 대상들이 완벽한 추상도 구상도 아니라는 점이다. 현실과 관계없는 듯 관계하는 딱 그 중간 지점에서 너무나 자유롭다는 사실이. 나는 그의 작업에서 상상의 세계와 이면의 물질세계를 동시에 발견한다.
올해 봄에 본 그림이 연말에 이른 지금까지 떠올라 날 건드리는 이유는 현재 나의 작업 소재가 변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으로 추측해 본다. 내가 지금껏 그림에 세운 주인공은 사람이었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그러나 새로운 작업에는 사람이 아닌 다른 대상을 그리고 싶다는 솔직한 마음이 보내는 신호가 점점 뚜렷해지고 있었으며, 손은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야기 주제와 내용이 시각적 형태와 관계한다면, 내가 겪는 변화도 그런 방식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그리는 대상이 변했다면, 이야기도 변한 것으로. 주제가 있어 표현하기도 하지만, 손이 그리게 되는 형태를 거꾸로 이해하며 찾아가는 과정 끝에 완성되는 작업도 있다면.
영화에서는 보통 배우가 이야기를 끌고 간다. 그림에서는 사람이 아닌 주인공도 더 많이 가능해 보인다. 가령 동물, 사물, 풍경,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추상적인 기호에 이르기까지, 범위가 아주 넓다. 선택이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경험한바, 그림 속 배우는 어떠한 의도로 선택되어 출현하기보단 하려는 이야기에 따라 자연스럽게 다가오며 결정되는 쪽에 가까운 것 같다. 남은 건 맞이하는 태도일 것이다.
처음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그림을 그렸다. 이제는 그림이 먼저 나타나 손짓하는 꼴이다, “알려줄게”하며. 나는 의심 없이, 그 목소리를 따라간다.
이야기로 되돌아가서, 한번 상상해 보고 싶다. 내가 영화감독이라면 나의 이야기를 가장 잘 보여줄 배우로 누굴 선택할까? 누굴 바랄까. 아직 아무도 되어보지 못한 사람을 세울 것이다. 자기 자신조차도 되어 보지 못한 사람. 그게 내가 찾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