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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A Jul 01. 2024

[그림/작업 에세이] 5. 여름, 작업

비가 그친 다음 날, 건물 옥상에 서서 바람을 맞았다. 전체적으로 시원했지만 바람 사이에 낀 뜨거운 공기가 문득문득 살을 건드렸다. 여름이 오고 있다.


여름을 생각하면 대표적인 이미지 두 개가 동시에 떠오른다. 하나는 초록 잎이 무성한 나무 사이에 서서 얇은 옷을 입고 이따금 부는 바람에 땀을 간신히 날려 보내는 계절, 다른 하나는 질식할 만한 더위에 정신을 차리려 애쓰지만, 빼앗기는 에너지를 체감하며 천천히 몸을 낮추는 계절. 싱그러움과 혹독함이라는 양면의 여름을 오가며, 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언젠가부터 가을과 겨울 즈음 새로운 작업을 발표하게 되면서, 여름이란 어느새 나를 잘 달래야 하는 계절이 되었다. a와 b 사이를 망설일 시간이 충분치 않으며, 즉각 즉각 최선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 바삐 움직이면서도 실수에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 그러니까, 정신을 차려야 한다. 


계속 ‘~해야 한다’는 어미를 반복해 말하게 하는 이 의무감은, 어느 시절엔 나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예정된 발표’라는 개념을 가질 수 없었던 때가 있었다. 불투명한 마감 기한을 스스로 만들어내며,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림을 그려내던 때가. 그때 찍은 작업 사진들을 보면 어떤 마음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오래 품을 마음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건 그저 무엇도 잘 몰랐다는 것과 미래를 상상할 수 없었다는 것, 그래서 두려움이 없었다는 사실 뿐.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만이 유효했다. 끝은 의미가 없었다. 기대를 계속했다.


이제 내게 없는, 모두 이별한 과거지만, 그때 배운 태도는 지금도 유익하다. 예를 들면 ‘작업에 들인 노력이나 간절함과 비례한 응답이 항상 있지는 않다’거나 ‘그래도 기대를 품을 대상은 언제나 하나 보다는 더 있다’와 같은 것들. 변한 가치관도 있다. ‘어떤 면에서 작품의 가치는, 성과와 관련이 없다’는 생각도 그 중 하나다.





반대 의견도 존중한다. 즉, 작품 가치는 성과와 무관하다는 이런 믿음은 허황되고 이상적이라는 말도, 일리가 있다. 한때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런 말들에 완전히 흥미를 잃었다. 예전엔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다. 연결된 시간에 치른 행위가 결말에서만 가치를 얻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여기는 것, 그건 타협과 인정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무래도 이러한 변화는 최근 진행하는 작업이 끼친 영향이라 짐작한다. 이번 작업은 특히 스타일적인 측면, 그림체에 관한 고민이 많았다. 기존 방식에서 만족할 수 없었고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이 날 재촉했다. 극단적으로, 왼손으로 그림을 그려보기도 했다. 능숙한 오른손의 움직임이 갑자기 거짓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식이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의심은 호기심을 원동력 삼아 다른 행위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종이를 잘라 보기도 하고, 거의 몇 년 만에 H연필을 쓰기도 하는 것처럼.


그러다 우연히 쓴 글 한 편에서 방향을 찾았다. 그리운 이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처음부터 수신인을 위해, 그를 생각하며 쓴 글은 아니었고 단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읽고 발견한 한 문장이 나의 ‘글쓰기 충동’을 불현듯 건드린 탓이었지만, 그렇게 써 내려간 글은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그림책 분위기와 그림체를 결정했다. 가지런한 선을 흔들고, 흑백 면적에 몇 가지 색을 초대했다. 흰색 종이를 미색으로 바꿨다. 결말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진실로, 이런 일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만들면 만들어지는 길을 걷고 싶었던 것 같다.


의미를 갖고 싶었던 것 같다. 무책임한 표현이 아닌지 쓰면서 고민한다, ‘의미를 갖는다’라. 그런데 정말로 갖고 싶을 수도 있지 않나, 그런 의미가 있지 않나, 간직하고픈 게. 작업과 삶 사이에서 어디로도 갈 길을 찾지 못하는 기분에서 벗어나, 이제는 오직 유능한 해석자가 필요할 뿐이라 여겨진다. 첫 번째로는, 자유한* 내가.


어떻게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걸까, 어떻게 하나씩 만들어갈 수 있는 걸까. 이만하면 지칠 때도 된 것 같은데 아예 멈춰지진 않는다. 이마를 답답하게 데우는 여름의 더운 바람은 날 멈추게 하기보단 부드럽게 밀어내곤 했다. 작년도, 재작년 여름도 똑같았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다만 새로운 작업이 얼굴을 드러낼 이번 가을과 겨울은 전과 다르길 바라고 있다. 이유는 나에게, 아주 깨끗한 자유를 주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원한 것을 이미 가졌다는 확신이 자연스럽기를, 좁은 마음으로 계산하고 재고 따지는 일에서, ‘현실 감각’이라는 가당찮은 말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를. 그저 날 아름답게 독촉할 여름의 끝에, 내가 바라는 한 가지가 달라져 있기만을.


*“자유롭다는 것은 바로, 의미를 갖고, 의미를 주고, 세계를 변화시키고, 타인을 위해서 거기 있는 것, 한마디로, 참으로 사는 것이다. 자유는, 선택의 조건이 많을수록 자유가 더 커진다는 의미에서의 선택의 기능이 아니다. 화가는 자신이 기관차 운전사나 도둑이 될 수도 있었음을 ‘알면', 그 몸짓 속에서 더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 화가는 자신의 붓과 자신의 마음이 자신에게 부과한 경계선을 넘어설 때 그 몸짓 속에서 더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미래에 대한 자기 분석적인 가리킴이다. 그리기의 몸짓 자체가 자유의 한 형식이다. 화가는 자유를 가진 것이 아니라, 자유 속에 있다. 그는 그리기의 몸짓 속에 있기 때문이다. 자유롭다는 것은 참으로 거기 있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빌렘플루서 <몸짓들>, 1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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