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신 정신과 전문의(박사)의 "당신이 옳다" 프로그램을 회사에서 접하기 전까지 내가 꽤나 심리와 정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불교식 명상을 꽤 오랫동안 해왔고, 직장 없이 마음 치유 여행 같은 걸 2년 정도 해보기도 했고.. 대중 심리학 서적에 대한 탐독, 그리고 교제하는 이성으로써 심리상담사를 만나보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회사에서 직원들의 복지를 위해 정혜신 박사의 "당신이 옳다" 프로그램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전문적인 정신과도 아니고 그렇다고 심리상담소도 아닌 모임을 통한 나눔이라는 형식에 꽤 회의적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정신과 의사가 만들었고, 전문가가 없이도 그 모임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수준의 공감능력과 "당신의 옳다" 방식의 대화법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임의 호스트가 될 수 있다는 정도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그럴 거면 차라리 정신과 의사를 만나는 게 낫지 않겠냐는 식의 생각이었다. 고백하건대 나는 전문가나 권위에 약하다.
나는 공감의 힘에 대해서 믿는다. 그걸 알기 때문에 늘 말하기보단 들어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들어주려 한다는 것. 이게 오늘의 주제이다. 2개월간의 이 모임이 끝나고 난 뒤에 알게 되었다. 사람의 이야기는 들어주는 게 아니라 들리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당신이 옳다" 프로그램에는 특별한 것은 없다. 그저 사람들의 이야기를 돌아가며 나누는 것인데, 중요한 것은 들어주는 방식이다. "당신의 옳다"라는 동명의 책의 앞쪽에 나오듯이, 충고나 조언, 평가나 판단을 하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가능하면 좀 더 물어봐주고 궁금해하고, 집중해주면 된다. 회사 직원들이긴 하지만 원래 알던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남의 이야기를 듣고 내 이야기를 한다는 생소한 경험을 하게 된다. 공감을 받기도 하고 공감을 하기도 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는 다름을 느끼기도 하며 마음속으로 평가를 내리거나 판단을 하기도 한다. 입 밖으로 좋은 말을 해주려고 하다가 의도치 않게 조언을 해버리기 도한다. 어떤 때에는 나의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며 위로하고 싶어지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온전히 나를 전달하지 못한 것 같다는 답답함을 느끼기도 한다. 사람에 따라서 조금씩 다른 느낌과 반응을 얻겠지만 8주라는 시간 동안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고 들으며 나의 내밀한 이야기는 전문가가 아닌 보통의 동료들에게 들려지고, 나는 그런 이야기들을 듣게 된다.
요컨대 이 모임은 모임의 구성이나 형식으로 보면 치료도 아니고, 치유도 아니다. 그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집중해주는 것이 전부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씩 지나며 내게 다른 새로운 습관들이 생겼다. 나는 모임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당신이 옳다"식의 대화를 하고 있었다. 조언을 쉽사리 하지 않았고, 상대방이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의 사례를 들려주려고 하지 않았고, '잘 될 거야' 식의 짧은 평가도 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왜 그렇게 생각했었는지, 그때 그는 어떤 기분이었는지를 궁금해했다. 그가 느꼈을 어떤 감정들도 그가 더 이야기했으면 했다. 그건 도와주려는 마음, 들어주려는 마음은 절대 아니었다. 그 대화가 조금 더 자연스러웠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어떤 이야기는 해서 안되고, 어떤 생각들은 위험하기 때문에 자신의 안으로 사그라들지 않았으면 했다. 우리의 일상 대화에서는 나오지 않고 묻히는 이야기가 훨씬 많을 것이라는 걸 나는 그 모임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우리가, 그리고 내가 그 모임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용기 내어 말했듯이 말이다.
나는 내가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타인의 표현들을 빌리자면 "까다로운 녀석"이다.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대학시절까지는 소위 몇몇 사람으로부터 꽤 속물적이고 단순하며 별 생각이 없이 성공을 쫓는 것 같은 그런 이미지를 주었던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취향이라는 것은 유행이었고, 감정은 주로 소유욕이었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 이런 개인적인 경험 때문인지 모르지만 나는 무난함과 까다로움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무난한 사람들은 다소 단순하고 속물적이고, 까다로운 사람들은 예술적이거나 뭔가 숨기고 싶은 트라우마가 있을 거다라는 식으로...
그래서 사실 전문가가 아닌 보통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게 된 것 같다. 나만의 고해소가 필요했다. 그리고 언젠가 이 고해소에서 나의 이상한 생각들을 모두 토해내고 나면 다시 보통의 세상으로, 과거의 좀 무던하고 단순한 모습으로 돌아가리라고 맹세를 했다. 나의 생각들과 경험 들이라는 건 숨기고 싶은 모습이었다. 혹은 그저 독특함이라는 이유로 가십으로 남을만한 흥밋거리이거나. 보통의 동료들 앞에서 이런 생각을 꺼내보는 게 가능했던 건, 우리는 밖에서 상대방 이야기를 이야깃거리로 하지 않을 거란 걸 약속했기 때문이다. 내 이야기는 진지해야만 했고, 진짜였고 그래서 나의 이야기는 들려졌다. 내가 생각했던 모든 것은 사실 이상한 이야기일 수가 없었다. 나는 애초에 이상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렇게 믿어보기로 했다. 나는 보통의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이고 나의 생각과 행동과 의지들은 소중하다. 정확히 말하면 이유가 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순간부터는 나를 판단하지도 않는 것이었다. 나는 이상과 정상의 이분법이 아니라 그냥 생각하고 느끼고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였다. 때로 어떤 사람들로부터 어떠한 평가를 받게 되더라도 그건 그들의 잘못일 뿐이다. 습관적으로 늘 판단을 내려야만 했던 사람들의 잘못.
모임을 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점점 판단과 평가를 하지 않게 된 것 같다.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아마도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좀 더 공감할 수 있는 배경이 많이 생겨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사람은 단편적이지 않고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입체적이라는 걸 느꼈는데 그건 나 자신이 얼마나 입체적인 사람인지를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 같다. 물론 그 과정에서 최대한 실수를 줄이기 위해 조언이나 평가도 하지 않으려다 보니 말 수가 줄어들기도 했다. 어떤 때에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침묵이 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조급해하거나 노력하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냥 충고.조언.평가.판단을 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지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그러는 동안 나는 대화훈련을 자연스럽게 했던 것 같다. 우리의 모임이 마지막으로 갈수록 존재에 대한 긍정이라는 말이 더 가깝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인간의 정서적인 생존을 위한 최소 단위는 두 사람이라는 말도 긍정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게 아니었다. 나는 들어주는 입장에서 자비를 배푸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와 생각과 존재가 들리고 있었다. 이야기는 말이 아니라, 존재가 된다.
모든 이야기와 인정은 결국 보통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정신과 의사나, 상담 선생님이나, 고해소 신부나, 뒷골목의 토크바나, 익명의 게시판 같은 곳이 아니라 그냥 당신의 앞에 있는 어떤 사람으로부터 여야 한다(아주 극단적인 고통이나 병에서는 그런 도움이 필요한 건 사실인 것 같다). 왜냐면 나의 이야기들이 누군가로부터 인정받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는 도저히 이것으로부터 극복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정받을 수 없다는 생각 자체가 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걸 바꿔줄 수 있는 것은 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보통 사람. 보다 정확하게는 나의 친구, 나의 가족, 나의 동료들이지 않을까. 그들은 바로 나를 비추는 거울들이니깐.
이것이 나의 "당신이 옳다" 모임의 힘에 대한 이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