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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림 Sep 28. 2022

네 우울한 날들에게

내 우울한 날들에게, 마이클 킴볼

나는 우울증이라는 걸 이보다 잘 설명한 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 단순히 우울증을 잘 기술한 책이라면 도서관이며 서점의 베스트셀러 중 아무거나 집어서 읽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의 마음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책은 감히 이 책이 제일일 거라고 말할 수 있다.


내 우울한 날들에게는 어릴 적부터 우울증을 앓았던 조너선의 이야기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읽는 시점에서 주인공인 조너선은 이미  사람다. 책은 조너선의 동생인 로버트가 조너선이 쓴 편지와 주변 사람들과의 인터뷰 등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했다는 설정이다. 덕분에 내용은 굉장히 쉽게 읽히는 편이지만 그 안에 든 감정은 쉬이 삼키기 어렵다. 조너선이 비록 가상의 인물이라 해도 이토록 선명한 우울을 삼키는 게 쉽다면 그건 그 나름대로 문제가 있는 것일 테다.


더 이상 기억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아요. 마치 내 몸이 작은 조각들로 쪼개지고 그중 몇 조각이 떨어져 나간 듯한 느낌이 듭니다.

책은 저 문장이 적힌 조너선의 마지막 편지로 시작한다. 편지에는 조너선이 살면서 만났던 이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고스란히 적혀있다. 언뜻 보기에는 그저 죽기 전 추억을 회상하는 편지일 뿐이지만, 편지의 문단 사이에 비치는 그의 우울 자꾸만 시선을 멈추게 했다. 그래서 이 책은 읽는 내내 공백이 참 아팠다.


나는 제법 오래도록 우울을 품고 살아왔지만, 저 문장처럼 지독하게 우울을 앓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랬기에 내 몸의 몇 조각이 떨어졌단 저 문장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이제 겨우 책의 시작일 뿐인데 도저히 다음을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언젠가 내가 썼던 글 중 하루하루 사는 게 젠가를 하는 것 같다고 적은 것이 있다. 멍한 하루에 안 좋은 감정들이 켜켜이 쌓이다 보면 어느새 머리가 불쾌한 것들로 가득 차 쪼개질 것 같은 순간이 온다. 그러고 나면 꼭 단단히 쌓은 젠가에서 나무토막 하나를 빼내듯 내 몸에서 뭔가 빠져나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렇게 하나둘씩 빠져나가 흩어지다 종국엔 뼈대만 남은 젠가가 쓰러지듯 나도 무너질 거라고 적었던 글이다.


조너선은 그런 기분이 들 때마다 제 몸이 쪼개져 흩어지지 않도록 몸을 웅크렸지만, 나는 같은 느낌을 받았음에도 그것들을 붙잡으려 애쓰지 않았다. 없어지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어차피 무너질 탑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쓰러져 박살 나 버렸으면 했다.


조너선과 내 생각 중 어떤 게 더 나은 것이었는지는 모른다. 그저 확실한 건, 우울을 앓고 있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저 문장에 공감했다는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우울증을 가장 잘 풀어낸 책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책 속의 우울은 조너선의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누군가의 우울이다.     


나를 붙잡아주는 것은 오로지 내 과거밖에 없으니까요.


앞선 문장과 같은 편지에 적힌 말이었다. 조너선은 미래에 기대할 게 없었다. 조너선을 붙잡던 과거는 분명 의미 있는 것들이었을 테다. 안 좋았던 과거는 조너선을 한없이 끌어내렸을 테고, 좋았던 것들은 잠시라도 기분을 띄워줬을 테다. 분명 좋은 기억과 나쁜 과거는 함께 있었을 테지만 문제는 거기에 우울을 얹는 순간 둘의 값이 달라진다는 거다. 자신을 때리던 아빠는 긴 꼬리를 질질 끄는 기억이 되고, 교정기와 멋진 옷을 받아 행복했던 추억은 바람에 날리는 풍선처럼 찰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백일몽이 된다. 백일몽만 이어 꾸려 해도 기억은 언젠가 동이 난다. 그리고 조너선에겐 더는 자신을 붙잡을 거를 만들 힘이 없었.


조너선의 마지막 편지 이후 책은 조너선이 태어난 해로 돌아간다. 조너선은 원치 않는 임신으로 태어난 아이였다. 그래서인지 조너선의 아버지인 토머스는 조너선을 좋아하지 않았다. 토머스에게 조너선은 어딘지 이상한 아이였고, 조너선에게 토머스는 폭력적인 아빠였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조너선의 엄마인 앨리스는 아이를 잘 챙겨주었단 거다. 아빠의 폭력으로부터 조너선을 숨겨주고자 했고, 조너선 때문에 힘든 순간들이 와도 아이를 챙겨주고자 했다. 하지만 앨리스의 노력폭력적인 아빠를 둔 가정을 지키기엔 역부족이었다. 폭력은 으레 그렇듯 앨리스를 피해가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을 보고 자란 조너선은 어린 시절,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것처럼 다정하게 식사하는 이웃집부러워했다. 서로 접시를 돌려가며 음식을 먹고 웃으며 대화하는 더없이 평범한 가정. 망가진 가정은 그런 별 것도 아닌 그림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조너선은 학교에 입학하는 것과 동시에 정신병원에 다니게 다. 조너선은 치아를 교정하고, 새 옷을 사 입 등 꾸민 자신의 모습 흐뭇해하며 제법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듯 보다. 성인이 된 후엔 아빠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집에서 먼 대학을 갔고, 그곳에서 꿈과 직업 찾고 연애도 하게 된다. 하지만 조너선의 우울증이 없어진 건 아니었다. 그저 시간을 따라 어떻게든 삶을 살았기에 괜찮은 사람인 척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했을 뿐이었다.


조너선은 대부분 그렇듯 우울뿐만 아니라 불안증세도 같이 가지고 있었다. 조너선의 연인들은 다른 이들보다 조너선을 가까이했기에 이를 느낄 수 있었고, 그들은 모두 조너선의 정신병을 견디지 못하고 떠나갔다. 이는 조너선과 결혼까지 했던 사라도 마찬가지였다. 조너선은 제 곁에서 사람들이 떠나갈 때마다 점점 더 깊은 우울 속으로 빠져들었다.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고, 또 그렇게 되면 몸을 움직이거나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힘겨워진다고. 환자 JTB는 "아무도 나를 보지 못하도록 담요를 뒤집어쓰고 있고 싶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지금의 나 자신이 싫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조너선은 삶의 끝에서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하기까지에 이른다. 그 무렵의 조너선은 이불 밖으로 나오는 게 너무나 힘들다던 우울증 환자들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소름 끼치도록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싫지만, 다른 사람이 되고 싶진 않다던 조너선의 말은 내가 수십 번 글로 적었던 문장이었다.


이 책을 읽을 무렵 나는 내가 우울한 것은 알았어도 언제든 벗어날 수 있는 가벼운 정도라고 믿었다. 하루의 절반이 넘는 시간을 잠으로 보내거나 눈을 뜨고 있음에도 이불을 걷어내지 못했음에도 그렇다고 믿었다. 그래서 알았다. 조너선의 우울은 특별한 게 아니었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병이었다. 우울증이 마음의 감기라던 말은 흘려들을 게 아니다. 그건 진짜 감기다. 환절기마다 가볍게 앓다가, 체력이 떨어지면 한 해의 절반을 내리 약을 먹어도 낫지 못할 감기다.     


약을 끊지 않고 계속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조그만 알약들이 내 잘못된 곳을 고쳐주거나 나를 살릴 수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더군요. 약은 정말이지 너무나 작았거든요.

약이 너무나 작다는 말이 그렇게 안쓰러울 수가 없었다. 단순히 보면 너무 작은 약은 자신의 커다란 우울을 감당할 수 없다는 이야기일 거다. 하지만 나는 그게 조너선 자신조차도  우울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이 문장 이후로 내가 넘길 책장이 얼마 남지 않았었다. 직감적으로 느껴지던 이야기의 끝이 얇아진 책의 두께로 손끝에 닿았다. 그래서 저 문장이 더 안타까웠는지도 모르겠다. 이 이야기의 끝은 조너선의 자살이니까.


조너선은 죽기 직전,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며 편지를 쓰고, 유언장을 남다. 책을 엮은 로버트는 형이 남긴 그 편지들을 읽고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조너선의 기록에 남은 가족의 모습은 로버트가 기억하는 것과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로버트는 두 부모가 아이를 갖길 원해서 낳았고, 조너선과 달리 아빠의 사랑을 받으며 길러졌으며, 그랬기에 조너선과 같은 집에서 다른 삶을 살았다. 더군다나 로버트는 어릴 적부터 조너선을 엉뚱하고 사회성 없는 형으로 생각해 멀리했다. 로버트가 조너선의 쓸쓸함이나 괴로움 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의 삶을 살아가기에 함께 있면서도 서로 다른 것을 느끼는 게 당연하다. 그렇기에 로버트는 평생 조너선의 우울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잠시 같은 집에 살았을 뿐이지 남이나 다름 없는 형을 어떻게 이해하겠나. 단순히 벌어진 일들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버거울텐데.


글을 마무리 지으려니 문득, 로버트가 조너선이 죽기 전에 그를 이해하고자 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조너선이 죽기 전에 그랬더라면, 이야기가 재미없는 해피엔딩으로 끝나긴 했겠지. 이게 다 헛된 생각이란 건 알고 있다. 조너선이 죽지 않았다면 로버트가 형을 알아보겠다고 나서는 일은 없었을 거다. 그럼에도 누군가 죽어버리기 전에 '어딘지 이상한 사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자 했다면 그 끝은 훨씬 좋았을 거란 막연한 희망이 못내 아쉬워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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