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벌린의 <고슴도치와 여우> 리뷰
여우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큰 것 한 가지를 알고 있다. 고대 그리스 극작가인 아르킬로코스의 말입니다. 미국의 정치사상가 이사야 벌린은 이 말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사상가들이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을 두 가지로 분류해봅니다. 하나는 역사의 흐름 전체를 포괄하는 법칙이 있다고 주장하는 쪽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란 단지 사람들 각자의 행동의 총합일 뿐이라고 이해하는 쪽입니다. 앞쪽이 고슴도치 타입, 뒤쪽이 여우 타입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청취자 여러분은 어느 쪽인가요?
벌린은 이 관점으로 톨스토이의 소설을 분석합니다. 철학자도 사상가도 아닌, 소설가인 톨스토이를? 하지만 벌린의 관점에서 톨스토이는 소설이라는 수단으로 철학과 사상을 펼쳐 보인 사람입니다. 또 이 점에서 다른 사상가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면모를 선보이는데, 바로 톨스토이는 고슴도치도 아니고 여우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벌린이 톨스토이의 어떤 부분에 주목한 것인지, 고슴도치와 여우에서 확인하시죠.
이 책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면서 동시에 톨스토이의 소설에 대한 비평이기도 합니다. 의도했든 그러지 않았든, 벌린은 톨스토이의 소설이 역사의 본질에 관한 특정한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톨스토이의 소설과 논설을 분석해 들어갑니다.
만약 소설이라는 수단을 톨스토이가 의도적으로 채택했다면, 이 선택은 톨스토이가 역사의 본질을 드러내는 데 ‘구체적 이야기’가 가장 적합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그 사건에 얽힌 사람들은 어떤 선택과 행동을 했는지, 그 선택과 행동을 감행한 내적 동기는 무엇인지. 한 사람의 삶에 대한 구체적 이야기는 고유하다는 특성을 띱니다. 청취자 여러분과 제 삶이 다르고, 매일 아침 같은 직장에 출근하면서도 모두의 출근 이유가 다르고 각자 서 있는 자리가 다르듯, 단 하나뿐인 각자의 삶은 고유합니다. 그 삶 속에선 옳고 그른 것과 무관하게 각자의 판단이 자리 잡고 있고, 톨스토이는 그 흐름에 대한 관찰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낱낱이 적어 내려 갑니다. 이것이 톨스토이가 ‘여우’로서 갖는 특성입니다.
하지만 이런 고유한 삶이 개인으로선 통제불가능한 갖가지 조건에 의해 규정되기도 한다는 점은, 삶을 면밀하게 관찰하는 사람의 눈에는 쉽게 드러납니다. 우리가 흔히 ‘역사의 흐름’이라고 이름 붙이는 어떤 것이죠. 다만 누가 그런 것을 만들어내는지, 누가 그런 흐름의 창조와 변화를 주도하는지 우리 눈에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든 일이 다 벌어지고 마무리된 뒤 우리와 우리의 이웃과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되돌아보면, 우리 모두의 행동이 모여 그런 흐름을 만들어왔다는 점을 깨닫습니다. 더 나가면 애초에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행동을 할 수도 없는 존재라는 자각도 얻죠. 역사에 대해 이런 감각을 갖는 것은 톨스토이가 지닌 고슴도치로서의 면모입니다.
어떤 사상가들은 과학적 작업을 통해 이런 역사의 흐름을 알 수 있고, 자신이 그걸 알아냈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 책이 ‘고슴도치’라는 단어로 가리키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이런 경향을 거부합니다. 마치 원자나 분자를 연구하듯 인간을 관찰하는 관점은 인간의 고유성이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를 지워버리고, 마치 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 ‘흐름’에 맞지 않는 고유성을 폐기해버린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고방식에서 그가 주장하는 ‘시골 농부의 소박함’의 소중함이 등장합니다. 세상을 설명해준다고 자처하는 온갖 지식은 오히려 지혜를 방해하는 요소가 될 뿐이므로, 오히려 그런 불필요한 요소를 떨궈버리는 게 세상을 통찰하는 힘을 갖는 방법이라는 게 톨스토이의 입장입니다. 이것이 톨스토이가 거부했던 고슴도치의 면모입니다.
흔히들 요즘이 역사의 격변기라고 합니다.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많은 것이 바뀌고 있으니까요. 이럴 때에 톨스토이의 소설과 글 속에서, 이것을 비평하는 이사야 벌린의 비평에서, 각자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을 찾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함께 추천드리는 책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입니다. 뭐, 말이 필요 없는 고전이죠. 오늘 다룬 책은 장르를 구별하자면 ‘비평’인데, 무엇을 비평하는지 알아야 그 의미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톨스토이의 대표작이면서 동시에 <고슴도치와 여우>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작품을 같이 함께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학기 개학 직전인 이런 때에, 학기 시작하면 읽고 싶어도 읽을 수 없는 이런 장편 고전 딱 읽고 들어가는 것도 좋은 시도 아닐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