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기업에서 회사 생활을 처음 시작했기 때문에 규모가 큰 조직 구조에 익숙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혹자는 흔히 대기업은 사람을 언제든 갈아 끼울 수 있는 부품처럼 여긴다고 말한다. (경험상으로는 크게 동의하진 않는다.) 하지만 언제든 갈아 끼울 수 있다는 것에는 공감한다. 그렇기 때문에 꼭 필요한 사람일까 라는 질문에 아니라고 답한 것이다.
누구나 나를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너무 쉬운 일을 해서 그렇게 생각한 걸까? 그럴 수도 있지만, 반대로 다른 사람이 갑자기 사라져도 내가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건방진 소리로 들리겠지만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자주 업무 환경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회사에서 잘리지 않았고 업무는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자의 반 타의 반이었던 것 같은데 새로운 프로젝트에 참여 의사가 있는지 물어보면 거의 대부분 수락했다. 돌이켜 보면 좋은 기회였던 것 같다. 덕분에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었다.
새로운 업무를 맡게 되면 당연히 쉽지 않다. 새로운 구조, 생소한 코드... 최소 한두 달은 적응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심하다. 힘들지만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나를 대체하는 것도, 내가 누군가를 대체하는 것도 힘든 일이겠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같은 직군 혹은 비슷한 업무 내에서 유효한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도 내가 겪어보지 못한 수준의 영역이라면 또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핵심 인재가 담당하는 업무라든가.
모든 회사가 그렇진 않겠지만 핵심 인재를 선별하고 관리하는 조직이 있다. 핵심 인재라는 사람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진 모른다. 물론 역량 기준이 케바케일 것이다. 압도적인 개발 실력, 문제 해결력 또는 모든 히스토리를 알고 있는 것 등.
하지만 누가 봐도 그럴만하다고 인정할 만큼 뛰어난 역량을 가졌거나 그 사람을 잃는 것이 조직에 손해일만큼 열정적으로 일하는 사람일 거라 생각한다.
일단 나는 핵심 인재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실제 본인이 핵심 인재라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도 없기 때문에 정확히 어떤 업무를 어느 수준까지 하는지 모르겠다. 그런 사람들은 제외하고 (어쩌면 포함해서) 누군가 갑자기 회사를 떠난다고 해도 회사는 여전히 잘 굴러갈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규모가 큰 조직일수록 더욱 그렇다. 담당 업무가 회사의 존폐를 결정할 만큼 큰 단위가 아닐 것이고 백업 인원이 있을 가능성도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형태가 건강한 조직 구조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중요한 일이 몰려 있다면 그건 개인에게나 회사에게나 손해라고 생각한다.
물론 정말 작은 조직이고 한 명이 전반적인 업무를 리드하는 구조라면 그 한 명의 이탈이 조직을 와해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경우는 큰 기업의 오너 리스크와 비슷한 경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자,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와 보자.
나는 이 조직에 필요한 사람일까?
이 질문에 아니라고 답하는 것은 너무 슬픈 일이다. '꼭 필요하지 않을 순 있지...'라는 정신 승리도 할 수 없다. 그냥 필요 없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난 어쩌면 이 조직에 필요 없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다른 누군가가 나를 대체한다면 나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누군가 나를 단순히 대체할 수 있다는 수준을 넘어서는 문제다.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할 수는 있겠지가 아닌 나보다 더 잘하는 것이니까. 그것은 곧 내가 폐를 끼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당장 지금 조직에서 내가 누군가를 대체하게 된다면 나는 그 사람보다 더 잘할 자신이 없다. 그저 어떻게든 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프로그래밍을 할 때는 극단적이지 않은 이상 코드 품질이 좋든 나쁘든 요구사항을 만족하도록 구현하면 일단 제품 자체의 동작에 당장 큰 문제가 없다. 뭐 어찌 되었든 간에 요구사항 만족이라는 지표가 있고 릴리즈라는 명확한 결과가 있다.
하지만 프로그래밍 교육은 다르다. 여러 사람의 소중한 시간을 점유하고 있는데 그 시간이 좀 더 의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많이 알고, 더 잘 전달하고, 더 깊이 공감하는 교육자라면 아마 수강생에게 양질의 교육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명확한 지표가 없기 때문에 더더욱 나를 대체할 수 있는, 아니 나보다 더 좋은 교육자가 있을 것 같다. (아니 이건 자명하다.) 그런 사람이 대신하는 것이 수강생에게도 여러모로 이득일 것이다.
또한 동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서로에게 배울 점이 있는 동료가 이상적이지 않겠는가. 지금 동료들에게 나는 (이런 표현은 참 싫지만 와닿게 말하기 위해 빌리자면) 비슷한 급의 동료가 아니다. 너무 부족한 사람이다. 그들처럼 훌륭한 사람으로 내 자리를 채우는 것이 동료에게나 수강생에게나 좋은 것이 아닐까?
내가 갑자기 사라지면 남은 동료들이 잠시 힘들 순 있겠지만 결국 나를 대체할 것이고, 그것을 넘어서 더 잘할 것이기 때문에 더 나은 환경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내가 이렇게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여러 사람에게 민폐가 아닐까?
이런 생각은 정말 잠시 불현듯 스쳐 지나간 생각이다. 일단 참 못난 생각이다. 지금의 동료들은 내가 이런 못난 생각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분명히 내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없도록 단단하게 잡아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 신뢰감이 있다. (아.. 아닌가? ^^;)
이런 믿음 때문에 괜히 혼자서 떨어뜨리고 있던 자존감도 어느 순간 떨어지길 멈춘다. 그리고 나도 그런 사람이 되면 되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면 나 자신을 채찍질하게 되고 스스로 노력하게 된다. 물론 그 과정은 힘들겠지만 (이번에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를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셈이니 완전 럭키비키잖아?
처음에는 부족한 것 자체가 이 조직에서 나의 존재 이유가 된다고 생각했다. 우다닥 달려 나가는 사람들에게 브레이크를 밟도록 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미명 아래에서 말이다. 물론 그건 지금도 유효하다. 그리고 나는 나대로 뭔가 장점이 있겠지라는 막연한 생각도 쭉 이어오고 있다.
무엇보다 요즘은, 느리지만 조금씩, 확실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느낀다. 나아가야 된다고 생각에만 그쳤던 것이 동료 압박을 통해 좀 더 행동으로 옮길 수 있었던 것 같다. (동료 압박이란 말은 동료 믿음, 동료 지지라고 바꿔 부르고 싶다.)
나도 꼭 동료의 성장에 기여하고 싶다. 그게 어떤 방식일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방식이야 어떻든 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또는 나만의 방식으로, 언젠가는 반드시말이다.
또한 더 좋은 교육자가 되기 위한 노력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의 나는 분명 조금이라도 더 나아져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