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키르케>를 읽고
왜 하필 신을 소재로 삼았을까?
나는 아이가 팔을 날개처럼 구부리고, 자기 동작과 사랑에 빠진 어리고 튼튼한 다리를 움직이며 춤을 추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인간들은 이런 식으로 명성을 쌓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력과 끈기를 통해, 태양 아래에서 빛날 때까지 정원을 가꾸듯 기술을 연마해가며.
하지만 신들은 이코르와 넥타르의 산물이라 탁월함이 이미 손끝에서 터져 나왔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파괴할 수 있는지를 입증하며 명성을 쌓았다. 도시를 무너뜨리고 전쟁을 일으키고 역병과 괴물을 낳고. 우리의 재단에서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그 모든 연기와 향기. 남는 건 재 가루뿐이었다.
<키르케>, 매들린 밀러, 176쪽
'남성주의적 세계에서 여성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가?' 질문을 던지는 소설
“맞아,” 그녀(파시파에)가 말했다.
“너는 나랑 달라. 너는 아버지를 닮아서 어리석은 주제에 고고한 척하고 뭐든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으면 눈을 감아버리지. 대답해 봐, 내가 괴물과 독약을 만들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미노스는 왕비를 원하지 않아. 병 안에 갇혀서 죽을 때까지 헤벌쭉 헤벌쭉 새끼를 낳아대는 해파리라면 모를까. 나를 영원히 쇠사슬에 묶으면 속이 후련할 테고 자기 아버지한테 말만 하면 그럴 수 있어. 하지만 그러지 않지. 그전에 내가 자기한테 어떻게 할지 알거든.”
<키르케>, 매들린 밀러, 192쪽
어머니로서의 키르케
아이의 숨소리가 길게 늘어지고 팔다리에서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너는 왜 좀 더 평온해지지 못하니?” 나는 속삭였다.
"왜 이렇게 힘들어야 하니?”
대답하듯 아버지의 신전이 내 눈앞에 떠올랐다.
(중략)
나는 꼼짝 않고 조용히 누워 있었지만 내 안에서 떠날 줄 몰랐던 탐욕스러운 허기가 기억났다. 아버지의 무릎 위로 기어가고 싶었고, 일어나서 달리며 소리를 지르고 싶었고, 체커판 위의 말을 집어서 벽으로 던지고 싶었다.
(중략)
이 아이는 평온해져야 할 이유가 없었다. 나도 그런 적 없었고, 내가 아는 이 아이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키르케>, 매들린 밀러, 332쪽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에요.” 아이가 말했다. “제가 어머니처럼 마법에 소질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죠.”
아버지가 생각났다. 그 옛날에 신전의 벽난로에 든 장작을 태워서 잿더미로 만들며 아버지가 말했다. 이게 나의 가장 간단한 능력이다.
“너는 마법에 소질이 없을 가능성이 크지.” 내가 말했다.
“하지만 다른 데 소질이 있을 거야. 네가 아직 찾지 못했을 뿐. 그래서 네가 떠나는 것이기도 하지.”
아이의 미소를 보고 나는 여름 풀밭처럼 따뜻했던 아리아드네의 미소를 떠올렸다.
“맞아요.” 아이가 말했다.
<키르케>, 매들린 밀러, 355쪽
오디세우스에 대한 재해석
“아버지 입장에서 끔찍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는 뜻이죠.
애초에 부하들이 그 동굴로 가게 된 이유가 뭐였습니까? 아버지가 더 많은 보물에 욕심을 냈기 때문이죠. 그리고 모두가 불쌍히 여길 만큼 포세이돈의 노여움을 사게 된 것도 다 자초한 일이었잖습니까. 키클롭스에게 생색을 내지 않고 떠날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중략)
“그 오랜 세월 동안 고생하며 방랑한 건. 왜였을까요? 한순간의 자부심이죠. 아버지는 아무도 아닌 존재로 지내느니 신들에게 저주받는 쪽을 택했을 겁니다.”
(중략)
“아버지는 저희와 집이 그리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지만 거짓말이었어요. 이타케에 돌아온 뒤로는 만족을 모르고 항상 수평선만 바라보셨으니 말이죠. 일단 우리를 손에 넣고 나니까 다른 걸 갖고 싶으셨던 거예요.”
<키르케>, 매들린 밀러, 416쪽
명작은 역시 엔딩이 남다르다.
하늘에서 별자리가 어둑어둑해지고 자리를 바꾼다. 바닷속으로 추락하기 직전의 마지막 햇살처럼 신의 광휘가 내 안에서 빛을 발한다. 예전에는 신이 죽음의 반대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 무엇보다 죽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바뀌지도 않고, 손에 쥘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나는 평생 전진한 끝에 지금 이 자리에 왔다. 인간의 목소리를 가졌으니 그 나머지까지 가져보자. 나는 찰랑거리는 사발을 입술에 대고 마신다.
<키르케>, 매들린 밀러, 500쪽
아름다운 문장과 복선을 회수하는 플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