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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묘 Jun 09. 2019

여행의 이유, 여행자의 자세

[틈 사이에서 발견한 행복한 날의 허술한 기록] 인천공항 그리고 상공

어둠이 빛의 부재라면
여행은 일상의 부재다

풀리지 않는 난제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을때
소란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홀로 고요하고 싶을 때
예기치 못한 마주침과 깨달음이
절실히 느껴질 때

그리하여 매 순간
우리는 여행을 소망한다

- 여행의 이유, 김영하


어제 아침 급 티켓팅을 하고
어제저녁 대화의희열 김영하작가편을 보고
그의 산문집 여행의 이유를 들고
인천공항 108 게이트에 앉아 있으면
꽤 개연성 있는 기승전결 아닌가?!




생각해보니 공항으로 향하는 마음이 다르다.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공항버스 좌석에 앉아 창 밖을 보니 영종도로 향하는 다리를 건넌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자니 공항으로 향하는 이 마음이 나도 처음 느끼는 감정이라 조금 이상했다. 그리고 이내 공항으로 향하던 과거의 나의 마음을 떠올려봤다.

#힘겨운 여정의 시작, 비즈니스 트립
여행을 너무나도 좋아하는 나지만 앞에 비즈니스가 붙으면 달라진다. 트립은 트립이나 비즈니스 트립.(아! 비즈니스 좌석이나 퍼스트 클래스 좌석은 좀 다른 이야기겠군.) 해외 출장을 즐기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나는 출장 가기 전부터 피곤하다. 출장 전 준비할 것도 많고 짧은 일정 동안 소화해야 할 일들이 진짜 많다. 맡았던 업무의 특성상 회사에서 해외로 출장을 내 보낸다는 건 중요한 의사결정을 위해 먼저 살펴보고 사업을 해야 하는 이유 혹은 사업을 잘하기 위한 방법을 찾고 의사결정을 위한 단초를 만들어오는 임무가 대부분이었다. 그 과정상에 있는 작은 의사결정은 스스로가 책임을 지고 모두 뿐지르고 와야 한다. 대부분의 출장이 그러했다. 그러니 막중한 책임감과 처리해야 할 방대한 일들과 보고서까지 생각하면 죽으러 가는 건 아니지만 마치 도살장 끌려가는 소와 같달까?(심지어 난 일복 많기로 둘째가라면 서운한 소띠다.)

아침일찍부터 저녁까지 이어지는 살인적인 스케줄에 쉬는 시간이나 관광은 사치다. 누군가는 그래도 하루정도 짬 내서 어디를 둘러봤다더라 하는 이야기를 들었었지만 내가 다녔던 출장은 그런 경우가 한 번도 없었다. 식품회사에서 글로벌 진출을 위해 가는 출장이니만큼 밥 먹으러 다니는 것 역시 내게는 일이었다. 그곳의 식문화가 어떠한지 어떤 음식을 먹고 소비하는지 살피고 가정에 방문하고 모여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하는 게 나의 일이었다. 사람을 만나고 관찰하고 그 나라 사람과 그 나라를 알아간다는 것은 꽤 재미있는 일이지만 온종일 긴장감 있는 상태로 주말 없이 일하는 것은 곤욕이다.

2018년 연초부터 근 반년을 오가며 몇 주 동안 중국 사무실에 처박혀 입맛에 맛지 않은 음식들을 먹고 밤새 보고서 작성을 할 때도 그랬다. 오랜 기간 머물다 보니 8차선 16차선 넓디넓은 대륙의 도로에서도 파란불 빨간불 신호를 무시하고 건너는 중국인들과 하나가 되어갔다. 그러다 보면 차보다는 오토바이나 자전거 때문에 오는 위험한 순간이 더러 있다. 그럴 때 팀 동료가 잡아주고 챙겨줘서 그 순간을 모면할 때가 있었는데 얼마나 그 생활이 힘들었었는지 서로 장난반 진담반 심각하기 그지없는 이야기를 웃으며 했다.
"보고 전까지 다 같이 뭐 잘못 먹고 배탈로 누워있을까?"
"왜 왜 잡았어~ 팔만 살짝만 다치자. 그럼 보고서 안 쓰고 누워 있을 수 있는 거 아니야? 발은 불편하니까 오른손 살짝?"
이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인가. 장난처럼 웃으며 그런 이야기가 오갔다. 실제 벌어지면 안 될 일을 이야기했다.(논외로 그 해 그 프로젝트가 마무리되고 한국에 돌아와 외부 미팅 가던 중 광화문 사거리 횡단보도를 건너다 밤에 바닥에서 나오는 조명에 발목이 걸려 넘어졌고, 발목이 파열되어 전치 8주. 통깁스를 하고 3주를 집에 있었다. 말의 힘은 무섭다. 말이 씨되니 이쁜 말만 하자.)

#일상 중 떠나는 일탈, 리얼 마이 트립
일상 중 떠나는 여행은 해방감이다. 잠시 지긋지긋한 업무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 잠시 일탈했을 때의 희열. 그리고 새로운 곳에 대한 기대와 여행지에서 벌어질 예상 못할 일들에 대한 설렘까지. 몽글몽글하고 뭉실뭉실한 느낌인데 현실감 있게 표현해보면 쿠션감 엄청 좋은 고급 침대에 몸을 던져 뉘이고 대자로 누워 팔다리 휘젓는 느낌이라면 알 수 있으려나.

그러다 작은 에피소드 하나 생기면 몇 년을 두고두고 우려먹는다. 퇴사를 했다고 커밍아웃하니 다들 여행 가냐고 묻더라. 퇴사 후 여행이 무슨 공식인 양 이야기하지만 별생각 없다고 말했었다. 회사에 다닐 때도 한 달 걸려 한 달 해외 건 국내 건 쏘다녔으니 그것에 대한 갈증이 없다. 나라는 키워드에 여행이 빠질 리 만무하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종종 여행지 추천을 해달라거나 어디가 가장 좋았었냐고 묻는다. 그럴 때마다 내가 하는 답은 거의 정해져 있다.
"내게 여행은 어디로 가느냐보다 누구랑 가는지가 중요해"
혼자 훌쩍 떠나기도 해보고 친구들과 시끌벅쩍 다니기도 했던 내가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의 장면은 유명지 삐까번적한 랜드마크 앞에 서서 브이자를 그리고 어색하게 서 있는 내가 아니다. 장소가 어디였는지 보다 깔깔깔 웃고 떠들던 여행 메이트들과 나누었던 대화와 행동이 떠오른다. 그 깔깔거리고 춤추던 장소가 어떤 나라 어느 장소였다. 그 웃음소리와 함께 그 날의 바람, 햇빛, 공기와 냄새에 대한 기억만 가득할 뿐이다.

#상황에 따라 너무도 다른 여행의 자세
상황에 따라 마음가짐이 이리도 다르다. 공항 가는 길은 항상 공항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타거나(일산에 살다 보니 공항이랑 퍽 가깝지만 김포공항은 귀찮아서, 인천공항은 이따금 지각할 때가 있어서 통행료에 택시비까지 거금을 주고 왕왕 타고 다녔다.) 방법은 항상 같았는데 이번 여행은 지금까지와 또 다른 마음이다.

준비가 철저한 출장과 달리, 여행은 보통 티켓팅과 숙소 정도만 잡고(그도 귀찮으면 모바일 시대에 휴대폰과 인터넷만 되면 다 되는 세상이므로 안 하고 가는 경우도 태반이다.) 이번에도 떠나기 하루 전 급 티켓팅을 하고 첫날 묵을 숙소만 예약을 했다. 이제 돈벌이 없는 백수인지라 가장 저렴한 티켓을 예약했다. 열흘, 길다면 꽤 긴 일본행이지만 위아래 옷 서너 벌과 1일 1온천을 위해 매일 갈아입을 속옷이 전부라 기내용 캐리어 반만 숭텅숭텅 찼다. 보통 여행 갈 때 이쁜 옷 챙겨 사진 남긴다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런 스타일도 아니고 그냥 없으면 없는 대로 지내자며 대충 챙겨 나온다. 사고 싶은 것도 사오고 싶은 것도 없으니 배낭을 멜까 하다 이 나이에 배낭여행도 아닌데 오버다 싶어 들고 다니기라도 이쁜 기내용 캐리어를 들었다. 캐리어가 이뻐 기분 내기 좋다.(참 단순하기 그지없다.)

수화물도 부칠 수 없고 3시간 가까이 이동하지만 물 한잔이 기내 서비스의 끝인 삿포로 공항으로 향하는 저가 비행기 안에서 엄지손가락 바삐 움직이고 있다. 김영하작가의 여행의 이유를 몇 페이지 읽다가 나도 지금 내 마음을 기록으로 남겨야지 싶어 메모장을 열었다. 생각보다 길게 쓰고 있는 메모에 나도 당황 중이다. (아, 화면이 작아 많이 쓰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걸 수도 있다) 의식의 흐름대로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는 내 엄지손가락처럼 그 날 그 날 마음 가는 대로 발 길 닿는 대로 움직이다 와야지. 맨날 침대에 누워 와식 생활을 하다가 오랜만에 직립 보행이라 허리가 좀 쑤씬다.

몇 페이지 안 본 여행의 이유에서 김영하작가가 그랬다. 보통 여행은 무엇을 얻고자 떠나는데 다른 것을 얻고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난 이번 여행에 얻고자 하는 바가 없었는데 출발하는 시작부터 내 마음이 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 이렇게 그 마음을 글로 남기고 있으니 이 또한 얻은 것이겠구나.

무언가를 얻고자 움켜쥐는 순간, 순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들이 많다. 그렇다고 팽팽하게 손바닥을 펴는 순간, 튕겨나가 잃어버리는 것도 많다. 안간힘 써서 주먹을 꽉 쥐거나 힘차게 펴다 보면 온 신경의 흐름은 그곳으로 간다. 다른 감촉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내 날달걀 한 알 살짝 올려놓는 자세로 손을 자연스럽게 살짝 오므려본다. 그러면 손끝에서 느껴지는 공기의 미세한 흐름이 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만 아는 공기의 흐름이 느껴진다. 재미있다.

공항에 도착했다는 안내가 나온다. 메모장 끄적거리니 금방이군. 지금 이 마음 이 느낌 이대로 자연스럽게 잡히지 않는 바람이나 만져보고 풀냄새 맡고 와야지.(라며 도착했으니 급 마무리를 해본다.)


삿포로 신치토세 공항에 내려 버스에서 본 첫 장면이 이거다. 뭐 이리 대놓고 그림 같고 난리인가. 버스 창문이 마치 그림 프레임 같군. 첫 느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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