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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Feb 07. 2020

자두치킨, 이방인의 사랑

                                                                                                                                                                                                                                                                                                                                                                                                                                                                                         

한 남자가 있다. 


그는 타르(이란의 전통악기)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이 없다.

어릴 적부터 공부는 늘 낙제점이었고 결국 동생과 한 반에서 공부하게 된다. 사람들은 늘 동생과 그를 비교했다. 어머니는 그를 낳은 것을 후회했다. 공산주의 혐의로 투옥된 동생의 뒷바라지를 위해 집안은 파산했으며 몰래 편지를 주고받던 연인의 아버지로부터 꺼지라는 말을 듣는다. 상심한 그는 쉬라즈로 유학을 가고 거기서 평생의 사랑이자 뮤즈, 이란느를 만난다. 그러나 인생은 또다시 그를 기만한다. 이란느와 결혼하려면 타르를 버려야 한다. 음악과 사랑, 둘 중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평생의 사랑과 결별한다. 돌아온 고국 땅에서 그는 부모의 권유로 나히드와 결혼하지만 아내에게 마음을 주지 못한다. 


타르에만 몰두하며 가정에 소홀하던 그는 어느 날, 아들을 병원에 데리고 가지 않았다는 사소한 이유로(인생은 때로 사소한 일로 좌지우지되기도 한다)아내와 싸우고, 다툼 도중 아내는 그의 타르를 부숴트린다. 상심한 그는 거리를 배회하던 중 '이란느'와 재회하지만 평생의 사랑 이란느는 그를 모른다고 대답한다.


"혹시 성함이 이란느 아니신지?"


"네 그런데요. 어떻게 아시죠?"


"나 모르시겠소?"


"전혀요."



그는 자살을 결심한다.


사소한 오해, 작은 굴욕, 소통의 부재가 모이고 쌓여 좌절이 되고 절망이 된다. 

이 이야기는 봉합되지 못한 오해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타르의 신이라고 불리는 그는 음악적 재능은 뛰어났지만 경제능력은 형편없었다. 마찬가지로 그는 아내를 단 한 순간도 사랑하지 않았지만 아내는 그를 열렬히 사랑해왔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가 자살을 결심하고 식음을 전폐하며 병상에 누워있을 때 그를 위해 유일하게 기도한 사람은 그가 가장 미워하던 골칫덩어리 아들이었다.  네 명의 자식들 중 가장 사랑한 딸은 나세르에게 관심이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는 생의 마지막까지 아들의 진심을 알지 못한 채 죽는다.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건 가장 총애하는 그의 딸일 거라고 예상하면서.


병든 어머니의 곁을 지킨 그였지만, 어머니는 그에게 자신의 회복을 바라지 말라고 한다. 내게 가장 필요한 건 담배와 너의 연주 뿐이라면서. 그는 기도를 멈춘다.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던 두 손으로 그는 타르를 연주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오래 지나지 않아 숨을 멎는다. 


가정에 소홀한 자신을 책망하던 동생은 정작 나세르보다 먼저 가정을 파산시킨 전적이 있다. 동생은 이란 민중의 자유를 위해 시위했지만 정의를 위해 행했던 그 행동이 투옥으로 이어지게 되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걱정하던 가족들을 아프게 한다. 


나세르 알리 칸의 삶과 사랑은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다. 진심은 닿지 못하고 오해와 불신은 쌓인다. 

그는 무엇과 투쟁해야 하는가. 무엇을 혁명시키고 개도해야 하는가. 그의 노력이 어디로 향해야 그는 행복을 찾는가. 실패한 사랑과 인생의 해답을 그는 타르에서 찾았다. 그의 두 손으로 유일하게 타인을, 그리고 자신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일, 

음악이었다.


그런 타르가 아내의 손에서 망가졌으므로 그는 아내를 증오하고 저주하며 새로운 타르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그가 만족할 만한 음색을 내지 못한다. 그에게 있어 최고의 타르는 그가 이란느와의 사랑에 실패하던 날, 스승이 그를 위로하며 준 오직 그 타르 뿐이기 때문이다. 이란느를 떠올리며 연주하던 그 타르, 그로 하여금 현실에 안주할 수 없게 만들고 실연의 고통을 주었지만 포기할 수 없었던 그 타르는 이제 없다. 타르를 연주하며 이란느를 향한 사랑과 생의 고통을 연주하던 그는 상심한다.  그러나 그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이란느가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책의 가장 마지막에서야 그는 무덤 속에서 안식을 찾는다. 그의 묘소에는 많은 인파가 몰린다. 생전의 그는 자신을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여겼으나 예상과 다르게 그를 사랑하는 이들은 꽤 많았다. 그의 친지, 가족들, 그를 존경하던 사람들, 친우들, 그리고 이란느. 

그를 잊었던 이란느가 실은 그곳에 있었다.


나세르 알리 칸이 좀 더 적극적으로 이란느에게 자신을 설명했다면, 아내와의 결혼을 성사시키려는 부모의 권유를 거절할 용기가 있었더라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이다. 자신을 닮지 않은 사고뭉치 아들과 한 번이라도 진지한 대화를 나누려했다면 사고를 쳐서라도 이버지의 관심을 끌고자 했던 아들의 진심을 깨달았을 것이다.


사랑은 아름답지만 그것이 꼭 보답받는다는 보장은 없다. 때로는 내가 무시했던 것들이 나에게 중요한 존재일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어리석기 때문에 내가 보는 관점과 사고의 틀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을 원해도 막상 기회가 오면 잡지 못하는 것이다. 혹은 알면서도 외면하거나. 


자신을 아프게 했지만 사랑을 놓지 못했던 나세르와 그의 아내 나히드, 이란느의 사랑을 보면서 문득, 작가도 그들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 마르잔 사트라피는 이란 출생이지만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강압적인 정책에 반기를 든다. 그녀의 신변을 걱정한 그녀의 부모에 의해 그는 청소년기를 오스트리아에서 보냈으나 중동 출신이라는 차별과 멸시 속에 이방인의 삶을 살아야 했다. 적응하지 못한 그녀는 이란으로 돌아왔으나  고국은 그녀를 반기지 않았다. 그녀는 유럽의 자유와 고국 땅의 여성을 향한 억압 사이에서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이란을 떠나 프랑스 땅을 밟는다.


마르잔 사트라피의 조국 이란은 히잡을 쓰도록 강요하고, 문화의 교류를 차단하고 종교와 신변의 자유를 부정하며  마르잔을 억압했지만 그녀는 끝까지 이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다. 자신에게 고통을 안겨 준 고국 이란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고 증오가 아닌 사랑의 문법으로 이란인들의 생을 기록하는 작가 마르잔 사트라피. 

자신을 잊고 새로운 가정을 꾸린 이란느를 고통 속에서도 사랑한 나세르 알리 칸, 

나세르의 이란느를 향한 사랑은 마르잔 사트라피의 이란을 향한 마음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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