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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Feb 16. 2020

쥐, 블라덱 슈피겔만

떠올랐지만 가라앉은 자


1.


학살의 현장에서 인간을 횡으로 나누면 가해자와 피해자가 남는다. 종으로 나누면 독일인, 유태인, 폴란드인, 미국인 등으로 확장된다. 이 책은 횡으로 나눈 세상에서 독일인과 유태인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폴란드인들에 대한 이야기다. 횡과 축을 교묘하게 엮어가며 직조한 세상. 그 속에 역사가 있다.


<쥐>는 한 남자의 생환기이면서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태인의 증언록의 두 개의 의미를 지닌다.  남자의 이름은 블라덱 슈피겔만, 그는 작가의 아버지이자 홀로코스트를 겪은 증인이다. 그를 횡으로 나누면 피해자요, 축으로 나누면 유태인이 될 것이다. 그는 게슈타포에 의해 붙잡혀 아우슈비츠, 그로스젠, 다카우 수용소를 전전하지만 뛰어난 기지와 영민함으로 살아남는다.


그러나 그의 생환기는 숭고함이나 영웅담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지극히 개인적이고 본능적인 서사이다. 아내 아냐에 대한 사랑을 제외하면 오히려 인간에 대한 배신, 진척되어 가던 일의 좌절과 절망으로 점철되어 있는 어두운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가 살아남기(survive)위해 희생보다는 실리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인간은 억압된 환경에서 선택지가 한정되어 있고 그마저도 강제된 경우가 많다. 블라덱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실리의 길을 걸었고 결과적으로 그는 살아남았다.


 세상의 보편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는 강인한 사람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권력자들이 그렇듯이 강함은 인간성의 감소를 동반한다. 권력의 속성이란 무엇인가.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다. 지배하려면 잘난 사람과 그보다 못난 사람이 필요하다. 권력은 위에서 아래로 수직적으로 흐르며 전복되거나 하강할 순 있어도 수평으로 흐르진 않는다. 나눔, 희생, 양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인간성은 어떤가. 인간성은 대개 수평적으로 흐르며 나만 잘 사는 것이 아닌 공생하는 것, 나누고 베푸는 삶에서 비롯된다. 블라덱이 경험한 아우슈비츠는 수직적이고 경직된 공간이었다.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그것을 카포가 되어 동족을 학대하는데 앞장서지 않는 이상 지배의 구조를 전복시키기란 불가능했다.


물론 블라덱은 앞잡이(카포)가 되어 동족을 말살하진 않았다. 그는 단지 카포들의 비위를 맞추고 능숙하게 처신하며 남들보다 빵을 한 덩이 더 받거나 더 좋은 침대를 제공받는 정도였다. 때로는 자신의 손익에 도움이 된다 싶으면 동족들을 돕기도 했다. 하지만 자발적으로 돕거나 민족의식이 고취되어 유태인 해방운동을 위해 투신하진 않았다. 따라서 이것은 교훈을 담은 역사서라기 보단 역사 속의 개인담에 더 가깝다.


역사 속에 인간이 있고 인간을 파고들면 그 인간이 속한 시대가 나온다. 시대를 해체하면 개인이 나온다. 이것이 시대의 비극을 이미 지나간 일로 치부하고 잊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잊혀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역사 속에 상처 받은 개인이 있기 때문이다. 


2.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들이 훗날 아버지가 되어 자식들에게 폭력을 휘두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아들도 폭력의 피해자일 때는 아버지를 증오했을 것이다. 자신이 커서 부모가 되면 절대 그처럼 행동하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했을 것이다. 허나 인간의 무의식이란 생각보다 위력이 커서 사람은 좋은 일이든 안좋은 일이든 한 번 겪은 일은 내면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아들의 안에 내재화된 폭력성은 훗날 자신도 모르는 사이, 혹은 의도한 채로 자신의 아이에게 투사될 것이다. 옛날의 다짐을 잊고 말이다. 이때, 아들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더 이상 반면교사가 아니다.



위에 글을 읽고 이 사진을 보자. 어떤 생각이 드는가? 우리는 과연 블라덱을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마냥 욕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자기 안에 내재화된 감정은 쉽게 변하지 않고 자리잡는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블라덱의 이런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도 독일인의 인종탄압 사상의 피해자였으면서 흑인을 인종차별하다니?, 그러나 역사속에서 피해자는 가해자가 될 수 있고 가해자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 블라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반대로 생각해보면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였기에 외려 더 이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도 설명 가능하다. 

사람은 너무 고통스러운 기억은 되감지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그 노력에 의해 괴로운 기억을 망각하면서 살아간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고 피해자는 가해자가 될 수 있으며 그 반대도 충분히 가능하다. 


일례로 독일-유태인은 고양이-쥐였지만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에서 유태인은 더이상 쥐가 아니다.  고양이다. 유태인에게 있어 팔레스타인은 쥐였다. 블라덱이 유태인으로서 독일인들에게 탄압받던 기억을 내면화했듯이, 내면화된 증오는 표출할 창구를 찾는다. 그들도 누군가에게는 고양이가 될 수 있다는 생각, 더 이상 역사 속의 약자로 남지 않겠다는 의지와 분출되지 못한 증오가 팔레스타인을 향했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장면이 시사하고자 하는 점은, 그리고 정말로 무서운 것은 이것이다. 증오는 연쇄된다. 내리사랑이 가능하듯이 증오 또한 이어질 수 있음을 사람들은 너무 쉽게 망각하고 있다. 


더 이상 거리에서 "하일 히틀러"라고 부르지 않아도 나치의 의식은 저 너머, 그들의 피해자의 의식 속에서 복원되고 재건되고 있다.

나치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들의 의식이 살아남아 후대에 유전되는 한.


3. 


생환한 후의 해피엔딩이었을까?, 불행하게도 답은 no다. 생환 이후 블라덱은 매일 스무 개의 알약을 삼키며 당뇨 합병증과 심장질환으로 고생한다. 그와 함께 살아남은 아내 아냐는 아티가 20살 되던 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아무런 유언도 남기지 않은 채. 유약하고 예민한 영혼의 소유자인 아냐는 너무 아팠으나 블라덱은 아내의 마음을 이해하기엔 너무도 속물적이고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아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아트와도 블라덱은 사사건건 충돌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다. 그와 재혼한 말라는 블라덱을 가리켜 이렇게 말한다.

"노랭이에 한 푼도 쓰기 아까워하는 구두쇠야!, 그의 잔소리에 미칠 지경이라고!"


블라덱은 후처 말라와 아들 아티는 물론 주위의 이웃들에게도 사사건건 참견하고 간섭하며 못살게 군다. 블라덱이 아우슈비츠로 끌려가기 전에는 사교성 좋고 사업수완 좋은 젊은이였음을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생존의 기억이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이다. 살아남고자(to survive)했던 투쟁의 기억은 블라덱으로 하여금 그를 끝없는 의심의 수렁으로 끌어들이고 말았다. 그는 물론 주위의 소중한 사람들까지도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이야기, 그리하여 아들과도 소통하지 못하는 소위 "꼰대"가 된 블라덱. 

그는 이제 완벽한 꼰대가 되어 세상을 가르치고 간섭하려고 든다. 생존 그 너머의 어떠한 이상이나 야망을 꿈꾸지 못한 채로 그는 남았다.



블라덱과 똑같이 아우슈비츠에서 생존한 작가 프리모 레비의 책을 읽어본 적 있는가? 

프리모 레비는 그의 책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서 살아남은 인간의 실존적 위기를 치열하게 파헤쳤다.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블라덱은 '구조되었지만 가라앉은 자'일 것이다. 그는 생환 이후 두번 다시 홀로코스트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한 셈이다. 그의 인간성이나 인간적인 삶은 복원되지 못하고 가라앉았으므로. 

프리모 레비는 생환 이후 생존자로서의 기억을 복원하며 '이것이 인간인가', '주기율표'등을 발간했지만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렇듯 인간이란 약하면서도 강하고 반대로 강하면서도 약하다. 


떠올랐지만 가라앉은 자, 구조되었지만 떠오르지 못한 자' 
프리모 레비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것이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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