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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Jun 23. 2020

기생충과 국가론-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박 사장은 미국이다.

본 리뷰는 글쓴이의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스포일러 다량 포함되어 있으며 저작권 등 문제가 발생할 경우 즉시 글을 삭제할 예정입니다.
중요한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으시거나 영화를 아직 감상하지 않으셨다면 이 글을 읽지 않으시는 걸 권합니다.



1.



최근 볼턴의 언행이 논란이 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남북한의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 볼턴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회담에 문재인 대통령이 허락 없이 참석했다. 또한 북한의 비핵화보다 남북한 통일의 어젠다를 더 중시했기 때문에 하노이 회담의 결렬은 전적으로 남한의 책임이다."

이것은 명백한 내정간섭이 아닌가요?, 볼턴(그리고 그와 뜻을 같이하는 대다수의 미국 정치인들)은 거대한 착각을 하고 있다. 판문점 회담도 하노이 회담도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거듭 대화와 협력의 뜻을 타진했기 때문인데요?, 하노이 회담이 결렬되지 않았다면 한반도 종전이 이뤄졌을 일이다. 덕분에 천조국 대통령께서 노벨상을 받으실 뻔했던 건 잊으셨나 보다.




나는 개인적으로 트럼프를 나쁘게 생각하진 않는다. 그냥 사진이 이렇게 찍혔을 뿐이다.



 

2. 



본론으로 돌아가 보자. 나는 최근 트위터에서 재미있는 글을 읽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생충 수상에 미국인들 환호하는 거 웃기지 않냐. 박 사장처럼 살게 뻔한 인간들이 빈자들의 싸움을 보며 시시덕거리고 있다."

일리 있는 말이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서 글을 쓴다. 사견을 좀 더 덧붙이자면, 박 사장은 미국이요, 김기택과 오근세는 박 사장을 필두로 한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분단된 남북한이라고 상징할 수 있다. 둘의 근본적인 출신은 같다. 비자와 부자의 간극에서 명백하게 빈자에 속하는. 세상의 원류가 약육강식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둘은 패자이다. 그러나 둘은 합쳐질 수도, 힘을 합쳐 협력도 할 수도 없다. 오근세는 박 사장을 동경하고 그가 자비를 베풀어줬기 때문에 자신과 문광이 살 수 있는 거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근세는 그런 식으로 틀린 가정을 하기 때문에 박 사장을 위시한 상류층을 경멸하지 않는다. 기택처럼 그들의 위선에 조소하지도 않는다.  실제로 박 사장이 근세에게 자비를 베풀었는가? 박 사장은 지하실의 존재를 모르며 지하실로 대변되는 최하층의 실상을 모르며 알려고 하지도 알 필요도 없기에 그저 그렇게 살아갈 뿐이다. 근세의 존재를 모르므로 그의 존재를 눈감아줬다는 가정도 성립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는 근세의 냄새에 역겨워하지 않았는가. 하류층의 생태에 역겨워하는 박사장 앞에서도 근세는 "리스펙트"를 외친다. 자신을 경멸하는 시스템 속에서도 전복을 꿈꾸지 못하는 그는 는 자본주의의 노예이며 자본주의 그 자체다. 박 사장이 자본주의의 양이라면 그는 음의 성질을 띤 두 얼굴 중 하나인 것이다.


박사장을 리스펙트하는 근세



3.



기택도 박사장을 동경한 적 있었고 자본의 시스템에 순응했지만 패배한 인물이다. 기택과 근세는 샴쌍둥이처럼 서로가 한 몸이되 다른 풍경을 보고 다른 쪽을 향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문광과 근세의 북한 아나운서 흉내와 풍자는 더욱 의미심장하게 와 닿는다. 

"전송 버튼이 완전 북핵 미사일 버튼이야."

이쯤에서 이 대사도 다시 보자.

"같은 불우이웃끼리 이러지 말자."

"난 불우이웃 아니야."

다시 시대를 돌려 1945년 한국 독립과 1950년 한국전쟁을 돌이켜보자. 승기를 쥔 미국은 일본의 손을 들어주었다. 독일이 서독, 동독으로 분단되었듯이 전쟁을 일으킨 국가가 분단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미국은 전범국가 일본이 아닌 대한민국을 분단시켰다.

남과 북으로 갈라져 이념과 체제와 경제가 분열된 세상
 기택과 근세가 떠오르지 않는가.




4.



이야기를 하기 앞서 미리 밝혀두자면 나는 봉준호 감독을 모른다. 봉준호 감독의 정치성향이나 사상을 모르며 안다고 해도 그것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생각도 없고 판단할 권리도 없다. 다만 깊게 보자는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전작 '괴물'에서 괴물을 창조시킨 프랑켄슈타인은 미군이었다. 미국 연구원들이 강에 오염된 폐수와 폐수 속의 무언가가 괴물을 만들었고, 수만의 목숨을 앗아갔다. 실패한 운동권 출신인 박해일과 그 일가는 외국의 해악에 의해 탄생한 괴물에 맞서 독자적으로 맞서 싸운다. 본능대로 사람을 먹어치우는 것이 괴물의 본능이자 존재하는 이유라면, 그것을 만든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독극물 포름알데히드를 한강에 버리라고 지시하는 미국 군무원

                                


4.



행복은 나눌수록 커지잖아요. 과연 그럴까?

                                                  .


기택은 박 사장의 위선적인 태도와 개인적인 일에 자신을 동원하는 것이 싫었다. 박 사장의 아드님을 위한 생일잔치를 위해 동원된 기택네 가족은 바로 전 폭우 피해로 삶의 터전을 잃은 수재민들이다. 그들은 곤란한 부탁인걸 알면서도 박사장과 인교의 지시를 거부할 수 없었다. 고용주니까. 초라한 인디언 분장을 한 채 피곤과 짜증이 섞인 기택은 적나라한 불편감을 드러내지만 박 사장은 이것도 일이니까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한다. 그 발언의 저의에 깔린 기택의 목적은 시간 외 근무 수당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찬가지로 볼턴과 미국은 남북관계를 빌미로 명백한 내정간섭을 하고 있다. 비핵화 어젠다가 남북한의 통일보다도 중요하다는 볼턴의 입장이 미국을, 오바마를 필두로 한 민주당을, 대다수의 역사문제에 관심 없는 미국인들을 대변한다.



사람이 편견에 찌들면 이렇게 된다.

                                                  


5.



박 사장은 자신의 고용인에게 살해당한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 태양 때문에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였다면 기택은 무시에 대한 분노로 우발적인 살인을 저질렀다. 박 사장이 쓰러진 제 자식에 당황해 차키! 를 부르짖는 대신에 제시카 쌤도 데려와라 같이 병원에 가자"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사람이란 누구나 제 자식, 자기 나라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법, 그런 일은 상상 속에서나 가득하다. 꿈속에서는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지만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이름하의 현실 속에서 파이 하나를 두고 싸우는 짐승들이다. 한정된 파이 속에서, 한정된 환경 속에서 최대의 이익을 창출하려면 결국 남의 것을 건드려야 한다. 빼앗아야 한다. 기택은 박사장의 부를 동경하고 넘보고 담을 넘어 빼앗아보려고도 했지만 허사였다. 우리는 자본주의 속의 기생충이다. 박사장이 최상류층으로서 빛나는 것도 기택과 근세같은 하류층이 있기에 돋보이는 것이다. 그 뿐인가. 박사장도 그들의 노동 없이는 생활의 불편을 겪는다는 점에서 그도 기생충이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과 베트남 전쟁, 이스라엘의 무기상으로써 천문학적 부를 얻은 것처럼. 박사장도 성공의 이면에는 착취한 노동과 경쟁사 억누르기 등이 있었을 것이다. 전범국 일본이 한국을 수탈하고 한국전쟁의 수혜로 부흥한 것처럼. 한국전쟁은 일본 전쟁이었어야 했음에도. 학살의 책임을 묻자면 미국도 자유롭진 않다. 애초에 미국이란 국가는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격리구역을 만들어 인종 정리를 해서 건국된 나라가 아니던가. 이쯤에서 미국을 본다. 미국의 부귀와 영광을 본다. 천조국의 대통령께서 기생충을 혹평하며 심기 불편해하셨던 기억을 되새겨본다. 나는 본다. 박사장의 죽음에서 미국의 영락과 종말의 그림자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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