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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맨디 Jul 23. 2023

꿈을 잃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꿈을 잃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인생이 고독하다고 늘 하는데, 살아보니까 결국은 저 혼자 외톨이가 될 뿐이라고 깨닫는 데에서 나온 소리일 테지요.

누가 무어라 했건 그런 소리에 귀를 기울일 건 없습니다.

꿈만 잃지 않으면 됩니다.

꿈을 잃지 않는 사람에겐 때가 묻지 않습니다.

공 때리기 놀이에 공을 피하듯 이러쿵저러쿵 장애물이 당신을 때려눕히려 하더라도 요리조리 피해봅시다.

세월 속에서 때까지 묻히고서야 억울하고 원통해서 어쩝니까"

-최정희 수필 -


고등학교 3학년 때, 문제집을 풀다 문학 지문 하나를 후다닥 훔쳤다. 문제를 풀어야 하는데 더 이상 문제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두근두근. 글귀가 내 마음 어딘가를 토닥이는 기분이 들어 두근거렸다. 그 토닥거림의 장단이 마치 응원가를 닮아 동동거리는 소리가 났다.

"오... 좋다" 글이 퍽 마음에 들었다.

문제를 풀 마음은 달아났다. 의자 뒤로 매둔 가방 휘적거려 분홍색 포스트잇을 꺼내 개미만 한 글씨로 글을 겼다. 그리고 필통 앞 주머니에 꼬깃꼬깃 넣어두었다. 그때부터 내내 '내 글'로 훔쳤다.


꿈을 잃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매 순간이 억울하고 원통했던 수험생의 분노를 "꿈"이라는 단어에 누르고 눌러 담아 참아냈다.


고등학교 3학년. 고3.

지금 외국친구들에게 내 고3 때, 스케줄을 이야기하면 쉽게 믿지 않는다.

얼굴 근육을 있는 데로 일렁거리며 "거짓말 살이 너무 많이 붙었다"라거나,

"그런 게 가능하기나 하냐"라고 눈썹을 찌푸린다.


기억에 의존해 요약하자면 대충 이런 스케줄이었다.

1교시 전, 0교시 자율학습을 시작으로 8교시까지 수업이 이어진다. 50분 수업에 10분 휴식.

그리고 약 2시간의 보충학습으로 가장 중요한 '국영수' 중 두 과목을 번갈아 듣게 된다.

그때부터 지루하고 긴 자/ 율/ 학습이 시작된다.

어떤 '찬란한 봄의 슬픔'님께서 이름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자율 학습에 자율적인 건 아무것도 없다.  

반 전체가 수업시간과 똑같이 정갈하게 앉아 문제집을 풀거나, 스스로 모의고사를 쳐본다.

짧은 석간 시간을 지난 구간을 야간 자습이라고 불렀고, 밤 10시 이후의 자습을 심야 자습이라고 했다.

줄여서 오자, 야자, 심자.

편의상 이름만 나눴지, 매일 밤 6시간 정도 끝없는 자습이 이어질 뿐이다.

그렇게 아침 7-8시부터 자정이 가까운 밤 11시 30분이 돼서야 터덜터덜 교문을 나선다.

더 무서운 건 이 일정은 다음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똑같은 패턴으로 반복된다는 점이었다.

물론 20년도 더 된 옛날 옛적 곰팡이 같은 이야기이다.


그때 난 힘들었다.

하루 저녁은 가족끼리 두런두런 앉아 치킨을 먹다 문득 내 처지가 너무 서러웠다. 치킨을 내려놓을 새도 없이 와락 눈물이 흘러, 닭다리를 양손에 든 채로 뚝뚝 눈물을 흘렸다. 찐득한 치킨 양념이 양손에 묻어 눈물을 닦기도 애매했다. 뭐가 서러웠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서럽고 분통이 터져 안에 무언가가 푹 솟구쳐 올랐다.

앞에서 말갛게 보던 가족들이 당황해 고요해졌다.


열여덟 살이었다.

똑같은 교실에 갇히기엔 너무나 에너지가 넘쳐 몸이 근질거렸고, 수학의 정석만 읽기에는 감수성이 터져 나왔다.

'고작 1년을 못 참냐'라고 다그치는 어른들이 말하는 그 1년은 늘어질 데로 늘어져 시간이 흐리게 흘렀다.


그래서 난 꿈에 매달렸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가슴팍이 답답할 때마다 꼬깃꼬깃 포스트잇에 적어 접어둔 저 글을 끄집어내서 읽고 또 읽었다.

다행히도 이 글을 읽을 때마다 매번 작은 응원가가 가슴팍에서 동동거리는 것 같은 기분이 일었다.


그 글이 연상시키는 꿈이

HOT를 가까이서 보고 싶어서 방송국 PD가 되고 싶다던가,

그림을 잘 그렸다는 칭찬을 들어서 미대에 가고 싶다던가 하는 이전에 가졌던 직업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조금 더 차근차근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교단 뒤로 선 선생님들이 들려주는 수능 이후로 펼쳐진다던 그 유토피아.

그 모습이 내가 붙들고 서있던 꿈의 모습이었다.


"대학에 가면 팔랑거리는 분홍치마를 입고, 살구색 하이힐을 신어야지.

곱고 차분한 머리끝은 꼭 안쪽으로 굽어진 C컬을 넣고 머리띠를 하고.  

필통하나 겨우 들어가는 작은 백팩을 메고, 전공책은 손에 들고.

훈훈한 남자친구와 벚꽃 핀 교정을 여유롭게 걸어 다니는 여대생"


똥머리에 앞머리에는 야무지게 실핀까지 꼽고 기계처럼 문제집을 풀어대는 내게 꿈은 그런 재질의 것이었다.

 사진 같은 꿈이라는 단어를 움켜쥐고 대롱대롱 매달렸다.

이러쿵저러쿵 매일같이 피구공에 맞아 터져 나가면서도 덕분에 간신히 살아남았었다.


가진 거라곤 꿈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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