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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맨디 Aug 16. 2023

곰스크로 가는 기차

<프리치 오르트만의 '곰스크로 가는 기차'를 각색했습니다.>


1.

나는 곰스크로 가고 싶었다. 아버지는 곰스크에 대해 곧잘 이야기했다. 그는 곰스크를 닿고 싶어 노력해도 노력해도 도무지 닿을 수가 없는 곳이라고 했다. 덕분에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그곳으로 떠나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붕 떠오르는 것 같던, 그 기분이 좋았다.

처음엔 흐릿하게 그리던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선명한 갈망으로 다가왔다.

그 간절함의 크기만큼, 나는 더더욱 곰스크로 가는 일을 서둘렀다.


마침내 곰스크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을 때, 온몸이 짜릿해지는 전율을 느꼈다.

'드디어 나도 곰스크를 향한다!'


뜨거운 날씨였지만, 기차 안은 쾌적했다. 사람이 살기 가장 쾌적하다는 18도에 온도가 맞춰져 있었다.

비싼 티켓은 그 값어치를 톡톡히 했다.

그곳에는 필요한 모든 것이 있었고, 나는 그곳에 몸을 싣고 있기만 하면 됐다.

동료도 많았다. 떠들썩한 기차 안은 곰스크로 떠난다는 사실에 들뜬 목소리가 가득 채워졌다.

그 안에 속해있다는 것만으로도 벅차듯 흥이 차올랐다.


2.

정차한 역에서 기차를 내렸다 다시 타는 사람들을 창문으로 내다봤다.

바람을 쏘이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었고, 햇볕을 즐기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었다.

처음엔 조금씩 볕을 쏘이고, 모두 이내 자리로 돌아왔다.

기차가 미끄러지듯 플랫폼을 출발하면, 다시 우리는 곰스크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떠 떠들어댔다.

일등석 기차가 제공하는 풍성한 식사도 즐겼다.

폭신한 쿠션 위에서 방방거리기도 했다. 행복했다.


3.

기차 안에 빈자리가 꽤 생긴 걸 난 조금 늦게 눈치챘다.

그 시간, 나는 기차가 제공한 안내서를 읽느라 바빴다. 조금 더 좋은 자리로 옮길 수 있는 기회가 있노라고 했다. 조금 더 괜찮은 식사를 선택할 수 있는 옵션도 있다고 했다. 수수께끼를 풀면 된다고 했다. 

이왕이면 기차 여행마저도 더 완벽하게 즐기고 싶었다. 난 그들이 제공한 수수께끼들을 풀기 시작했다. 문제를 더 잘 풀어내고 싶어서, 골머리를 앓기도 했다. 여전히 기차가 제공하는 풍성한 식사도 폭신한 쿠션도 만족스러웠다.


4.

수수께끼를 한참이나 들여다봤더니, 눈이 시큰거렸다.

찌뿌둥한 목을 움직이며, 기차 밖을 내다봤더니 어느새 계절이 변해 있었다.

풍성하던 여름의 녹음은 사라지고, 몇 장 남지 않은 낙엽들 사이로 시큰한 바람이 몰아치는 게 보였다.

기차 안은 여전히 쾌적한 온도, 18도였다.

난 카디건을 꺼내 걸쳤고, 다시 수수께끼로 눈을 돌렸다. 


5.

어느덧 기차 안은 고요해졌다.

그 흥겹던 동료들은 정차역에 하나 둘 내리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가족이 생겼다며 다음 열차에 오르겠다고 말하는 이가 있었다.

따뜻한 볕에 몸을 녹이니 기분이 좋다며 조금만 쉬어 가겠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난 정차 역에 내리는 게 어쩐지 두렵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기차가 제공한 수수께끼들을 훌륭히 풀어내는 것만이 나의 일과가 되었다. 나는 꽤 소질이 있는 편이라고 했다. 덕분에 고-오 급 스테이크와 와인을 곁들이는 호사를 어렵지 않게 누릴 수 있었다. 으쓱한 기분이 들었다.


6.

완연한 겨울이 왔다.

기차 안의 18도는 이제 시린 느낌이 들었다. 숭숭 빈자리들이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쿠션도 더 이상 포근하지 않았고, 와인도 스테이크도 입을 텁텁하게만 했다.

묵묵히 수수께끼를 풀거나, 눈 쌓인 창밖 풍경을 바라보는 것 밖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7.

그 긴 겨울이 지나, 마침내 봄이 왔다.

봄을 맞이한 기차는 첫 번째 정거장에 다다르며 부지런히 정차를 준비했다.

언제나 그랬듯 쾌적한 기차는 플랫폼으로 밀려 들어가며 다정한 안내 멘트를 내뱉었다.


난 지금껏 풀었던 수수께끼 더미들과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겼다. 그리고 기차에서 뚜벅뚜벅 내렸다.

볕이 뜨겁게 쏟아졌다. 아직은 선선한 봄 냄새가 코끝으로 밀려왔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땅의 감촉을 어색해 발을 토닥였다. 


그러다 기차를 한번 쓱 돌아봤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역 안으로 다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알고 있었다.

내게 다시 돌아가는 티켓 따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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