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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맨디 Aug 19. 2023

입사가 어렵냐? 퇴사가 어렵냐?

누군가 내게 "입사가 어렵냐? 퇴사가 어렵냐?"라고 짓궂게 물었다.

난 한참을 고민했고, "퇴사가 더 어렵다"라고 답했다.


둘은 결이 다르다.


갖기 위해 애쓰는 건, 계단을 오르며 내 부족함을 채근하는 일이다. 내 영어점수가 모자라서 서류가 탈락했는지, 내 언변이 부족해 면접에서 떨어지는지. 내 부족함을 돌아보고 추슬러, 다음 다리를 들어 올린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을 오르는 느낌이었다. 계속 같은 근육만 써서 다리가 뻐근했다.


반면, 가진걸 손에서 놓는 일은 계단을 내려오는 일이었다.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근육을 쓰면서 전혀 다른 부위가 욱신거렸다. 사실 근육통은 별 것 아니었다. 그보다는 마음을 다스리는 게 더 어려웠다. 계단을 한 칸씩 내려올수록, 내가 보고 있는 전경이 뚝뚝 사라졌다. 매달 입금되던 월급, 사회적 지위, 안정적인 소속감.

눈앞에 잡힐 듯 보이던 것들이 한 칸 한 칸 잠기듯 없어졌다. 그 아쉬움을 견뎌야 했다.




퇴사를 결정하고 나서, 엄마와 1년간 전화로 싸웠다.

우리나라에서 시집도 안 간 지지배가 덜컥 퇴사부터 하는 건 많은 걸 의미했다. 단순히 경쟁에서 나가떨어져지는 것 그 이상이었다. 경제적 불확실성에 더해, 결혼정보회사 등급을 다섯 칸쯤 낮추는 이 참혹한 결정을 엄마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너 나중에 나 원망하지 마라."


자주는 아니었지만, 가끔 전화를 끊으며 엄마는 이런 소리를 했다.

퇴사를 하네 마네 30분쯤 옥신각신한 후였다.


난 그 말이 어디서 나온 말인지 알고 있었다.


엄마는 종종 엄마 친구 딸, 아들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20년 넘게 '엄친딸, 엄친아'라는 말은 완벽함의 상징이었지만, 그 과장된 완벽 이면에는 과장된 몹쓸이 들도 잔뜩 널려 있었다. 세상천지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나 싶은 무뢰배들이 엄마 친구 딸, 아들 중에는 종종 섞여 있었다.


A는 10년쯤 전, 결혼을 하겠노라고 10살쯤 많은 남자친구를 데리고 왔다고 했다. 엄마의 친구는 처음부터 그 결혼이 성에차지 않았다고. 도시락 싸서 다니며 말리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사위 될 사람을 문전박대하고 문 앞에 놓인 선물을 돌려보내는 정도의 매서운 반대는 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 결혼은 성사되었다.

냉랭하던 장서관계는 시간에 더해지면서 그리고 아이라는 연결이 생기면서, 그럭저럭 회복되어 가족이 되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몇 년 더 지나 결혼생활은 파경에 치닫았고, A는 엄마 세대에겐 글씨와 같은 '이혼녀'라는 낙인을 갖게 되었다는 뻔하디 뻔한 얘기였다.


엄마는 그 얘기를 하면서 늘 A의 말을 전했다.

A는 "왜 그때 내가 결혼한다고 할 때, 더 말리지 않았냐"라고 울고 소리 지르며 원망했다고 한다.

엄마에게 이 이야기의 하이라이트는 늘 이 부분이었다. 고오-얀 딸.


그 말을 할 때 A 씨는 술에 만취했던 걸까, 아니면 흥분해서 자신이 어떤 말을 입 밖으로 내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걸까?

난 전지적 엄마들 시점에서 디테일이 사라진 채 전달된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비극의 주인공 A 씨의 생각이 궁금했다. '자기가 내린 선택을 더 열심히 말리지 않은 엄마를 탓하다니. 참 못났다.' 굳이 엄마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그 정도로 생각하고 넘겼던 이야기였다.


그런데 엄마가 그 대사를 내게 인용했다. 엄마 눈에는 결혼도 안 하고 나이만 찬 딸이 덮어놓고 퇴사부터 하는 건 그 정도의 재앙이었음에 분명하다.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말리지 않으면 나중에 열심히 말리지 않은 엄마를 원망할 정도로 결말이 뻔하디 뻔한 비극의 시작. 그 주인공이 된 것 같아 씁쓸했다.


퇴사는 그런 맛이었다.

싱글즈의 한 장면처럼 통쾌하게 괴롭히는 선임을 한방 먹이거나, 후련하게 회사 화장실에 있던 치약과 칫솔을 휴지통에 내던지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그런 건 퇴사의 10%도 채 되지 않았다. 대부분은 '회사 밖은 지옥이야. 네가 안나 가봐서 모르는 거지'하거나, '이제 네 연봉은 세일 품목처럼 지금의 70% 정도밖에 안 되는 거야'하는 식의 쏟아지는 악담들만 가슴팍에 쌓였다. 아마도 내가 망해버렸나 보다. 하하하.



퇴사는 저질렀지만, 여전히 난 뭐가 하고 싶은 건지 잘 몰랐다.

일단 언니와 세 달쯤 여행을 다녀와서 고민해 보기로 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직이나 별다른 사유 없는 퇴사로 인해, 우리나라에 더 이상 기회가 없는 걸까?

에이 몰라. 그렇다면, 싱가포르, 홍콩, 미국, 영국, 호주 어디든 문이 열리는 곳으로 가야지.' 했다.


사진처럼 선명한 꿈도, 숫자로 표현할 목표도 모두 날아가 버렸다.


여기까지가 처절했고 가끔 하찮았던 내 실패기이다.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보기 좋게 망했다.  

망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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