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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영 Nov 04. 2020

페미니즘 복합체의 생존 투쟁

<촛불혁명 4주년 학술토론회 : 촛불혁명과 포스트 코로나시대> 발제문

2016년 촛불 당시, 촛불 시민들은 박근혜에게 “미스 박”이라고 부른 DJ DOC를 무대에 서지 못하게 했다. 4년이 지난 지금, 다시 그 장면이 돌아온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구글에서 ‘페미니즘은’ 까지 치면 자동완성으로 “페미니즘은 정신병이다”가 따라 나온다. (자가출판플랫폼에서 나오긴 했지만)같은 제목의 책도 출간되어 있다. 유튜브와 구글의 법칙에 따라 인기만 있다면 모든 의견에 권위를 부여하는 21세기의 평등한 세상에서 자가출판플랫폼이라는 건 별다른 단점도 아니다. 유튜브 채널 ‘신의한수’나 ‘가로세로연구소’가 무슨 엄청난 권위가 있어서 50~100만 명의 구독자를 거느리고 있는 게 아니듯이. 해당 책의 개정판인 『페미니즘은 인류에게 무엇을 주었을까』는 YES24 여성·젠더 코너에서 TOP20에까지 올랐다.


힘있게 여성도 시민임을 외치던 이들은 모두 사라졌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그러나 4년이 지난 지금 그 ‘촛불’이 여성의 촛불이었는지는 굳이 규명할 필요조차 없어지고 말았다. 소위 ‘페미니즘 리부트’라고 불리는 2015년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상황에 관해 페미니즘의 주전장이 되어 있는 넷-페미니즘의 양상과 현실적 사건들을 엮어가며 말해보고자 한다.


페미니즘은 정신병이다


촛불, 여성, 그리고 민주당에 대해서 말을 하자면 하릴없이 얼마 전 민주당이 한 당원 투표 이야기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 80%가 넘는 ‘당론’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당규를 바꾸기로 결정했다. 민주당은 왜 당원 투표를 하게 되었는가. 여성의 노동이 민주당 정권 하에서는 안전하지 못하다는 게 만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안희정·오거돈·박원순은 차례로 ‘여성들에게서 촛불을 빼앗아간 정권’의 상징이 되었다. 그들이 어떤 사람이었던가. 안희정은 2017년 대선 때 가장 처음 페미니스트를 천명한 이였고, 박원순은 서울대 신 교수 사건의 변호사였다. 박근혜를 무너뜨린 2016년 촛불 당시 전적인 지지를 표했던 이들이었으며, 서울의 주요한 거점들의 정책을 지휘하도록 사람들이 선출한 지자체장이었다.


촛불의 ‘빌런’ 쪽 주인공이었던 박근혜로 돌아가 보자. 박근혜는 2012년에 당선되었다. 세월호 사건은 2014년에 벌어졌고, 그런데도 2015년까지 사람들은 깊이 침묵했다. 지쳤기 때문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마치 포기한 듯 보였다. 어떻게 싸워도 우리를 위한 세상은 오지 않는 것 같았다. 뉴스에서는 일베가 화두가 되었고, ‘정치 냉소’가 문제라는 말이 둥둥 떠다녔지만, 그 냉소와 어떻게 싸워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문재인은 2017년에 당선되었다. 2018년 안희정, 2020년 오거돈과 박원순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폭로들에 문재인 정권은 어떤 책임 있는 답변을 내놓았던가. 여성의 힘을 말하던 여성들은 이제 이 정권을 신뢰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 알고 있듯이 거리에서 발현되는 민주주의란 본질에서부터 건설이 아니다. 거리의 민중들은 이미 건설된 부정을 파괴한다. 또한, 전부 박살 난 자리에 새로운 규칙을 세우길 기대한다. “민주주의가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라는 비유는 단순히 저항하는 이들의 희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넘쳐흐름”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다. 다수의 손에 주어진 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넘쳐흐른다”. 넘쳐 흐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붕괴하지 않는다. 즉, 민주주의는 규제의 이름이 아니다. ‘상식적으로’ 매끈하게 다듬어진 민주주의란 없다. 민주주의는 그런 상식에 대한 도전이다. 넘쳐흐름 앞에서 상식은 당연하게도 무력하다. ‘상식’을 담지한다고 스스로 믿는 이들이 분개하며 언급하는 “페미니즘은 정신병이다”라는 말에서, 이 사회는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이래, 끊임없이 배신당한 여성들의 ‘넘쳐흐름’을 읽어내야 한다


빙의의 정치와 '정상에서 만나자'


자신의 시대와 온전히 동떨어져 사고하는 사람이란 없다. 그리고 시대는 한 세대와 일군의 집단에 여러모로 영향을 미친다. 촛불을 들고 나가서 박근혜를 끌어내리고 정의를 실현하자고 말하던 당시의 여성들은 이제 “정상에서 만나자”고 말하며 “탈코르셋” 운동을 활발하게 진행한다. 비혼여성은 돈이 있어야 한다고, 주식과 적금을 말하며,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재테크 팁을 주고받는다. 물론 촛불 때도 이런 흐름이 없진 않았으나, 현재 이 흐름은 훨씬 더 강화되었다. 사회 정의를 말하던 이들은 왜 “먹고사니즘”과 함께 페미니즘을 말하게 되었는가.


2014년 세월호 이후, 안전에 대한 문제는 공론의 영역으로 크게 부상했다. 한국의 페미니즘 웨이브가 급물살을 타게 된 순간 역시 2016년 ‘강남역 화장실 살인사건’과 밀접하다. 세월호 이후 박근혜를 끌어내리고 나서, 우리 사회는 더 안전해졌는가? ‘강남역 화장실 살인사건’ 이후, 여성들에게 이 사회는 더 안전해졌는가? 디지털 성폭력 문제는 문재인 정권에서도 지속해서 불거졌다. 단순히 판결만이 문제가 아니다. 2018년에 드러난 스튜디오 비공개 촬영회 사진 유출 건은 모집책의 유죄가 확정되었음에도, 아직도 피해자의 이름을 구글에 치면 “유출 링크”를 찾는 연관검색어가 먼저 뜬다.


2018년 혜화역 시위, 2019년 이름 없는 추모제로 이어지는 불법촬영 문제에서, 여성들은 “나의 일상은 너의 포르노가 아니다”라고 외쳤다. 그러나 이 제기는 현재까지도 여전히 응답받지 못했다. 2016년에 “여자들이 날 무시해서” 살해했다는 가해자의 변명에 사람들이 분개한 이유는, 여성을 자신이 획책할 수 있는 도구로 보는 시선이 그 안에 명백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20년에는 조주빈과 문형욱이 성적인 도구로서 여성들의 멱살을 쥐고 삶을 착취해서 통해 돈을 버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왔다.


세월호 이후, 한국 사회는 세월호의 안경을 통해 세상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2016년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은 죽은 여성들의 안경을 통해 세상을 본다. 이는 죽은 여성과 자신을 분리할 수 없고, 죽은 여성을 이미 자기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이식, 혹은 빙의의 정치로서 드러난다. 가해자의 삶을 말하지 말고, 피해자의 삶이 어땠을지를 말하라는 요구는 이 빙의의 정치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다. 구하라·설리와 같은 연예인의 죽음도 동일 선상에 있다. 이들은 이미 죽은 이들의 삶을 자신의 삶에 얹고, 그들의 삶을 대신 산다. 이 젊은 페미니스트들의 ‘자기 관리’와 ‘성공 담론’은 사회가 이들(이미 죽은 이들을 몸에 싣고 있는)에게 어떤 안전도 제공해주지 못함을 말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 밀리언셀러로서 전세계에서 높은 호응을 얻고 있는 『82년생 김지영』이 ‘빙의물’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영화에서는 대중성을 위해 이 점을 상당히 약화해서 재현했으나, 소설에서는 ‘김지영’이 알지도 못하는 다른 여성들에게 ‘빙의’되어 말하는 오컬트적 장면이 높은 빈도로 등장한다). 


여성에 대한 폭력에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이들은 입을 모아 “우리는 서로의 용기”라고 말했다. 남성들이 쓰던 여성혐오적 말을 뒤집어서 “보돕보”를 말했다. 여성들끼리 서로 어깨를 걸고 맞서 싸우자고 했다. 그러나 사회가 이 투쟁에 응답하지 않음으로써, 이는 어떤 안전망도 없는 세상에서 독자 생존을 할 수 있도록 서로를 지키자는 말이 되었다. 자신의 시대와 온전히 동떨어져 사는 이가 없다고 위에서 언급한 건, 이 조류가 비단 여성에게만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남성들에게도 이 사회는 안전하지 않다. 그렇기에 공정의 문제는 더욱 크고 중요한 문제로 떠오른다. 청년들에게 ‘공정’이 중요한 가치이므로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를 말하기 전에, 왜 공정이 중요한 문제인지를 바라봐야 한다. 그 공정은, 공정이란 말이 무색하게 이리저리 뒤틀린다. 불안하기 때문이다. 시험에 합격한 나는 안전해야 하는데, 돈이 더 많아야 안전할 수 있을 텐데, 남자로 태어났으면 취직하기가 더 쉬웠을 텐데, 여자로 태어났으면 여성 할당제 때문에 취직하기가 쉬웠을 텐데, 승진 자리는 한정되어 있는데, 여자들은, 남자들은, 운동권 자식들은, 지방 사람들은, 비정규직들은, 수도권 대학 졸업자들은, 부당하게 이득을 얻으면서 내 삶을 위협한다는 감각이 끊임없이 ‘공정’을 말하게 한다.


“페미니즘은 정신병이다”라는 강력한 반동은 이 불안에 근거한다. 자신의 삶이 언제든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불안은, 무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대학교에서 총여학생회를 없애고, 위험에 대한 모든 호소를 자신에 대한 위협으로 연결짓는다.


페미니즘 내부의 분열도 이 불안과 연관된다. 2018년 혜화역 시위 주최 측은 “생물학적 여성”의 참여만을 허락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이는 이 시위 안에 남성을 받지 않는 동시에 적극적으로 경계적 인간을 배제하려는 시도다. 불안은 경계를 공고히 하고, 위협이 될 수 있는 모든 요소를―연대마저도― 거부하게 한다. 당시 이름을 드러내고 언론과 인터뷰를 했던 여성들에게 비난이 쏟아졌던 점도 짚어둘 필요가 있다. 이들은 생존의 방식으로서 “드러내지 않기”를 선택했다. 이는 정유라의 부정과 싸웠던 이화여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단순히 여성 쟁점에 한정되지는 않는 것이, ‘갑질 근절’을 외치던 대한항공·아시아나 노동자들도 그랬다). 폭력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삶을 공격할지 모르는 불안정 속에서, 신상을 밝히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이름을 걸고 말하는 이에게는 자연히 더 큰 발언권이 생긴다. 그러므로 이름을 밝힐 수 없는 타인의 발언권을 보장하기 위해 모두는 함께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 이는 넷-페미니즘에서는 끊임없는 “닉세탁 페미니즘”으로 드러난다.


바바라 크루거가 “Your body is battleground”라는 슬로건을 내세웠을 때, 이 배틀은 출산의 자기결정권에 관한 쟁점을 토대로 했지만, 현재 이 말의 의미는 훨씬 넓어졌다. 일군의 여성들에게 페미니즘이란 “탈코르셋”이며 “탈덕”이다. 세상이 나에게 주입한 욕망에서 벗어나기 위한 과정이며, 이건 어떤 의미에서 수행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머리를 자르고 화장품을 부수고, 그것을 ‘인증’하는 것까지가 운동의 사이클이다. 여기에는 머리를 기르고 화장을 하는 여성들에게 “탈코”를 함께 하자고 요청하는 것(하지 않고 페미니즘을 ‘참칭’할 때는 공격하는 것)까지도 포함된다. 남자 아이돌에게 돈을 바치지 않고, 꾸밈노동하는 여자 연예인을 ‘소비’하지 않음으로써 여성의 위치를 높이고 안전을 확보하고자 한다. “탈코르셋”운동이 자기계발 논의와 찰싹 붙어서 나타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꾸미지 않음으로써 “자기계발” 할 시간을 확보하고, 이를 통해 “성공”할 수 있다. 주식투자를 하고 승진하고 “정상”으로 갈 수 있다. 불안에 기초한 자기계발 페미니즘 담론에서 여성의 몸은 그야말로 (타자뿐만 아니라 여성들 자신을 포함한) 권력이 현현하는 정체성의 표지가 되었다. 경계를 흐트러뜨리는 페미니스트들은 다른 여성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존재로서 마땅히 공격받아야만 한다.


불신의 값을 치를 방도


코로나19 상황에서 20대 여성의 자살율은 2배로 늘었다. 여성 비정규직 일자리는 ‘돌봄노동’과 ‘대면 서비스업’에 집중되어 있다. 여전히 남성보다 여성은 더 유연한 노동에서 일하고 있고, 여성의 일자리는 더 질이 나쁘다. 재난 상황은 더 취약한 위치에 놓인 이들의 바닥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뚜렷하게 보여줬다. 사회는 이 여성들에게 “성공해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 외에 어떤 대안을 제시했는가? 안희정·오거돈·박원순이 차례로 증명한 불안정의 공간 속에서, 전태일·이한열은 어떤 의미가 될 수 있는가? 촛불과 젠더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면, 그 촛불 안에 여성이 있었는지부터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지금이 그렇듯, 앞으로의 여성들도 결코 오롯한 자신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먼저 죽어간 여성들의 혼을 싣고 달리는 여성들은, 이제 더욱 확장된 형태의 사이보그다. 자신의 이름을 끊임없이 버릴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의 이름이 중요하지 않은, 서로가 서로의 없는/지워진 이름을 대신하는 ‘초월적 집단’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마 이후의 싸움도 계속 그럴 것이다. 이들을 위협하고 억압하는 존재도 초월적이기 때문이다. 조주빈과 갓갓이라는 가해자의 이름으로만 대변되지 않는, 구하라의 동영상과 비공개 촬영회의 유출 링크를 찾아 헤매는 ‘시스템’이 그렇다.


21대 국회에서 선출된 2, 30대 여성 국회의원들의 활동이 말해주는 것들이 있다. 원피스를 입고 국회에 들어섰을 때, ‘가해자’로 특정되지 않는 ‘초월적 가해’가 전방위로 쏟아졌다. 이들이 박원순에게 조의를 표하지 않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들은 끝내 조의를 표하지 않았다. 표해선 안 되었다. 그건 ‘촛불’의 이름을 가져간 이들이 어떻게 여성들을 배신했는지를 만천하에 드러낸 일이었기 때문이다. 2018년에 미국에서는 체조대표팀의 남자 의사가 어린 여자 선수들을 치료 명목으로 오랜 시간 동안 성추행한 일이 폭로되었다. 이 재판에서 한 피해자는 “소녀들은 영원히 어리지 않다, 성장해서 당신의 세계를 박살내러 돌아올 것이다” 라고 말했다. 박근혜 정권은 붕괴함으로써 불신의 값을 치렀다. 이제 문재인 정권은 어떻게 이 불신의 값을 치를지를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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