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사
: 회복의 가망이 없는 중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생명을 단축시켜 사망케 하는 의료행위
지난 주 일요일 아침, 병원으로 전화 한 통이 왔다.
이전 차트를 보니, 아이가 밤새도록 소리를 지르고 집 곳곳을 빙글 빙글 돌아다니면서 벽에 이 곳 저 곳 부딪힌다며 혹시 내복약 처방이 가능한지 내원했던 이력이 있었다.
당시 진료를 보았던 수의사는 통증에 의한 가능성을 고려하여, 진정 진통제가 처방되었었다.
근데 무슨 일로 전화가 왔을까?
보호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선생님, 혹시 안락사도 가능한가요?"
보호자는 안락사라는 단어를 내뱉는 동시에 울음을 터뜨렸다.
나 역시도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일단 보호자를 진정시키고 병원에 내원하여 상담하실것을 권유했다.
아이 상태가 어떠한지, 어떤 이유에서 안락사를 하려는지 전화로 묻기에는 안락사라는 단어는 보호자도 나도 쉽게 꺼낼 수 없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전화를 끊고 얼마되지 않아 보호자는 아이를 품에 폭 안고 내원했다.
17살. 아이는 기저귀를 차고 있었고, 오랫동안 눈병을 앓았었는지 아이의 눈은 하얗게 말라 있었다.
"선생님, 아이를 이제는 편하게 보내주고 싶어요. 아이가 너무 아파하는것 같아요.
제 욕심때문에 아이를 괴롭게 하는것 같아요. 나이가 들면서 대소변을 못 가리고, 심장병이 있어서 심장약도 몇 년 째 주고 있는데, 이제는 밤새도록 소리를 지르고 돌아다니면서 부딪히는데, 그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서 안될 것 같아요."
보호자는 굉장히 많은 고민 끝에 결정하고 내원한 것 같았다.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안락사에 대한 마음은 확고했다.
안락사 과정에 참관하고 싶지도 않고, 안락사 전에 아이와 마지막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원치 않아 했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마음이 약해질 것 같다고 했다.
여기서 나는 보호자가 아직은 아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음을 느꼈고, 지금의 결정이 보호자와 아이 모두에게 평생의 후회가 될 것임을 직감했다.
몇 번의 안락사를 진행하면서 느낀 점은 안락사를 고민하고 병원에 오는 보호자들은
그 누구보다 아이를 사랑하고 아끼는 보호자들이다.
24시간 아이 옆에서 대소변을 받아주고, 아침저녁으로 꼬박꼬박 약을 먹이고, 밥과 물을 챙겨주고, 몸을 정성껏 닦아주는 보호자들이다.
하지만 그런 보호자들도 무너지는 순간이 있는데, 몇 년 째 잘 버텨주던 아이들이 어느 순간 고통에 힘겨워 밤새 소리를 지르고 시름시름 앓는 소리를 낼 때, 그토록 좋아하던 간식도 먹지 않으려고 하고,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순간에 보호자들은 무너지는 것 같았다. 누군가는 안락사를 결정한 보호자를 손가락질하지만, 내가 겪어온 보호자들은 결코 아이를 케어하기 힘들어서 안락사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 자신의 욕심 때문에 아이를 붙잡고 있는것이 아닌가 싶은 마음에 안락사를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보호자들이 안락사를 결정하고 내원했을 때는 그런 보호자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안락사를 결정한 보호자에 대해서 함부로 이야기 할수가 없다.
안락사 과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표현자체가 부적절하지만 정말 간단하다. 작은 주사바늘 카테터를 장착하고 안락사 약물들이 들어가면 아이들은 금새 숨을 멈추게 된다.
밤낮으로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고민하고 처치하는 손으로 주사액을 밀어넣으면 아이들의 생명은 허무하리만큼 불과 몇분만에 꺼져버린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을 느끼는 순간이다.
'더 살고 싶어하는 아이들의 생명을 내가 함부로 앗아가버린것은 아닐까?'
'누군가의 생명을 거둬갈만큼 나는 대단한 사람인가?'
'아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기에 이 또한 수의사가 감내해야 할 처치일까?'
보호자 품에 안겨서 보호자를 바라보던 아이들의 맑은 눈동자는 정말 영혼이 빠져나간다는 표현이 이렇구나 싶을 정도로 차갑게 초점을 잃고, 함께 참관하는 보호자들은 마지막 이야기를 아이에게 쏟아낸다.
"미안하다, 해피야, 미안하다, 해피야. 너가 힘들어해서 너를 보내주는거야. 결코 너를 포기한게 아니야. 서운해하지말고 이제는 아프지말아 해피야."
"미안하다. 뚱아. 다음생에는 동물이 아닌 사람으로 꼭 엄마 딸로 태어나라. 더이상 아파하지 말고 극락왕생 하거라. 부처님앞에서 기도할께. 뚱아"
안락사 과정이 너무나 힘들기에 이제는 나름의 기준도 가지게 되었다.
기준을 정한다는 자체가 오만한 생각이지만,
기준 없이 안락사를 결정하고 실시하는 것이 더 무책임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첫번째는 아이 스스로 밥을 먹으려고 하는가이다.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삶의 의지를 간접적으로나마 판단하는 나만의 기준이다.
스스로 밥을 잘 먹는 아이들은 보호자가 의지가 확고하더라도 안락사를 시행하지 않는다.
밥을 스스로 먹는다는 것은 살아갈 에너지를 채우려는 본능적인 행위이다.
아이는 살고 싶어하는데 보호자의 판단으로 생명을 거둔다는 것은 보호자와 아이와 함께 해온 길고 긴 여정의 말도 안되는 결말이라고 생각한다.
두번째, 의학적으로 더 이상 해줄수 있는 처치와 치료방법이 없는가?
온몸에 암세포가 전이되어 폐까지 침습한 아이들은 사실 해줄수 있는 처치가 없다.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약물치료가 가능하나 내복약은 먹이기가 쉽지 않고 사람처럼 호스피스병동이 있는것도 아닌지라 병원에서 관련 처치를 하다가 보호자 곁이 아닌 병원에서 떠나는 것은 보호자나 아이 모두에게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다행히도 이번에 내원한 아이는 밥을 너무 잘먹는다고 했다.
물은 보호자가 매일매일 주사기로 먹이지만 밥은 너무 잘먹는다고 했다.
안락사 동의서도 작성을 하고 정맥카테터도 장착을 했지만, 보호자를 설득했다. 처치실에 아이를 보내고 진료실에 앉아있던 보호자도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다.
"선생님, 저도 정말 모르겠어요. 어떻게 해야되요? 이게 맞을까요? 아이는 힘들어하는데 내 욕심 때문에 아이를 붙잡는 것 같아서요. 저도 판단이 안되요. 아이는 나랑 있고 싶어할까요? 아니면 너무너무 고통스러워하는걸까요?"
밥을 먹는 다는 것 자체가 살고싶다는 의지라는 내 말에 보호자는 결국 한 번 더 다른 약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증상들을 봤을 때 통증때문 일수도 있지만, 인지장애증후군이거나 뇌쪽 문제로 인한 증상으로 고려되어 다른 약을 처방해서 돌려보냈고, 그날 저녁 아이의 안부를 물었다. 아이는 약을 먹이고 지금은 새근새근 잘 자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보호자는 너무나 감사하다고 말을 했다.
의사표현을 할수 있는 사람에서도 안락사는 많은 논란이 있는데, 하물며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안락사 결정은 감히 내가 혹은 보호자가 할수 있는것일까?
오늘도 같은 생각을 해 본다.
아이들이 말을 할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