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스카, 팬에게 룰북을 건넨 리그 -FanCase17

'관객'을 '협업의 파트너'로 바꾼 18년의 실험

by 박찬우
당신은 우리 차들이 한 줄로 늘어서서 다시 출발하는 게 지루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줄로 바꾸었습니다.


미국 모터스포츠 나스카(NASCAR)가 2009년 팬들에게 보낸 메시지의 요지입니다. 한 스포츠 리그가 자기 종목의 핵심 규정을 팬의 의견을 듣고 바꾸었다는 사실, 우리에겐 좀 낯설죠. 지난 18년 동안 나스카는 팬을 ‘관람의 대상’이 아니라 ‘경기의 공저자(co-author)’로 격상시키는 실험을 묵묵히 이어왔습니다. 제가 보아온 팬덤 전략의 진화 사례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산업 사례 중 하나입니다.


잠깐, 나스카(NASCAR)가 뭐죠?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나스카(NASCAR)라는 스포츠가 다소 낯설 수 있어 짧은 안내를 두고 가겠습니다. 저는 나스카를 톰 크루즈의 1990년 영화 '폭풍의 질주(Days of Thunder)'로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그저 잘 만든 카레이싱 영화 한 편으로만 봤지, 그 굉음과 타원형 트랙이 어떤 산업과 문화를 떠받치고 있는지는 한참 뒤에야 알게 됐죠.


common (19).jpg 영화 '폭풍의 질주'


풀네임은 ‘National Association for Stock Car Auto Racing’, 우리말로는 ‘전미 스톡카 경주 협회’입니다. 1948년 빌 프랜스 시니어(Bill France Sr.)가 플로리다주 데이토나 비치에서 창립한 이래 78년간 이어져 오고 있는 미국의 대표적 모터스포츠 기관이죠. 지금까지도 프랜스 가문이 운영하는 가족 경영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도 미국 스포츠계에서 흔치 않은 특징입니다.


여기서 핵심 키워드는 ‘스톡카(stock car)’입니다. F1이 이 세상에 단 한 대도 양산되지 않은 순수 경주 머신으로 트랙을 달린다면, 나스카는 시판 양산차의 외형을 본뜬 차량으로 경쟁합니다. 쉐보레 카마로, 포드 머스탱, 도요타 캠리. 일반 시민이 길에서 타고 다니는 차의 모양 그대로, 시속 320km로 트랙을 도는 풍경입니다. 여러분이 출퇴근길에 타는 차와 똑같이 생긴 차가 한계까지 달린다는 친밀감, 이게 나스카를 미국적 스포츠로 만든 정서적 핵심이죠.


htm_2011021200004060006010-001.jpg 데이토나 트랙

트랙도 다릅니다. F1이 스파, 모나코, 스즈카 같은 굽이진 로드 코스를 무대로 한다면, 나스카의 주된 무대는 좌회전만 끝없이 반복되는 거대한 타원형(oval) 코스입니다. 데이토나, 탤러디가, 인디애나폴리스 같은 전설적 트랙들이 이 종목의 성지입니다.


규모도 만만치 않습니다. 나스카는 한 시즌에 북미 전역에서 1,200회가 넘는 공인 경주를 주관합니다. 미국에서 한때 NFL 다음 2위 시청률을 기록한 스포츠로 자리 잡아왔고, 150여 개국 20여 개 언어로 중계됩니다. 라이선스 상품 매출만 연간 30억 달러를 넘죠. 시즌 개막을 알리는 데이토나 500은 미국 모터스포츠의 슈퍼볼이라 불릴 만큼의 상징성을 가집니다.


다만 제가 나스카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 화려한 외형 때문이 아닙니다. 글로벌 조사기관들이 ‘미국 스포츠 중 가장 충성도 높은 팬을 보유한 종목’으로 반복해 인용해 온 리그가 바로 나스카거든요.


MarketCast, YouGov, Wasserman 같은 기관이 NFL, NBA, MLB와 비교한 거의 모든 항목에서 나스카 팬은 가장 높은 수치를 보입니다. 이 충성도가 도대체 어디에서 왔는가. 그 답을 따라가는 여정이 바로 이번 FanCase의 본론입니다.


텅 빈 그랜드스탠드, 그리고 발상의 전환


이야기는 위기에서 시작됩니다. 2000년대 후반 나스카는 수십 년간 이어진 관중과 시청률 동반 성장세가 갑자기 꺾이는 경험을 했습니다. 시즌 막판 평일 경기에는 그랜드스탠드의 절반 이상이 비기 시작했고, 시청률 하락도 멈추지 않았죠.


당시 나스카의 시장조사 책임자였던 브라이언 모이어(Brian Moyer)는 이 시기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합니다. "최고의 고객이 이 스포츠의 모든 지표를 움직입니다. TV 시청, 라이선스 상품 판매, 경기장 방문, 모든 것이 우리 스포츠와 진정으로 연결된 사람들에 의해 움직입니다. 그들이 우리의 앰배서더입니다."


fan-council-logo.jpg


이 한마디 안에 발상의 전환이 담겨 있었습니다. 나스카는 시장조사 회사의 정량 보고서를 들춰보는 대신, 가장 열렬한 팬들을 직접 카운슬(Council)에 앉히기로 결정합니다. 2008년 캐나다의 인사이트 커뮤니티 플랫폼 비전 크리티컬(Vision Critical, 현 Alida)과 손을 잡고 출범한 것이 ‘공식 나스카 팬 카운슬(Official NASCAR Fan Council)’입니다. 출범 당시 12,000명으로 시작한 이 커뮤니티는 무료 가입제이지만 대기자 명단까지 만들어질 만큼 인기를 끌었고, 2019년 무렵에는 25,000명 규모로 자라났습니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 팬 카운슬이 보여준 연구 효율성의 도약입니다. 비전 크리티컬과 나스카가 공개한 사례 보고에 따르면, 팬 카운슬 출범 이후 나스카는 시장조사 비용을 80% 절감하면서도 연구 데이터의 양은 세 배로 늘렸습니다. 이 성과는 2009년 포레스터 그라운드스웰 어워드(Forrester Groundswell Award) 수상으로 공식 인정을 받았죠.


여기서 모이어가 남긴 또 한마디가 의미심장합니다. "팬들이 우리에게 의견을 내주는 데 어떤 인센티브도 필요 없었습니다. 그들은 팬 카운슬의 일원이라는 사실 자체를 명예로 여겼습니다."


여러분, 이 문장을 한 번 더 음미해 보시죠. 팬에게 발언권을 주는 행위, 그 자체가 가장 강력한 인센티브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흔히 굿즈와 할인쿠폰으로 팬을 ‘관리’하려 할 때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 문장이 정확히 짚어줍니다.


공식 나스카 팬 카운슬(Official NASCAR Fan Council)의 운영


‘팬 자문위원회’라고 하면 보통 분기 1회 모여서 다과회 하는 그림이 떠오르죠. 나스카는 전혀 다릅니다.


가입 자격은 단순합니다. 만 18세 이상, 미국 거주자, 나스카에 열정적인 팬이라는 세 조건뿐입니다. 가입비는 없습니다. 다만 누구나 즉시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죠. 신청서를 내면 대기자 명단에 올라가고, 나스카가 주기적으로 후보자를 검토해 새 멤버를 받아들이는 방식입니다. ‘무료인데 대기자 명단이 있다’는 이 묘한 구조가, 가입 자체에 일종의 명예감을 부여합니다.


활동 강도는 어떨까요? 멤버에게는 한 달 평균 두 차례 이상 설문이 발송됩니다. 시즌이 진행될 때는 사실상 매주 의견을 묻는 체계가 가동되죠. 모든 멤버가 모든 설문에 응답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멤버십이 유지되지 않습니다. 즉, ‘이름만 걸어두는 자문위원’이라는 명예직과는 작동 원리가 다릅니다.


다루는 주제도 광범위합니다. 경기 결과와 중계 품질, 트랙 현장 경험에서부터 광고 정책, 신규 룰 검토, 마케팅 결정까지. 우리가 흔히 ‘이건 전문가가 결정해야지’라고 무심코 분류해 버리는 거의 모든 의사결정이 카운슬 멤버의 응답률 높은 설문 위에 올라가 있는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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