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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후 코드; 1. 오타쿠에서 덕후까지

실제적인 전문가 덕후와 함께하는 덕후 마케팅

by 박찬우
SONY SL-J9 베타맥스 비디오 레코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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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에서 방영되는 애니메이션을 실시간으로 보는 것이 전부였던 시절, 1980년 Sony SL-J9의 등장은 오타쿠 문화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Sony SL-J9는 1980년 출시된 베타맥스 방식의 최고급 비디오카세트 레코더였습니다. 당시 신입사원 월급의 3배에 육박하는 298,000엔(1980년 기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가격으로 출시되었습니다. 이는 대략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수백만 원대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SL-J9의 가장 큰 특징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녹화 성능이었습니다. 스테레오 녹음 기능, 타이머 예약 녹화, 2주 4 프로그램 예약 기능 등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능을 모두 탑재했습니다. 특히 헤드 클리닝 시스템과 베타스캔(고속 화면 검색) 기능은 다른 기기와 차별화되는 요소였습니다.


흥미롭게도 베타맥스는 VHS와의 표준 전쟁에서 패배했지만, 오타쿠들 사이에서는 화질이 우수한 베타맥스가 선호되었습니다. 특히 애니메이션의 섬세한 작화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베타맥스의 우수한 화질이 필수적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이 기기는 단순한 전자제품이 아니라, 1980년대 오타쿠 문화가 꽃피울 수 있었던 핵심 인프라였습니다. SL-J9 덕분에 애니메이션을 실시간으로 보는 것에서 벗어나 녹화하여 반복 시청하고, 수집하고, 분석하고, 커뮤니티와 공유하는 오타쿠 문화의 기본 패턴이 확립되었습니다.


특정 대상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오타쿠와 덕후는 팬과 출발점을 같이 합니다. 따라서 오타쿠의 속성을 살펴보는 것은 팬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인사이트를 제공합니다. 이어지는 두 번의 이야기로 나누어 덕후와 덕후코드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존중의 호칭에서 시작된 '오타쿠'


일본어 '오타쿠(おたく)'의 어원은 본래 '당신' 또는 상대방의 집을 높여 부르는 '귀댁(貴宅)'이라는 2인칭 대명사입니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걸쳐, SF나 애니메이션, PC 등 같은 취미를 가진 이들이 동호회에서 만났을 때, 서로에 대한 예의와 존중을 표하기 위해 "당신(오타쿠)께서는 이 작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묻던 것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모여있는 곳에서는 이곳저곳에서 '오타쿠' 소리가 들렸고, 이것이 자연스럽게 그들을 부르는 호칭이 되었다는 것이 여러 유래설 중 가장 유력한 이야기입니다.


이는 초기 오타쿠 문화가 비록 외부와는 단절된 폐쇄적 성격을 띠었을지라도, 커뮤니티 내부에서는 상호 전문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전문가 집단의 성격을 가졌음을 시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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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89년 미야자키 쯔토무 사건을 계기로 오타쿠는 부정적 이미지로 사회에 각인되었습니다. 1988년부터 1989년 사이 4명의 영유아를 유괴 살인한 미야자키 쯔토무의 집에서 6,000여 개에 달하는 비디오테이프와 애니메이션, 만화책이 발견되자, 언론은 그의 범죄를 '오타쿠식 범죄'로 규정하며 특정 취미에 몰두하는 이들을 잠재적 범죄자 혹은 사회 부적응자로 묘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오타쿠'는 본래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하고, 사회성이 결여된 채 자신만의 세계에 틀어박혀 비정상적인 욕망을 품는 음습한 존재라는 부정적 낙인이 깊게 찍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일본 사회에서 오타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극도로 강화시켰고, 1990년대 내내 경멸적인 어조로 사용되었습니다.


'오타쿠'에서 '오덕후', 그리고 '덕후'로


1998년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후, '오타쿠'라는 단어와 문화는 한국으로 본격적으로 유입되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어 화자들에게 '오타쿠'라는 발음은 다소 어색하게 느껴졌고, 이는 점차 한국식 발음에 가까운 '오덕후'로 변형되어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여기서 앞 글자인 '오'를 떼어낸 축약형 '덕후'가 널리 쓰이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단어는 일본에서의 어둡고 부정적인 맥락에서 점차 벗어나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됩니다. '덕질(덕후로서 하는 활동)', '입덕(어떤 분야의 덕후가 됨)', '덕밍아웃(자신이 덕후임을 주변에 밝힘)' 등 다양한 파생어가 생겨나며, '덕후'는 한국의 문화적 토양에 완전히 뿌리내린 독자적인 개념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한국에서는 '오타쿠'가 '오덕후'로, 다시 '덕후'로 변화하면서 독특한 문화적 진화를 거쳤습니다. 일본의 오타쿠가 아키하바라처럼 특정 구역에 집중되어 대중문화와 차별화된 채 성장했다면, 한국의 덕후 문화는 대중문화에 서서히 스며들며 확산되었습니다. 덕후라는 표현은 애니메이션과 게임을 넘어 아이돌 덕후, 밀리터리 덕후, 고기 덕후처럼 다양한 분야로 확장되며 오타쿠보다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일본의 오타쿠 vs. 한국의 덕후: '수집'에서 '공유'로의 진화


일본의 '오타쿠'와 한국의 '덕후'는 그 뿌리가 같음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차이를 보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단순한 언어적 변용을 넘어, 기술 인프라가 문화의 성격을 어떻게 근본적으로 바꾸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전통적인 일본의 오타쿠는 특정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을 바탕으로 관련 상품(굿즈)을 수집하고 분석하는 데 집중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들의 활동 목적은 외부에 보여주기 위함이 아닌, '스스로의 만족'과 지적 탐구에 있습니다. 코스프레를 하거나 관련 행사에 직접 참여하는 등 적극적인 외부 활동을 해야 비로소 오타쿠로 인정받는 등, 커뮤니티 내부의 기준이 명확하게 존재합니다.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비사교적, 비사회적이라는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는 오타쿠 문화가 형성되던 시기의 물리적, 아날로그적 환경에 기인합니다. 동호회 활동과 같은 대면 교류가 중심이었기에, 그들의 문화는 자연스레 폐쇄적이고 내부 지향적인 성격을 띠게 된 것입니다.


반면, 한국의 덕후는 '수집'을 넘어 '공유'와 '자기표현'을 핵심 가치로 삼습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인터넷 인프라와 SNS의 발달은 덕후 문화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었습니다. 한국의 덕후들은 자신의 '덕질' 과정을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적극적으로 외부에 공유하고, 타인과 소통하며 강력한 유대감을 형성합니다. 이들에게 덕질은 '나는 이런 것에 깊이와 열정을 가진 사람이다'라는 정체성을 구축하고, 이를 통해 사회적 관계를 맺는 새로운 방식입니다. 일본 오타쿠가 가진 폐쇄성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는 지점입니다. 흥미롭게도, 이렇게 한국에서 재탄생한 '덕후'라는 단어는 K-POP 팬덤을 통해 다시 일본으로 역수출되어 사용되기도 합니다.


덕후 vs 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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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대상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는 출발점이 같은 의미에서 덕후와 팬은 흔히 혼용되지만, 실제로는 문화적 태도와 몰입 방식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 차이는 단순히 ‘좋아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좋아하고, 얼마나 깊이 참여하느냐의 문제입니다.


팬과 덕후의 차이는 무엇보다 몰입의 정도와 열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팬은 일반적으로 좋아하는 대상에 애정을 가지고 즐기는 정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돌 사진을 보고 예쁘다 좋다 하면서 즐기지만, 용량이 부족하면 이미 본 영상이나 사진은 지우기도 하죠. 반면 덕후는 좋아하는 대상에 훨씬 더 깊이 몰입하고 열정적으로 소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단순히 즐기는 것을 넘어, 해당 분야의 '전문가' 수준으로 파고듭니다. 드라이브 용량이 꽉 차도 아까워서 못 지우고 드라이브 용량을 키우는 경우가 덕후들에게 더 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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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 중심 관점과 디지털 크라우드 컬쳐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기업의 디지털 마케팅 전략과 브랜드 팬덤 구축을 위한 맞춤형 컨설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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