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동네의 코흘리개들 앞에서 재주를 부리며 낮은 줄을 타고 때로는 왕이나 높은 곳에 계신 분들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높은 줄을 타기도 해. 빨강과 하양으로 화장을 하고 파랑과 노랑으로 물들인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고 줄 위에서 몸을 구부렸다가 폈다가 굴렀다가 높이 뛰었다가 빙글빙글 돌면 색색의 공이 되고 팽이가 되지.
한번은 공중에서 두 바퀴를 돌았는데, 공중에 거꾸로 떠 있던 그 찰나의 순간에 시간이 멈추어버린 적이 있었어. 발 아래로는 하늘의 구름이 흘러가고, 머리 위로는 땅에 거꾸로 붙어 있는 사람들의 손바닥만한 얼굴이 보였지. 그때처럼 사람들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본 적은 없었어. 나는 세상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줄타기 연습만 하면서 살아가니까.
내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서커스 단장님은 내가 평생 피해야 할 게 두 가지 있다고 하셨어. 하나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삶이라고. 줄타기를 할 때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그저 관객일 뿐 사람은 아니라고 하셨어. 그리고 내게는 삶 대신 줄이 있다고 말씀하셨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언제나처럼 줄타기 연습에 매달렸어.
그러던 어느 날 그랑프리가 죽었어. 삼십여 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공연을 했던 성실한 코끼리 그랑프리가. 나는 태어날 때부터 그랑프리와 같이 지냈어. 밤에는 언제나 그랑프리한테 기대서 잠을 청했지. 그랑프리가 죽던 날 밤엔 아주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 마치 집을 잃은 것 같았거든. 사실 나한텐 집이 없지만. 잠이 안 와서 밤새도록 서 있었어.
다음날에도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줄을 타야 했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서 균형을 잃고 줄에서 떨어졌지. 줄 위에서는 눈물 한 방울도 무게니까. 공연을 망쳤다고 아버지한테 채찍으로 맞고 있는데, 그랑프리가 살아 있을 때 하던 말이 귓가에 울렸어.
"이름이 있어야 해. 이름이 있어야 해."
그랑프리는 꼭 그렇게 두 번씩 말하는 습관이 있었거든.
사실 나는 이름이 없어. 처음부터 없었지. 나를 부를 사람이 없으니까 이름이 없어도 아무렇지도 않았어. 아버지가 사람은 피해야 한다고 하셨으니까. 관객들은 나를 광대라고 불렀고 아버지는 나를 '아무개'라고 불렀지.
나는 그랑프리가 몸을 누이던 짚더미 위에 누워서 녀석이 밤마다 바라보던 점박이별을 찾아봤어.
"저 점박이별의 이름은 라밀이야. 저 점박이별의 이름은 라밀이야."
그랑프리는 말했지. 그때부터 나는 나를 라밀이라고 부르기로 했어. 공중에서 두 바퀴, 세 바퀴를 돌 때마다 마음속으로 라밀, 라밀 하고 내 이름을 불렀어. 그 다음부터는 거의 실수를 하지 않았어. 아버지한테 매 맞는 일도 없었고. 대신 공연 횟수가 늘어났지. 아버지는 점점 더 높은 곳에서 줄타기 연습을 시켰어.
그런데 이상하지. 언제부터인가 줄 위에서 잠을 자는 거야, 내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내내 줄타기를 하고 있어. 실수도 안 하고 떨어지지도 않고 줄 위에서 묘기를 펼치면서 그 상태 그대로 나도 모르게, 아니 아무도 모르게 잠을 자고 있더라고. 아찔한 절벽 위에서 줄타기를 하던 날도 그랬어. 왕이 다른 나라에서 온 높으신 분들과 함께 관람하러 오셨으니 아주 잘해야 한다고 아버지는 몇 번이나 말씀하셨지. 그날 공중에서 두 바퀴를 돌고 있을 때 나는 분명히 자고 있었어. 줄 위에서 색색의 깃털이 되어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를 돌고 있는데 잠꼬대를 하는 내 목소리가 들렸어. '나는 광대, 줄타기를 하지. 나는 라밀, 집을 짓지. 공중에 집을 그리지. 하늘로 뛰어오르는 게 아니라 집으로 들어가. 거기에 집이 있지.'
관객들의 박수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어. 아버지가 수고했다고 빵을 하나 더 주시더라고. 그날 밤 나는 짚더미 위에 앉아 빵을 먹으며 점박이별에게 물었어.
"라밀, 삶이 뭐야? 아버지가 피하라고 했던 삶이 대체 뭐지? 내게는 삶 대신 줄이 있대. 그럼 내가 줄을 주면 줄 대신 삶이 나한테 오는 걸까?"
점박이별은 언제나처럼 반짝이며 깜빡이고 있었어.
다음날 아침 아버지에게 찾아가 십 년 동안 타던 줄을 드렸어.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창고 뒤로 끌고 가더니 온몸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채찍으로 때렸어. 그리고 나를 창고에 가두었지. 창고 안에서는 점박이별이 보이지 않았어. 컴컴한 데서 빵도 물도 없이 누워 있으려니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가 없었지.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는데, 누군가 문을 열어주었어. 아버지가 죽었대. 서커스단은 뿔뿔이 흩어지고. 그러니 아무개 너는 이제 자유의 몸이라고 말이야.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뛰기 시작했어. 배가 부를 때까지 시냇물을 마시고 지쳐서 더 이상 뛸 수 없을 때까지 달리고 또 달렸어. 그날 하루는 그랬어. 그런데 잠이 오지 않는 거야. 이곳저곳을 떠돌면서 일도 하고 빵도 먹는데 잠이 안 와. 눈의 실핏줄이 다 터져서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든 데도 잠을 잘 수가 없어. 고통스러워서 더는 견딜 수가 없겠더라고.
어느 날 밤, 나는 높은 절벽으로 올라가서 예전처럼 줄을 매달았어. 그리고 줄 위에 올라섰어.
"라밀, 집으로 돌아가야지." 나는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돌아. "집으로 가서 잠을 자야지." 두 바퀴를 돌아. 그랑프리가 점박이별을 바라보며 하던 말이 귓가에 들려. "라밀, 너는 나의 집. 너는 나의 집." 스르르 눈이 감겨. 이제 잠이 오는 건가. 좀더 높이 뛰어올라 세 바퀴를 돌아. 발 아래로 은하수가 흘러. 꿈을 꾸는 건가. 코끼리 그랑프리의 늙고 지친 얼굴이 보여. 사람들이 나를 보면서 웃어. 나는 오줌을 싸면서 하늘로 떨어져. "라밀, 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