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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낯선 곳에서 Mar 08. 2024

[볼리비아] 인터넷, 자동차 없는 오싹한 섬에서 하룻밤

볼리비아 태양의 섬에서

볼리비아를 여행하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대부분의 주요 도시가 안데스 산맥의 고원 지역인 알티플라노(Altiplano) 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어딜 가든 고도가 높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고산 도시에 적응이 되지 않은 외지인이 이곳에 정착해서 살기란 쉽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볼리비아는 중남미 국가들 중에서 원주민 비중이 가장 높은 국가이다. 인디오 문화와 전통이 현재까지 잘 보존되어 있어 볼리비아의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것의 근간이 되고 있다.


볼리비아에서 잉카 제국과 원주민의 유산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태양의 섬(Isla del Sol)이다. 잉카 신화에 따르면 태양의 섬은 태양신을 숭배하는 신성한 장소로 여겨졌다. 섬의 이름에 '태양(Sol)'이 들어가듯, 태양 신의 탄생지라는 설화가 내려온다.

태양의 섬에 도착하면 바로 만나볼 수 있는 태양의 신전

태양의 섬에 가기 위해선, 먼저 티티카카 호수를 끼고 있는 '코파카바나(Copacabana)'라는 도시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티티카카 호수는 해발 3,800미터에 위치한 세계에서 고도가 가장 높은 호수이다. 코파카바나에서 바라본 호수는 마치 바다와 같이 끝이 보이지 않았다. 과거 잉카 제국 시대에는 이 호수에 선박을 운행하면서 도시 간 경제적 교류와 통신망으로써 활용했고, 그로 인해 호수 주변 도시들이 매우 번영했다.


코파카바나 항구. 이곳에서 티티카카 호수에 있는 여러 섬들을 잇는 선박을 운행한다.

태양의 섬에는 자동차, 오토바이가 허용되지 않고 아스팔트 도로도 없다. 그래서 이곳은 전세계 백패커들의 트레킹 성지이며, 현대 문물과 잠시나마 작별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북섬과 남섬으로 나뉜 이 섬을 한 바퀴 걷는 데는 약 3시간이 소요된다.


태양의 섬에 도착하여, 태초의 자연의 모습 그대로 유지된 이 섬에서 트레킹을 신나게 즐겼다.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강도나 소매치기의 위협으로 늘 긴장하면서 가벼운 산책 정도 밖에 하지 못하는게 아쉬웠다. 그래서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자유롭게 내가 가고 싶은 곳을 마음껏 걸어 다녔다. 치안이 안 좋은 곳에 살다 보면 한국에서의 평범했던 일상이 그립다. 노래 들으며 버스 타기, 도로에서 마음대로 걸어 다니기, 밤에 이곳저곳 돌아다니기 등등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자연 그대로를 느낄 수 있는 태양의 섬. 저 멀리 보이는게 바다가 아니고 호수라는게 놀랍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약 30분을 걸었을 무렵, 갑자기 스트리밍 음악이 재생되지 않았다. 라파스에서 구입한 선불 유심 데이터가 모두 소진되어 인터넷이 끊긴 것이었다. 주변에 유심을 파는 곳도 없고, 전화도 터지지 않아 데이터 충전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순간 나는 인터넷이 없는 여행이 두려워졌다.

여행을 하다 보면, 인터넷 정보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식당을 가기 전엔 꼭 평점과 한국인들의 리뷰를 보고 가고, 목적지에 가기 위해 최적 루트를 검색하여 걷다 보면 새롭게 경험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놓치기도 했다. 낯선 풍경을 직접 보고 느끼면서 나와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고, 타인의 평가, 시선과 함께 여행을 하면서 정신이 아닌 육체만 여행을 하는 것을 경험할 때가 많았다.


어차피 길은 하나다. 길을 모르면 당나귀만 잘 쫓아가면 된다.

그러나 이곳은 태양의 섬이었다. 길이라곤 하나의 흙길 밖에 없었으며, 지도나 인터넷이 없어도 하루를 보내기엔 아무 걱정이 없었다. 그래서 과감하게 선불 유심 충전을 하지 않고, '디지털 디톡스'를 체험해 보기로 했다. 주변은 온통 호수, 하늘, 풀, 흙 밖에 보이지 않고, 하루종일 걷기밖에 할 게 없는 곳에 있으니 자연스레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많은 한국인들이 그렇듯, 과거에 대한 아련한 추억보다는 미래에 어떻게 살 것인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들었다. 이렇게 고요하고, 한적하고, 적막하고, 아름다운 곳에서 치열하게 살아갈 고민만 하는 걸 보니 나는 뼛속부터 한국인이라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배가 고파져서, 간판도 없고 이름도 모르는 식당에 들어가서 밥을 먹었다. 밥을 시키면 풍경은 공짜여서 그런지, 썩 괜찮은 식사를 즐겼다. 그렇게 섬의 절반을 돌고 숙소로 들어가서 와이파이부터 연결하였으나, 내가 묵는 방에서는 거의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인터넷이 안되니 뭘 해야 할지 방황하다가, 간단한 일기와 메모를 쓰고 별구경을 하면서 잡생각을 하다가 잠에 들었다.

중남미식 야채수프와 닭고기 요리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니, 하루 동안 스마트폰과 노트북을 사용하지 않고 맑은 공기를 많이 마신 탓인지 머리가 아주 맑고 몸이 가벼웠다. 도시의 소음, 매연과 미세먼지, 전자파, 각종 유해물질 등이 없는 곳에서 2~3일 더 푹 쉬다 가고 싶었지만, 나는 돌아갈 곳이 있는 직장인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채 숙소에서 나와 배를 타고 다시 코파카바나로 돌아왔다.


이른 아침 숙소에서 마시는 따뜻한 차와 모닝인사를 해주는 라마!

코파카바나로 가는 배 안에서 볼리비아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동양인이 콜롬비아에서 일을 하고 있고, 완벽하진 않지만 스페인어로 얘기를 하다 보면 이들에게 나는 호기심의 대상이 된다. 얘기를 하는 도중, 그 친구가 끔찍한 사실을 알려주었다. 내가 이 섬을 방문하기 불과 3달 전에 한국의 40대 여성 여행객이 태양의 섬에서 살해를 당했다는 것이었다. 좀 더 자세히 물어보니, 태양의 섬은 북섬과 남섬으로 나뉘어 있는데, 북섬 원주민들은 태양의 섬에 관광객이 방문하는 것을 반대하고, 남섬 원주민들은 관광객에 우호적이라고 한다. 내가 방문했을 때도 북섬 트레킹 길이 통제되어 있어서, 그냥 들어가면 안 되는 길인줄 알고 아무 생각 없이 돌아왔었다. 코파카바나에 와서 바로 선불 유심을 구매하고 인터넷에 연결하여 찾아보니, 내가 이 섬에 오기 1주일 전에 우리나라 외교부는 태양의 섬 여행 경보를 '여행유의'에서 '여행자제'로 상향했다. 갑자기 소름이 돋으면서 아름다웠던 그 섬의 풍경들이 오싹하게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사건 때문인지 섬에 유난히 관광객들이 많지 않아서 트레킹을 하면서 거의 사람을 마주치지 않았던 것 같다.(사건이 발생하고 1년 후에 범인은 잡혔고, 징역 15년이 부과되었다고 한다.)


디지털 디톡스를 체험하고 긍정적 효과에 대해 몸소 체험했지만, 이 소식을 듣고 여행 시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항상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고 스마트폰 배터리 관리를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역설적인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여행 시에는 내가 현재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공유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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