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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낯선 곳에서 Jun 12. 2024

1. 직장인의 현실적 산티아고 순례길 체험기_마음먹기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스페인에 살고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많이 물어보는 것 중 하나가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산티아고 순례길(Camino de Santiago)은 성 야고보의 유해가 묻혀있다고 전해지는 산티아고 테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중세시대의 순례길로, 스페인뿐 아니라 프랑스, 포르투갈 등 다양한 곳에서부터 출발이 가능하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다양한 루트

이처럼 다양한 루트의 산티아고 순례길이 있지만, 한국인에게 흔히 알려진 순례길은 프랑스 길(Camino Francés)이다. 프랑스길은 프랑스의 생장피드포흐라는 작은 소도시에서부터 출발하여, 피레네 산맥을 넘고 스페인 북부 주요 도시를 지나는 총 약 780km 정도 되는 길이다. 이 루트를 선택한 순례자들은 약 35일 정도를 쉬지 않고 걸으면 완주할 수 있다. 가장 유명한 이 루트에는 알베르게(숙소), 표지판, 식당, 휴게소 등 인프라가 잘 구비되어 있어 전 세계 수많은 사람이 선호하는 코스이기도 하다.

산티아고 순례길 대표 코스 '프랑스길' 루트

2016년, 와이프(당시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할 때 '나의 산티아고'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이 영화는 독일 영화로, 당시 한국에는 제2외국어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이 별로 없어서 종로 쪽에 위치한 작은 독립영화관에서 봤다. 영화 자체는 단순하고 약간은 지루했던 걸로 기억한다. 독일의 유재석 같은 톱스타 개그맨이, 무리한 일정으로 건강이 악화되고 번아웃 증상을 겪으면서 이를 치유하기 위해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나는 이야기이다. 영화 속에는 다양한 아픔과 사연을 가진 순례자들이 등장하고, 그들이 순례길을 통해 치유를 받는 과정이 나온다. 당시 취업에도 성공하고 나름 순탄한 인생을 살면서 세상 무서울 것 없던 20대 후반의 나로서는 작품 속 등장인물들이 겪었던 인생살이의 어려움, 번아웃 등에 대해 깊은 공감을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영화 속 등장 인물들을 보면서 '살면서 큰 아픔을 겪거나 문제가 생기면 이성적으로 해결할 생각을 해야지 왜 저기까지 가서 태평하게 1달 넘게 걷기만 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산티아고 순례길의 아름다운 풍경이 잘 담겨있고, 순례길을 하면서 겪는 재밌는 에피소드들을 보면서 그곳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생겼고, 언젠간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체험해보고 나니, 이 영화가 다시 보고 싶어 졌다.

그로부터 6년 후, 회사 업무로 스페인 마드리드 주재원으로 발령 받았다. 발령 준비를 하면서 업무 외적으로 스페인에서 꼭 해보고 싶은 나름의 To do list를 만들었다. 그중 하나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체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스페인에 와보니, 이런저런 제약들로 인해 마드리드에서 기차 타고 몇 시간만 가면 할 수 있는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에 섣불리 도전하기가 어려웠다. 직장인으로서 가장 큰 제약은 아무래도 '시간'이었다. 신혼여행을 제외하고 한국 직장인이 유럽 직장인처럼 몇 주의 장기 휴가를 내는 것은 전설 속의 이야기이다. 산티아고 순례길 중 가장 알려진 프랑스길은 최소 1달 이상이 소요되기 때문에, 그동안 사무실을 비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남자라면 가장 긴 코스를, 하루도 쉬지 않고 무조건 풀코스를 걸어야지!'라는 이상한 강박이 나의 새로운 도전을 가로막고 있었다. 순례길을 걷다가 중간에 끊고 돌아오거나, 일부 구간만 여행 삼아서 걸어보는 것은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그렇게 산티아고 순례길을 잊고 지낼 즈음, 달력을 보는데 5월 1일(수), 2일(목)이 현지 공휴일이었다. 두 날짜 앞 월, 화요일만 개인 휴가를 쓰면 그 전 주말까지 총 6일의 자유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고, 한국 본사도 5월 초 근로자의 날, 어린이날 대체휴일로 인한 휴가자가 많아서 급한 업무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당시 연초 중요한 프로젝트를 끝냈던 나는 다소 지쳐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좀 푹 쉬자!라는 마음으로 여행지를 검색해 보았다. 마침 이때는 와이프가 한국에 휴가를 가 있는 상황이라서 색다른 혼행(혼자 여행)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곳저곳을 뒤져보다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올렸다. 그러나 여행 가능한 날짜가 6일밖에 없어 주저하고 있던 찰나에, 인터넷의 한 문구가 내 머리를 탁 쳤고, 순례길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순례길에는 정답이 없다. 누가 확인하는 것도 아니고, 평가를 하는 사람도 없다. 그냥 순례자 마음대로 길을 만들어서 가는 것이 순례길이다."


하지만 나는 1달 넘는 시간과 비용, 에너지를 투입하여 프랑스 길을 완주한 사람들과 나를 똑같은 순례자라고 하고 싶지 않다. 나에게 있어 순례길은 종교적 의미나 심신 위로를 위해 떠난 것이 아닌, 단순히 직장인으로서 휴가와 공휴일을 활용하여 아무 생각 없이 멍 때리면서 하루 종일 걷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서 떠난 것이다. 순례길 여행에는 계획도 필요없다. 직장인이라 출퇴근은 해야하니, 왕복 기차표만 미리 구매해놓고 알베르게(숙소)는 순례길을 하면서 앱을 통해 예약했다. 극 J인 나에게 있어 여행 계획을 촘촘하게 짠다거나, 미리 식당을 알아보는 등의 번거로움이 필요 없는 여행이었다. 한마디로 나는 '한량 순례자'였고, 그래서 이번 여행기의 제목에도 '체험기'라는 단어를 붙였다.


스페인 우체국(Correos) 홈페이지에 등재된 5일짜리 산티아고 순례길 루트

스페인 우체국(Correos)는 산티아고 순례길 관광 투어의 스폰서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출발지부터 도착지까지의 소요일자, 루트, 일일 이동 거리 등을 우체국 홈페이지에서 한눈에 볼 수 있다. 나는 5일을 꼬박 걷고, 순례길을 마친 후 1일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방문 및 관광으로 대강의 계획을 짰다. 우체국 홈페이지에서 5일짜리 순례길 일정을 알아보니, 마침 스페인 갈리시아 지방의 소도시 '사리아(Sarria)'라는 마을부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5일 동안 115km를 걷는 일정이 있었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한량 순례자가 많았던지, 이렇게 작은 소도시와 마드리드를 잇는 고속열차 Renfe 이동편이 있었다. 내 일정에 맞춰 기차표 티켓을 검색하는데, 금요일 저녁에 출발하는 기차가 이미 매진이 되어 있었다. 원래 내 계획은 금요일 퇴근 후 기차를 타고 사리아로 가서, 알베르게에서 잠을 잔 뒤 토요일 이른 아침에 바로 걷는 것이었다. 만약 기차표를 구하지 못하면, 토요일까지 날리게 되는 상황이라 계속해서 기차표를 알아봤다. 우여곡절 끝에 갑자기 조금 비싼 일등석 기차표가 홈페이지에 '구매 가능'으로 뜬 것을 발견했고, 다행히 금요일 퇴근 후 출발하는 티켓을 발권했다. 이렇게 시간을 비싼 돈으로 사는 것이 직장인의 장점이 아닌가 싶다.


나의 산티아고 순례길 첫 도시, 사리아로 향하는 이동 편이 확보가 되었으니, 이제 준비물을 구비할 차례였다.(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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