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 우박 맞고 깨진 스마트폰
스페인 포르토마린에서 팔라스 데 레이로
산티아고 순례길 2일 차의 아침이 밝았다. 첫날부터 눈과 비, 강한 바람을 맞으며 나름의 순례길 다운 순례길을 걸은 것치곤 컨디션이 좋았다. 피곤한 탓이었는지 익숙하지 않은 알베르게의 잠자리도 나쁘지 않았다. 코 고는 사람들이 많을 것으로 미리 예상해서 챙겨 온 귀마개의 효과를 아주 톡톡히 봤다.
보통 순례자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오전 9시 이전에 다음 목적지를 향해 출발한다. 나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아침 7시에 눈이 떠져서 침낭을 개고 옷을 갖춰 입기 시작했다. 이미 그 시간에 알베르게 같은 방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떠나고 없었다. 그러나 내 침대 위에서 자고 있던 스테파노는 아직도 코를 골며 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등산화를 신고 배낭을 메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스테파노는 누워 있는 상태로 나에게 Buen Camino!(부엔 까미노!)를 한번 외쳐주었다. 나가기 전에 그 친구와 짧은 대화를 나누고 서둘러 길을 나섰다.
순례길 체험을 하루 했다고 그새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늘은 아침을 든든히 먹고 쉬지 않고 걸어서 빨리 다음 목적지인 Palas de rei(팔라스 데 레이)로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아침 이른 시간이었지만 대부분의 카페가 순례객들로 붐볐다. 내가 갔을 때는 비수기였는데, 성수기에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지 짐작이 갔다. 사실 포르토마린과 같은 산티아고 순례길에 위치한 대부분의 마을은 우리나라 읍면리 정도의 작은 규모이다. 9세기에 성 야고보의 유해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발견된 '콘텐츠'를 관광 상품화 시켜, 이토록 작은 마을에 매일 수많은 외부인들이 드나들고 지역 경제를 활성화한다는 것이 부럽게 느껴졌다.
배를 든든히 채우고, 순례길 표지판을 따라 빠르게 걸었다. 오늘은 24km를 걷는 일정이었고, 대략 5시간~6시간 정도 소요 될 것으로 예상했다. 다행히 어제와는 다르게 날씨가 아주 좋았다. 조금 흐리긴 했지만 비가 내리지 않고 바람은 선선해서 걷기에 아주 좋은 날씨였다. 컨디션이 쌩쌩했던 나는 최대한 빨리 걸었다. 순례길에서 보통 나를 앞질러 가는 사람들은 혼자 걷는 남자 순례객이었다. 나와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기록 단축, 알베르게에 좋은 침대 선점, 여유로운 세탁기&건조기 사용 등이 있었을 것이다.
조금 걷다 보니 갑자기 순례길의 태양이 작열했다. 갈리시아의 날씨가 변덕스러운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체감기온이 거의 7도 이상은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았다. 이솝우화의 '북풍과 태양' 이야기처럼, 강렬한 태양은 순례객들의 외투를 하나 둘 벗게 만들었다. 오래간만에 노래도 들으면서 여유롭게 머리를 비우고 걸었다. 이 여행을 하기 전에는 순례길을 준비하는 과정의 번거로움과 사무실 업무에 대한 걱정으로 떠나기 귀찮다고 생각 했지만, 막상 와보니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30대 중반인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이토록 한가롭게 자연을 느끼며 여유를 즐겨도 되나 싶었다. 바쁜 한국 생활에서는 여유 시간이 생겨도 어학 공부를 하거나 자기 계발, 재테크 공부 등을 하느라 늘 바빴다. 이곳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그 누구 하나 급한 사람이 없다. 힘들면 아무 데나 앉아서 잠시 쉬기도 하고, 목이 마르면 Bar에 가서 맥주를 마시고, 졸리면 바위나 잔디 위에서 잠시 눈을 붙이는 사람도 있다. 스페인에서 일을 하면서 업무적으로는 유럽인들의 답답하고 느리적거리는 모습에 가끔 화도 나곤 했지만, 삶에 대한 여유를 즐기는 모습만큼은 정말 부럽다.
조금 가다 보니, 엄청 오래되어 보이는 기도 장소가 나왔다. 사람이 모여있지 않으면 그냥 오래된 곡물 창고나 헛간 등으로 오해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크기였다. 사람들이 줄을 서있길래 뭐지 하고 들어가 보았다. 내부 사진 촬영이 금지 된 이곳에서 성모마리아 조각상을 모셔놓고 누군가가 순례길 여권에 도장을 찍어 주고 있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도장을 받으려고 하는데,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알고 보니 도장을 찍어주시는 분이 장님이었던 것이다. 이 분이 순례길 여권에 도장이 찍혀야 할 곳을 알려주면 손으로 더듬더듬 도장을 찍어주었다. 어디서 왔냐고 물어서 한국에서 왔다고 이야기해 주었고, 스페인어를 잘한다고 칭찬해 주었다. 옆에 기부할 수 있는 작은 그릇이 있어서 동전을 살짝 올려놓았는데 그 장님이 다른 순례객의 도장을 찍어주다가 멈춰서 나에게 고맙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종교적 말씀이 적힌 작은 카드를 주었다. 도장을 찍어주면서도 동전을 기부한 소리를 어떻게 들었는지 신기했다. 이 기도원 앞에 급수대가 있어서 물통에 물을 가득 채워 넣고 잠시 누워서 쉬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조금 걷다 보니 어느덧 팔라스 델 레이 표지판이 보였다. 예상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얼른 알베르게에서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누워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후드득 소리가 나더니 우박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냥 마냥 신기했는데 어느덧 우박이 엄청 쏟아졌다. 우박을 맞고 아프다고 느껴본 적이 처음일 정도로 세차게 내렸다. 이것도 추억이겠지 하면서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찍는데, 우박에 맞고 핸드폰 액정이 깨졌다. 우박을 피할 곳이 없어서 스마트폰을 주머니 깊숙이 넣고 뛰어서 팔라스 델 레이에 도착했다. 하루종일 비를 맞지 않아 뽀송한 상태였는데, 우박 후 내린 비에 쫄딱 젖어서 기분이 찝찝해졌다. 순례길의 예측불가능한 날씨가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팔라스 델 레이 알베르게에 도착하여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세탁기와 건조기를 돌렸다. 비교적 일찍 도착하여 방에 투숙객은 나밖에 없어서 편하게 쉬었다. 알베르게 바로 앞에 순례길 여권 도장을 찍어주는 성당이 있어 서둘러 도장을 받았다. 팔라스 델 레이 마을도 약 15분이면 다 둘러볼 수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그렇게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스테파노에게 Whatsapp 메시지가 왔다. "알베르게 어디야?", "난 산 마르코스 알베르게야. 도착해서 도장받고 쉬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니 스테파노가 답장을 보냈다. "이따 오후에 저녁 같이 먹자. 늦게 출발해서 나는 2시간 정도 더 걸어야 돼"라고 이 친구가 얘기했다.
저녁에 출출해질 때쯤, 알베르게 앞에서 스테파노를 만났다. 나는 알베르게를 보통 하루 전날에 미리 예약을 하는 스타일이었는데, 스테파노는 목적지에 도착해서 알베르게를 직접 잡는다고 했다. 내가 묵었던 알베르게는 이미 예약이 다 차서, 조금 떨어진 곳에 투숙한다고 했다. 식당 어디를 갈지 알아보다가 근처에 평점이 높은 곳에 들어갔다. 나는 돼지고기와 감자튀김, 계란프라이를 섞어서 먹는 음식을 시켰다. 꽤나 배가 고파서 단숨에 다 먹고 맥주도 2병이나 마셨다. 스테파노는 음식을 2개나 주문하고, 맥주도 3병이나 마셨다. 이 녀석 꽤나 배가 고팠던 것 같았다. 식사를 하면서 서로 순례길에서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나는 마을에 다 와서 우박을 맞고, 핸드폰 액정이 깨진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 친구는 우박을 맞지 않고 처음에 시작할 때 비가 왔다고 한다. 역시 모든 순례자들은 각자의 순례길이 있고, 정답이 없음을 다시 한번 느꼈다. 이 친구는 오늘 프랑스 남자와 같이 일부 구간을 걸었다고 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해서 시간이 맞으면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다.
적당히 취기가 올라서 숙소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Bar에 있는 신기한 기계를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축구 경기를 보고 실시간으로 배팅하는 기계였다. 스페인 사람들은 보통 어플을 통해 축구 경기에 배팅을 하고, 승리 팀, 스코어 등을 맞추면 자기가 배팅한 금액에 비례해서 돈을 얻을 수 있다. 이 기계는 아날로그도 아니고 디지털도 아닌 것이 뭔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동전이 없어서 해보진 않았지만 신기해서 스테파노와 한참을 이야기했다. 축구광인 나는 이 친구와 더 가까워지기 위해 스페인, 이탈리아 리그에 대해서 아는 지식을 열심히 이야기했다. 근데 이 친구, 이탈리아 사람인데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이탈리아 남자들은 모두 축구에 열광한다고 생각했는데, 상당히 의외였다. 이 녀석은 축구보다는 테니스를 좋아한다고 얘기했다.
저녁을 먹고 나온 시간이 밤 9시 정도였는데도 날이 밝았다. 알베르게는 보통 10시에 문을 닫기 때문에 스테파노와 사진을 찍고 헤어졌다. 다음 날인 3일 차는 Arzua라는 마을로 가는 코스인데, 29km로 가장 긴 코스였다. 그래서 평소보다 일찍 잠들어 체력을 보충했다.
순례길 친구 스테파노와 인증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