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은 사실 도망가자는 말이었어
처음 삿포로에 간 건 몇 년 전 11월 즈음, 4년 반 정도 재직했던 첫 회사를 그만둔 때였다. 주말이 따로 없는 업계였던 터에 일본 국내라고 하더라도 쉽게 여행을 갈 수 없었기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홋카이도, 그리고 삿포로는 '퇴사 여행'이라는 이름을 붙여 떠나기에 더할 나위 없는 목적지였다. 여전히 가끔은 덥고 종종 쌀쌀했던 도쿄와는 다르게 11월임에도 이미 눈이 오고 있던 도시, 팬데믹 끝물이라지만 어딜 가나 북적이는 수도권과 다르게 아마도 공기부터 고요할 곳. 그러니까 당시의 나의 일상에서 완벽하게 벗어난 비일상의 집합체였던 삿포로에 간다는 생각만으로도 어떤 해방감을 느꼈던 것 같다.
4년 내내 입에 '내가 진짜 퇴사하고 말지'라는 말을 달고 살았던 내가 그 4년 동안 하지 않았던 퇴사를 단 3일 만에 결정한 건 어떤 두려움 때문이었다. 같은 회사에서 근무하던 대학 동기인 한국인 친구 두 명이 있었는데, 코로나의 여파로 둘 중 한 명은 한국으로, 다른 한 명은 다른 회사로 이직한다는 것이 아닌가.
뭐야, 그럼 나만 남는 거야?
솔직히 그 두려움이 가장 크게 다가왔다. 동료들이 떠난 직장에 혼자 남겨지는 게 무서웠던 게 아니라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멈춰있는 건 아닐까'하는 두려움. 계기가 무엇이든 다들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은데 나만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3일째가 되던 날 나는 이직을 위한 첫 이력서를 접수했다.
두려움을 없애는 건 빠른 행동이라고 했던가. 다행히도 가고 싶었던 회사의 니즈와 내 백그라운드가 절묘하게 일치하여 2주 남짓한 기간만에 합격 통보를 받고 조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사직서를 제출했다. 여전히 이 길이 맞는 것인가에 대한 불안은 간직한 채였지만, 무언가를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달래지는 불안도 있었으니까.
그렇게 이직이 결정되고 남아있던 유급휴가로 잠깐의 백수 아닌 백수 생활을 시작했을 무렵, 비슷한 시기에 퇴사하게 된 같은 회사 동기 언니와 무작정 신치토세행 티켓을 끊었다. 코로나로 인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약 2주간의 백수생활 동안 한국에도 갈 수 없었고, 4년 내내 간직했던 퇴사 버킷리스트 중에서도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게 없었기에 최선의 선택처럼 보였지만 그건 명백한 도망이었다. 사직서에는 담아 보낼 수 없었던 어떤 불안으로부터의 도망.
삿포로 역에서 나와 처음 들이마신 삿포로의 공기는 사실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아, 역시 도쿄보다 춥구나’ 정도?
정말 열심히 놀았다. 뚜벅이 여행자 둘이서 삿포로에서 오타루, 노보리베츠 온천 여관까지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교통수단을 동원해 관광객이 없는 한적한 홋카이도를 누볐다.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도쿄에서 보기 힘든 설경도 원 없이 봤다. 홋카이도에서 유명하다는 음식들을 먹으러 다니고, 도쿄 편의점에는 없는 홋카이도 한정 상품들을 왕창 사다가 호텔방에서 밤새 수다도 떨었다. 가능한 한 도쿄에서 할 수 없는 것들을 왕창 하려 어딘가 쫓기듯 노력했다. 함께 간 언니와도 '우리 진짜 홋카이도에서만 할 수 있는 것만 하자' 며, 애써 남아있는 어떤 불안함을 외면하고픈 마음에.
아마도 그래서였나 보다. 결국 이 여행에서 나에게 해방감을 준 건 삿포로의 풍경도, 홋카이도에서만 먹을 수 있던 음식도, 따뜻한 온천과 차가운 공기도 아닌 3박 4일간 친구와 함께 나눈 대화와 그 시간들이었다. 그 장소에서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보다는 일하며 힘들었던 이야기들, 상사 욕, 그 외에도 싫었던 점들 같은 쌓여있던 이야기를 다 쏟아낸 그 시간. 긍정적인 얘기라고는 '그래도 우리 이직했잖아', 뿐이었던 처참한 시간이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두 번째 삿포로 여행 전까지 여전히 나에게 삿포로에 가자는 말은 도망치자는 말이었다.
물론 결과적으로 너무나 즐거운 여행이었지만 그 시작과 끝은 부정할 수 없는 도피였다. 그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아마도 코로나 블루였을) 우울감과, 어떤 무기력감, 그리고 알 수 없는 답답함을 떨쳐내고 싶었다. 이직이라는 성취로도 완벽하게 해소되지 않았던 무언가를 어떻게든, 어디에든 버리고 오고 싶었던 것 같다. 그땐 지금처럼 열렬히 무언가를 좋아하던 때도 아니었을뿐더러, 불규칙한 생활에 그나마 취미라고 부를 수 있던 것들 조차 남아있지 않았기에 일상에서의 자잘한 스트레스들이 거대해지는 것을 막아줄 무언가가 없었던 것이 아마도 그 불완전한 해소의 이유이지 않았을까.
어떤 것이 의미를 가지는 데에는 그 '계기'가 종종 영향을 미친다.
내가 좋아하는 책의 시작은 엄마였고, 좋아하는 분식집의 시작은 오랜 친구들이었으며, 좋아하던 공항을 싫어하게 된 계기는 아빠였고, 싫어하던 가지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할머니였고, 좋아하던 것들을 더 좋아하게 된 계기는 I였던 것처럼. 그래서 두 번의 삿포로 여행을 끝내고 난 뒤에, 아주 사소하더라도 '계기'가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가능하다면 I가 내게 그러했듯 새로운 시작의 원동력이 되어 주거나,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할 수 있게 하는 계기.
그렇다고 해서 그룹 X를 완전한 나의 도피처라던가, 모든 순간의 긍정적 계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일종의 안전장치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덕질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는 말을 문장 그대로 믿을 만큼 순수한 나이도 아니고 결국 내 현생은 내가 스스로 살아내야만 하는, 온전히 나에게 주어진 일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안다. 그렇지만 '덕질이 우리를 살게 할 거예요'라는 말에 담긴 그 뜻, 사랑이 모든 걸 해결해 줄 것이라 믿지는 않지만 그 마음이 내일의 어떤 부분을 기대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일상의 작은 불안과 스트레스를 조금이나마 쉽게 흘려보낼 수 있다면 아마도 이 마음을 여전히 가지고 살아갈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내 두 번째 삿포로 여행이 그러했듯이.
(9-2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