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베트남 커뮤니티는 나를 사랑하고 나도 그들을(베트남계 미국인들을) 사랑합니다” 2024년 8월 26일, 트럼프 공화당 대통령 후보자가 미국 버지니아주의 베트남계 미국인들이 자주 찾는 쇼핑 센터에서 한 말이다. 트럼프 본인조차 유달리 베트남계가 왜 자신을 지지하는지 모르고 있던 것이다.
2016년 미국 대선 당시 ‘아시아계 미국인 법률교육재단’ (Asian American Legal Defense and Education Fund)의 여론 조사에서 아시아계 미국인 중 18%만이 트럼프를 지지했지만 베트남계는 32%가 지지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2020년 대선에서도 베트남계의 트럼 지지는 아시아계 미국인 중에서 가장 높았다. 2020년 5월 발표된 ‘아시아계 미국인 유권자 조사(Asian American Voter Survey 2020)’에 따르면 베트남계 미국인 중 48%가 트럼프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아시아계 미국인 전체 평균은 30%에 불과했다. 2023년 5월 퓨리서치 센터의 <아시아계 미국인들과 미국에서의 삶> 조사에 따르면 베트남 등록 유권자 51%가 공화당을 지지한 반면 민주당은 42%에 불과했다. 이 조사의 아시아계 미국인 평균은 공화당 34%, 민주당 62%였다. 다만, 최근 젊은 베트남계 미국인들은 다른 아시아계와 비슷한 수준으로 민주당 지지율이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왜 1세대 베트남계 미국인들은 트럼프와 공화당을 적극 지지하는 것일까?
1975년 베트남이 공산화된 이후 난민 신분으로 미국에서 힘들게 정착한 베트남인 이민 1세대들은 공산당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다. 이 때문에 공화당의 강경한 반공 성향을 선호한다는 분석이 있다. 캘리포니아 대학 ‘아시아계 미국인 학과’의 교수이자 베트남계인 린다 보 (Linda Vo) 교수는 2020년 10월 미국 디지털 미디어 VOX와의 인터뷰에서 ‘반공의식이 강한 1세대 베트남 이민자들은 공화당이 보수적이고 반공주의적일 것이라 생각해서 지지한다’고 했다. 이에 덧붙여 트럼프의 ‘반중 의지가’ 베트남계로부터 지지로 이어진다고 분석했다. 린다 보 교수는 트럼프가 COVID-19를 ‘중국 바이러스’, ‘쿵플루 (쿵푸와 플루 합성)’ 라고 부르며 인종 차별적 발언을 공개적으로 한 것에 대해 당시 아시아계들은 공포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럼에도 오히려 베트남계 이민 1세대들은 트럼프를 적극 옹호했는데 ‘반중국’은 베트남인의 ‘정체성 일부’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린다 보 교수가 지적한 ‘베트남인의 반중국 정체성에 의한 트럼프 지지 현상’은 베트남 본국에서도 벌어졌다.
2020년 11월 아시아투데이의 베트남 특파원이자 하노이대학 역사학 박사과정인 정리나 기자는 선거에서 패한 트럼프에 애통해 하는 베트남 사람들의 모습을 보도했다. 보수성이 짙은 하노이에서 대학생과 직장인은 물론이고 고위공무원 집안의 중앙부처 공무원 마저도 트럼프 패배를 아쉬워하는 글들이 페이스북에 게재되었다. 2024년 11월 트럼프의 재선이 확정되자 호찌민 시민들 역시 페이스북에 축하 글을 게재하고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는 이들이 많았다.
호찌민 거주 25년차인 한국인 전모씨는 ‘출근하자마자 베트남 직원들이 트럼프 당선 기념으로 음료수를 사달라고 해서 영문도 모른 채 지갑부터 꺼냈다’고 당시 기억을 되살렸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베트남에서 살고 있지만 베트남 사람들이 왜 트럼프 당선을 기뻐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의아해했다. 트럼프 재등장으로 전세계가 우려하는 와중에 상당수 베트남인들이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트럼프의 ‘강경한 반중국 정책’ 때문이다. 이는 정리나 기자의 2020년 보도에서도 드러나는데 하노이 중앙부처의 한 공무원은 ‘트럼프의 강경한 반중국 정책은 베트남에 도움이 된다’라고 밝혔다. 또다른 공무원은 ‘우리 당과 정부는 중국을 의식해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에서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 행정부라도 있어야 한다’ 라고 밝혔다. 트럼프의 강경한 반중 정책에 베트남 국민들이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2017년 트럼프 행정부는 베트남 동해에서 (남중국해) 중국 해경에 대응하라며 2천억원이 넘는 해안경비정과 24대의 고속정을 지원했다. 이에 더해 2018년 베트남 전쟁 이후 처음으로 미국 항공모함이 베트남에 입항하게 된 것도 트럼프 대통령 시절이다. 중국이 베트남을 자극하면 미국과 손 잡고 중국에 맞서겠다는 강경한 의지였다. 베트남이 경제적으로 큰 수혜를 본 것도 트럼프의 거칠고 강력한 반중국 정책 때문이다. 중국산 제품에 대한 높은 관세를 피하고자 글로벌 기업들이 옮겨 온 곳은 베트남이다. 이제는 글로벌 기업 뿐만 아니라 중국 기업들마저도 베트남으로 제조 시설을 이전해 높은 관세를 피하고 있다. 그 덕분에 베트남 수출은 대폭 늘어나고 경제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트럼프 대통령과 베트남의 관계를 자신하며 트럼프 2기 체제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지난 9월 25일 트럼프 대통령 일가 소유의 기업인 트럼프 그룹이(The Trump Organization) 베트남에 15억 달러(2조 1000억원)를 투자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보도되었다. 베트남 북부 흥옌성이 그 대상으로 골프장과 리조트 및 주거단지 개발이 주목적이다. 미국 플로리다에서 이루어진 투자 협정식에 트럼프의 차남이자 해당 기업의 부사장인 에릭 트럼프가 직접 서명했다. 게다가 당시 선거 막바지에 정신 없을 트럼프가 서명식에 참석해 찍은 사진이 전세계에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다. 흥옌성은 수도 하노이와 북부 최대 항구 도시인 하이퐁의 중간에 위치해 배후 도시로서 큰 성장이 기대되는 지역이다. (관련기사 가깝고도 먼 아세안 6. <1억 인구 앞둔 베트남 ‘도시화’로 성장 박차>) 무엇보다 흥옌성은 베트남 권력 서열 1위인 또럼 공산당 총비서와 베트남 공안부 장관, 법무부장관의 고향이다. 게다가 지난 9월 트럼프 2기 체제 가장 강력한 측근인 일론 머스크의 Space X 역시 베트남에 15억 달러 투자하겠다고 했다. 미국 최고 지도자의 가족과 최측근 실세 중에 실세 모두 베트남에 투자를 하니 베트남과 미국의 관계를 걱정할 필요 없지 않겠느냐는 소리가 나올 법하다.
하지만 베트남 정부 입장에서는 트럼프 2기 체제를 철저히 준비해야만 한다. 베트남은 중국, 멕시코에 이은 3대 대미 흑자국이다. 2023년 기준 1040억달러(한화 146조원) 흑자인데 그 규모가 2019년 550억달러에 비해 2배 가까이 성장했다. 트럼프가 당선되자마자 멕시코와 캐나다에 관세 25% 상향을 예고하자 전세계가 긴장하고 있다. 멕시코는 즉각 중국산 밀수 제품들을 단속하며 트럼프의 반중 정책에 협조하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베트남 정부는 23년 8월 미국 상무부가 베트남을 거쳐 원산지를 속여 고율의 관세를 회피하고 있다고 지적한 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해야만 한다. 물론 수출 중심의 베트남이 중국에서 주요 부품과 원자재가 수급되지 못하면 공장이 돌아가지 못해 마냥 미국의 반중 노선에 발 맞출 수도 없는 노릇이다. |
하지만 대나무 외교라 불리며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국가의 이익을 최대화했던 베트남 명품 외교가 계속해서 발현될지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