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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livia Nov 24. 2020

상처는 언제나 받은 사람의 몫이다

스페인에 오랜 시간 살다 보면 길거리에서 혐오의 표현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비하의 의도가 확연한 단어, 제스처, 시선, 비웃음 등 종류도 다양하다. 지난 4년간 창의적인 차별을 많이 받았지만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 당시에는 너무 화가 나고 억울했음에도 그들은 내 인생에 아무런 쓸데도, 상관도 없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때의 감정과 상처는 잊히지 않은 채 남아있지만 그들의 얼굴과 목소리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 덕에 좀 더 의연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과 이름, 목소리를 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다시 말해 내가 아는 사람에게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인종차별을 받으면 그 상처는 몇 배는 훨씬 크게 남는다. 그렇기에 우리 학교, 우리 과 동기들에게 당했던 차별은 더 날카롭고 깊은 못이 되어 가슴속에 박혀 있다. 낯선 이들의 혐오가 어느 정도 무뎌질 동안에도 내가 아는 이들의 혐오는 쉽게 무뎌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매일매일 마주쳐야 하기에 그들을 무시하며 지냈다. 낯선 사람처럼 여기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자연스레 그 상처도 무뎌졌다. 잊을 순 없지만 더 이상 그들에게 화나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들은 당시 내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아니, 그 상황이 있었는지조차 모르는 듯하다.


그 중심에 있던 이와 어쩌다 보니 부딪히는 일이 많아졌다. 내 친구와 친하게 지내던 그는 어느새 하굣길을 함께 하는 우리 무리에 합류했다. 그가 나에게 다정한 말투로 말을 거는 것이 탐탁지 않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내 상처는 무뎌졌다고 여겼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그와 둘이서 나란히 걷게 됐다. 그는 나에게 한국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며 본인의 궁금증을 채웠다. 15분 가까이 쉴 새 없이 질문을 몰아치던 그는 끝으로 나에게 "너 스페인어 진짜 잘한다.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 대단하다"라고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듣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내 스페인어를 비웃었다. 그 어투와 목소리, 표정은 하나의 뾰족한 덩어리가 되어 내 머리와 마음속에 날카롭게 박혀있다. 그랬던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내 스페인어를 칭찬한다. 그때와 지금, 내 스페인어 실력은 그렇게 달라지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그가 전혀 기억을 못 하는 건지, 얼굴 붉히기 싫어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 역시 가면을 쓰고 그를 상대할 수 있지만 그 얼굴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지만은 않다. 사과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 상처는 오롯이 내 몫이라는 것이 씁쓸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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