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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형일 May 22. 2022

작별인사, 헤르만헤세의 책이라는 세계

#22.0.5.07 김영하, 헤르만헤세,

김영하 (2022.5.2). 작별인사. 복복서가. 

『살인자의 기억법』 이후 9년 만에 내놓는 장편소설.  

유명한 IT 기업의 연구원인 아버지와 쾌적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던 철이. 어느날 갑자기 수용소로 끌려가 난생처음 날것의 감정으로 가득한 혼돈의 세계에 맞닥뜨리게 되면서 정신적, 신체적 위기에 직면한다. 동시에 자신처럼 사회에서 배제된 자들을 만나 처음으로 생생한 소속감을 느끼고 따뜻한 우정도 싹틔운다. 철이는 그들과 함께 수용소를 탈출하여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길을 떠나지만 그 여정에는 피할 수 없는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자작나무숲에 누워 나의 두 눈은 검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한 번의 짧은 삶, 두 개의 육신이 있었다. 지금 그 두번째 육신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 어쩌면 의식까지도 함께 소멸할 것이다. 내가 겪은 모든 일이 머릿속에서 폭죽 터지듯 떠오르기 시작한다. 한때 회상은 나의 일상이었다. 순수한 의식으로만 존재하던 시절, 나는 나와 관련된 기록들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기억을 이어 붙이며 과거로 돌아갔다. 그때마다 이야기는 직박구리가 죽어 있던 그날 아침, 모든 것이 흔들리던 순간에서 시작됐다. _9쪽


겨울이면 북쪽에서 기러기들이 줄을 지어 날아왔고, 봄이면 다시 시베리아와 극북을 향해 날아갔다. ‘바깥’은 분명히 있었다. 다만 무슨 이유에서든 내가 갈 수 없을 뿐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아빠는 나를 일종의 멸균 상태로 보호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내 삶으로 틈입해 들어온 ‘바깥’에 나는 면역이 전혀 없는 상태로 노출되어 버렸다. 물론 지금은 그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로서는 그게 최선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_44쪽


“난 그냥 모두를 돕는 거야. 누군가가 뭔가를 간절히 원하면 난 그걸 느낄 수 있어. 그럼 외면할 수가 없어.”

선이는 스스로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누군가를 돕는 데서 자신의 존재 의의를 찾았다. 마음의 촉수가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들을 향해 뻗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의도가 항상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거래에는 만족하지 못하는 누군가가 있게 마련이었다. 사기를 당했다며 달려드는 놈이 있는가 하면, 불량품을 받았다고 환불을 요구하며 거세게 항의하는 녀석도 있었다. _77쪽


“의미 있는 일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인간들은 의미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아까 고통의 의미라고 하셨지요? 고통에 과연 의미가 있을까요? 인간들은 늘 고통에 의미가 있다고 말합니다. 아니, 더 나아가 고통이 없이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말하지요. 과연 그럴까요?”

선이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요. 고통에는 의미가 없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세상의 불필요한 고통을 줄이는 건 의미가 있어요.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의식이 있는 존재들이 이 우주에 태어날 수밖에 없고, 그들은 살아 있는 동안 고통을 피할 수 없어요. 의식과 충분한 지능을 가진 존재라면 이 세상에 넘쳐나는 불필요한 고통들을 줄일 의무가 있어요.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더 높은 지성을 갖추려고 애쓰는 것도 그걸 위해서예요.”

달마는 그 말을 듣고 손뼉을 쳤다.

“맞는 말씀입니다. 동감입니다. 세상의 불필요한 고통을 줄이는 것, 그게 바로 여기서 우리가 하려는 것입니다.” _152쪽


우리 둘은 부부 같기도 했고, 때로 모자 같기도 했다. 무엇이든 우리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선이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 모두 예감하고 있었다. 밤이면 시베리아의 광활한 밤하늘을 은하수가 가로질렀다. 나는 밖으로 나와 하염없이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럴 때면 『천자문』의 두번째 문장을 생각했다. ‘일월영측(日月盈?)하고 진수열장(辰宿列張)이라.’ 해와 달은 차고 기울며, 별과 별자리들은 열을 이루어 펼쳐져 있다. 나는 고대의 중국인들과 같은 하늘을 보며 그들이 적은 문장을 그대로 읊곤 했다. _ 285쪽


“그 부분 다시 읽어줄래?”

“어디? ‘현실하고 다른 일을 상상해보신 적이 한 번도 없으세요?’ 이 부분?”

“그래, 그 부분.”

나는 앤의 대사를 다시 읽어주었다. 선이는 꿈을 꾸는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

“어렸을 때 그 지하실에 동화책이 몇 권 있었다고 그랬잖아.”

“그래, 네가 『빨간 머리 앤』 얘기했던 거 기억나.”

“방금 든 생각인데, 그때도 나는 좀 전에 네가 읽어준 부분을 참 좋아했어. 그후로 나도 앤처럼 늘 현실하고 다른 일을 상상해보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 눈에 보이는 게 전부일 수는 없다고, 그럴 리는 없다고 말이야. 그 덕분에 그래도 그럭저럭 살아남아서 여기까지 왔는지도 몰라. 다시 들으니 참 좋네…” ?_289쪽


헤르만해세 (2022,05,05). 헤르만 헤세의 책이라는 세계. 김지선(역). 뜨인돌출판사.

헤르만 헤세가 전하는 문학과 책에 대한 이야기. 헤세가 사랑한 불멸의 고전과 그의 문학관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책에 관한 에세이’. 

"책이란 무책임한 인간을 더 무책임하게 만들려고 있는 것이 아니며, 삶에 무능한 사람에게 대리만족으로서의 허위의 삶을 헐값에 제공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와 정반대로 책은 오직 삶으로 이끌어주고 삶에 이바지하고 소용이 될 때에만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독자들에게 불꽃 같은 에너지와 젊음을 맛보게 해주지 못하고 신선한 활력의 입김을 불어넣어 주지 못한다면, 독서에 바친 시간은 전부 허탕이다." (pp. 12~13쪽)


책이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마치 스포츠뉴스나 강도살인사건처럼 한동안 너도나도 읽어 대화의 소재가 되었다가 이내 잊히기 위해서인가? 아니다. 책은 진지하고 고요히 음미하고 아껴야 할 존재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책은 그 내면의 아름다움과 힘을 활짝 열어 보여준다. (202쪽)

독서도 다른 취미와 마찬가지여서, 우리가 애정을 기울여 몰두할수록 점점 더 깊어지고 오래간다. 책은 친구나 연인을 대할 때처럼 각각의 고유성을 존중해주며, 그의 본성에 맞지 않는 다른 어떤 것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무분별하게 후닥닥 해치우듯 읽어서도 안 되며, 받아들이기 좋은 시간에 여유를 갖고 천천히 읽어야 한다. 섬세하고 감동적인 언어로 쓰여서 무척 아끼는 책들이라면 때때로 낭독하도록 한다.(210쪽)


철저히 알아야 진정으로 소유하게 된다. 들썩이는 호기심으로 온갖 시대 온 나라 문학의 별별 습작과 수준미달의 작품들을 꿀꺽꿀꺽 집어삼킨 이보다, 우수한 제 나라 작가 서너 명을 반복하여 완벽하게 읽은 사람이 훨씬 더 풍요로우며 많은 것을 깨치게 된다. 머릿속 가득 수천 권의 책제목과 작가의 이름을 공허하게 떠올리는 것보다 몇 권 안 되는 책일망정 속속들이 알아 그 책들을 손에 집어 드는 순간 그것을 읽던 수많은 시간들의 감동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편이 더 귀하고 만족스러우리라. (211쪽)


진심으로 생각하건대, 작가의 직분이란 세상에서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 일들을 판별하는 일이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의미라는 것이 그저 단어에 불과함을,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없으면서 또한 모든 것에 있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과 그러지 않아도 될 일이 따로 있지 않음을 끊임없이 보여주는 그런 소임, 그런 고결한 직분을 가진 사람들이 작가다. (278쪽)


청춘이 괴로운 것은, 기운은 넘쳐나는데 가는 데마다 규칙과 관습의 벽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아들이 참을 수 없이 증오하는 건 아버지가 붙들려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규칙과 관습들이다. 경건의 면상을 향해 정면으로 주먹을 날리는 행위는 어머니의 치마폭에서 떨어져 나오기 위해 거쳐야 할 통과의례다. 그러니 이제 젊은 세대가 자신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묶어 키웠던 수십 년 세월의 시민세계가 몰락하고 있음을 느끼며 기뻐 날뛰는 건 당연하다.(299쪽)


사랑이란 참으로 기이하니, 예술에서도 그러하다. 사랑은 모든 교양, 지성, 비판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낸다. 가장 멀리 있는 것을 서로 묶어주며, 최고로 오래된 것과 가장 최신의 것을 나란히 둔다. 사랑은 일체를 독자적인 구심점으로 수렴함으로써 시간을 극복한다. 오로지 그것만이 확실하며 그것만이 옳다. 왜냐하면 사랑은 옳다고 주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 다만 사랑하는 까닭에, 그 앞에는 신성한 것도 미심쩍은 것도 없다. 케케묵은 구닥다리 책이건 떠들썩하게 유행하는 팸플릿이건 정신의 숨결이 느껴진다면, 사랑 앞에서는 다 똑같다.(302쪽)

너무나 위대한 것을 아주 조금밖에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지극히 사소한 것에도 활활 불타오를 수 있는 사람보다 훨씬 더 가난하고 가련하다.(3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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