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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형일 May 22. 2022

예순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 책들의 부엌

#22.05.14. 이순자, 김지혜

이순자 (2022.05.09).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 이순자 유고 산문집. 휴머니스트

2021년 한 신문사에서 주최한 시니어문학상 논픽션 작품이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 상에서 크게 화제가 되었다. 「실버 취준생 분투기」라는 제목의 산문이었다. ‘취직이 어려운 시대, 실버 취준생은 무엇일까?’ 단순히 궁금해서 읽기 시작했다가 글의 마지막엔 지하철에서 흐느껴 울었다는 사람이 많았다. 시인 김수영이 그랬다. 시는 ‘몸’으로 하는 것이라고.    

이「실버 취준생 분투기」는  몸으로 쓴 글이었다.  온몸으로 직접 겪고 분투하여, 고통을 감내해가며 쓴 글. 종갓집 며느리로 살아오다 예순아홉의 나이에 진정한 자신을 찾기 위해 황혼 이혼을 택한 그녀가 삶의 모순을 다 감내하며 써낸 글이었다.

한국전쟁으로 아버지를 잃고, 유복자로 태어난 이순자 작가는 설상가상으로 청각 장애도 있었다. 장애로 취업이 쉽지 않았고, 그 때문인지 배움도, 첫사랑도 그녀가 원하는 대로 이룰 수 없었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렸지만, 4대가 함께 사는 종갓집 며느리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이북에서 이룬 집안은 항상 친척들로 분주했고, 며느리의 역할을 해내야 했던 그녀는 매일 상을 치우고 밥을 차려냈다. 그러면서도 봉사활동을 20여 년간 하면서 세상에 관한 애정을 잃지 않았다.

겉보기엔 평화로워 보였던 그녀의 삶은 남편의 외도로 인한 이혼으로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절망과 고통이 찾아왔고, 세상 앞에서 어느 새 그녀는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어 버렸다. 절망에 빠진 그녀에게 딸은 공부를 권했다. 그녀가 미루어오기만 했던, 그 좋아했던 공부를 다시 시작해보라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괴로울 때, 자신을 꿈꾸게 해줄 ‘글’을 만나게 되었다.

이순자 작가는 사이버대학교의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해 글을 쓰고, 발표했다. 글은 글이었고, 그녀는 부지런히 「실버 취준생 분투기」 속의 생활도 맞닥뜨려야 했다. 공장, 청소 일, 요양보호사 등 황혼의 나이에 힘든 일을 하면서도 퇴근 해서는 글쓰기를 하루도 놓지 않았던 이순자 작가의 일화를 이번 산문집에서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 1970년대 명동성당, 시티즌 주식회사의 일화 등에서 그녀의 삶의 태도가 어디서 나왔는지 유추해볼 수 있다. 자기 자신보다 ‘오지랖’으로 타인에 관한 이해와 사랑이 앞섰던 그녀의 삶은 때론 뭉클하고 때론 울컥하는 마음을 선물한다. 

무엇보다 딸로, 어머니로, 이웃으로 살아온 이순자 작가의 진솔한 문장들은 지금 내 자신의 자리를 다시 뒤돌아 볼 수 있게 해준다. 차마 알 수 없었고, 가려져 있었던 황혼의 무게와 노동, 그리고 항상 빛나던 그녀의 호기심까지. ‘삶의 답답한 경계를 허물 수 없어 오늘도 글을 쓴다’고 고백했던 이순자 작가는 문학상을 수상한 한 달 뒤, 고인이 되었다. 너무 늦게 만난 이 반짝이는 작가의 문장들과 성찰을 많은 독자들이 알아 봐주길 바란다. 저절로 폈지만, 고순 냄새를 풍기는 깨꽃 같은 글들을.


장례를 치른 지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출판사와 언론사에서 연락이 쏟아졌습니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 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부문에 당선된 〈실버 취준생 분투기〉가 뒤늦게 SNS와 여러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된 모양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크고 작은 문학상을 타며 창작의 결실을 얻고, 시나리오 작업으로 더 큰 꿈을 꾸고 계시던 때에 돌아가셨습니다. 살아 계셨다면 〈실버 취준생 분투기〉를 향한 독자들의 관심에 가슴 벅차셨을 겁니다. 하지만 유가족으로서 갑작스럽게 몰아치는 대중의 주목이 두려웠습니다. 어머니의 삶을 담은 이야기가 자칫 조각조각 자극적으로 편집되고 왜곡될까 봐, 누군가의 필요에 따라 이용될까 봐 조심스러운 마음이 컸지요. 책 출간을 염원하셨지만, 당신 손으로 마무리하지 못한 글이기에 ‘어머니가 이 글을 출판하기를 원하셨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습니다.


(……) 어머니 글의 힘은 솔직함과 사랑에서 오는 듯합니다. 어머니는 결핍을 숨기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가난했으나 사랑을 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마음에 누구보다 솔직했기에 눈치를 보거나 세상의 굴레에 갇히지 않았지요. 당신의 경험과 생각, 때로는 소박하지만 당신에게는 절실한 것조차 타인에게 나누어주는 일에 거침이 없었습니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가장 소외된 자였으나, 단순함과 따스함으로 세상의 견고한 아성을 비틀고 그 위에서 자유로이 뛰놀았지요. --- p.5~7 「어머니의 유고집을 펴내며」


할아버지, 할머니 팔짱 끼고 새벽 산책을 나온 길. 평창강 줄기 따라 우뚝 솟은 삼각산 능선 위로 붉은 해, 불쑥 떴다. 가끔 팔랑팔랑 뛰어오는 내가 보인다는 할머니, 

“안 와도 좋으니 아프디 말고 건강하게 잘 살그라. 니 119실려가구 가심이 얼매나 아프등이…….”

할머니가 허리춤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남방 윗주머니에 찔러넣었다.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 석 장이었다. ‘맛난 거 사서 먹고, 아프지 말라’며 등 두드리는 할머니. 오래 묵은 지폐에서 할머니 냄새가 났다. 명절에 다녀간 자녀들이 준 용돈이리라. 

--- p.19~20 「은행나무 그루터기에 깨꽃 피었네」 중에서


주 4일을 병동에 갔다. 환우들은 하루하루 통증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는 쓸데없는 위로의 말보다 침묵하며 같이 아파해주는 것이 필요했다. 밝은 모습을 보이려 애썼고, 나의 심장병 투병기를 이야기하며 그들의 아픔에 공감을 표하고자 노력했다. 환우들은 이런 나를 좋아했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분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발 마사지를 배웠다.

“아, 뭐야? 오늘은 마사지 없어요?”

불면의 밤을 보낸 환우들이 나를 보면 마사지하기 좋은 포즈를 취하고는 이렇게 물었고, 그럼 나는 “그럴 리가?”라고 맞대응하며 환우들과 편하게 지냈다. 마사지를 받은 환우는 곤히 잠들곤 했는데, 환우가 잠든 사이 보호자를 쉬게 할 수 있어 일석이조였다.

하루하루 통증과 사투를 벌이는 환우들을 보며 내 고통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았다. 나를 버리려던 생각은 사치였다.

--- p.21~22 「고통, 그 인간적인 것」 중에서


우리는 한 주에 한 번 성당 입구에 있던 성모병원과 산업재해병원으로 자원봉사를 갔고, 한 달에 한 번은 성라자로마을로 울력 봉사를 다녔다. 산업재해병원에는 전신주 작업을 하다 감전되어 치료받는 한국전력 직원들이 많았다. 그중 한 분은 그 정도가 심각해 팔꿈치 위와 무릎 위를 절단했다. 20대의 나이로 그 지경이 되었으니 그분이 나쁜 생각을 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죽으려 해도 죽을 수가 없자 그분은 몸을 굴려 침대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자살을 방지하고자 의료진은 그분을 자주 침대에 묶어놓았다. 그분이 고통스러워하는 만큼, 그분을 돌보는 수녀님 또한 늘 마음 졸이며 걱정하셨다.

가브리엘라 자매와 병실을 방문한 어느 날이었다. 그분이 나를 불렀다.

“손톱 좀 깎아주실라우?”

나는 당황했다. 손발이 없는데 어찌 손톱을 깎을 수 있겠는가? 침착해야 했다. 가방에서 손톱깎이를 꺼냈다.

“손톱부터 깎아드릴까요, 발톱부터 깎아드릴까요?”

덜덜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고 다가가자 그분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 머리부터 깎아야겠네.”

--- p.42~43 「1970년대 명동성당 젊은이들」 중에서


고단한 세상살이에 누구의 삶이 시가 아니며, 누구의 삶이 수필이 아니며, 누구의 삶이 소설이 아니겠는가? 사람의 생김이 다 다르듯 삶의 형태도 다 다르다. 각기 다른 삶을 엿보는 게 문학이 아닐까. 이제 쉰 중반에 들어서며 내 안의 이야기를 풀어보겠다고 여기 이렇게 달려나가고 있다.

시 나와라, 뚝딱. 수필 나와라, 뚝딱. 소설 나와라, 뚝딱. 뚝딱, 뚝딱.

--- p.87 「나의 삶 나의 문학」 중에서


이제 내 나이 예순아홉. 내년이면 일흔이 된다. 늘그막에 먹고살려고 학력과 이력을 속인 내 인생은 아이러니하다. 결혼 후 시어른들을 모시고 남매를 낳아 기르는 동안 한 번도 나 자신과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여유가 없었다. 그 벌을 60대 초반에 톡톡히 치렀다. 종갓집 맏며느리로 온갖 일 다 겪으면서 그 고초가 나의 몫이라 여겼다. 명절이면 100명의 손님을 치렀고, 시동생 결혼식 음식도 시할머니 상을 당했을 때도 집에서 300명 손님을 혼자 치렀다. 심지어 시외삼촌 상을 당했을 때도 그 집 딸과 며느리는 방 안에 앉아 울기만 해 그 많은 손님 수발을 혼자 드느라 상이 나던 날 쓰러졌다. 그 시절에는 관혼상제를 다 집에서 했다. 하다못해 친척들 돌, 백일, 약혼식, 결혼식까지. 시댁은 물론 시할머니의 친정, 시어머니의 친정 일까지 불려 다녔다. 그곳에서 내가 맡은 역할이 내 인생이었다. 그리고 그 일들을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했다.



김지혜 (2022.5.12). 책들의 부엌. 팩토리나인.

갓 지은 맛있는 책 냄새가 폴폴 풍기는 ‘소양리 북스 키친’. 스타트업을 창업해 몇 년간 앞만 보며 달려왔던 주인공 유진, 우연히 찾아간 소양리에서 마법에 걸리듯 북 카페를 열기로 마음먹고 서울 생활을 미련 없이 정리한다. 입맛에 맞는 음식을 추천해 주듯 꼭 맞는 책을 추천해 주고, 책과 어울리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힐링하는 곳, 숨겨뒀던 마음까지 위로받고 격려받는 곳, ‘소양리 북스 키친’의 이야기

서른을 코앞에 둔 대학 시절 절친들,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내적 정체성의 간극에 혼란을 겪는 연예인, 성공 가도를 달리다 느닷없이 암 진단을 받은 변호사, 꿈꾸던 일에서 좌절하고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어머니의 죽음까지 겪은 뒤 마음의 문을 닫은 한 남자 등 다양한 고민을 안고 소양리 북스 키친을 찾아온 손님들. 각자의 고민과 고통 속에서 방황하던 사람들이 소양리 북스 키친에서 맞이하는 전환의 시간에 대한 이야기 



오후 2시였다. 유진은 타일 바닥 마감 상태를 체크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새 건물 냄새를 빼려고 통유리 창을 완전히 열어 뒀는데, 바깥에서 달콤하면서도 고고한 향내가 났기 때문이었다.... 유리창 바깥에 고요히 서 있던 매화나무가 인사하듯 연둣빛 나뭇 잎을 작게 흔들었다. 그늘진 편의 가지에는 터질 듯한 매화 봉오리가 알알이 맺혀 있었고, 햇볕이 드는 쪽에는 이미 자그마한 매화가 물기를 촉촉이 품은 채, 낮잠에서 깨어난 아기처럼 새하얀 고개를 들고 있었다.


유진은 통유리로 된 창으로 다가가 방충망을 열었다. 먼지 하나 끼어 있지 않은 방충망은 부드럽게 열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산자락에서 불어온 바람이 파도처럼 출렁이듯 밀려왔다. 동시에 매화 향기가 방을 은은하게 채웠다. 유진은 매화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자세히 본 게 난생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눈송이를 닮은 꽃잎을 살펴봤다. 새하얀 꽃잎은 최종 마감을 앞둔 소양리 북스 키친의 바닥 타일 색과 닮아 있었다. 매화꽃 너머에는 북 스테이를 위해 미리 빨아놓은 하얀 침대보가 바람에 팔락였다. 아까 맡았던 달콤하면서도 고고한 향이 매화 향인지 섬유 유연제 향인지 모르겠지만 뭐가 됐다고 하더라도 유진의 기분은 매화 꽃망울처럼 몽글몽글했다.


유진은 창문에서 뒤돌아 책장으로 빼곡히 둘러싸인 북 카페의 내부를 새삼 둘러봤다. 천장까지 맞닿은 높다란 책장들은 책이 아직 꽂히지 않아 대부분 텅텅 비어 있었다. 마치 모델하우스의 샘플 책장처럼 보였다. 책을 놓을 자리에는 라인 조명이 텅 빈 무대를 비추듯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곧 이 공간이 책 냄새 가득한 공간으로 변신하겠지.’   

그때 벽에 테이프로 붙여놓은 A3 크기의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끝도 없이 고민하고 고쳐서 완성한 설계 도면이었다. 여기저기에 연필과 볼펜으로 표시가 되어 있고, 소소한 변동 사항이 적혀 있기도 했다. 설계도는 적당히 구겨지고 낡은 탓에 주변에 티끌 하나 묻어 있지 않은 신축 건물에서 도드라져 보였다. 유진은 연필 메모 자국이 남아 있는 부분을 손가락으로 살며시 만져봤다. 설계 도면과 3D 시뮬레이션으로만 보던 건물이 현실 세계에서 완성되었다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소양리 북스 키친은 책을 팔고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는 북카페와 책을 읽을 수도, 휴식을 취할 수도 있는 북 스테이를 결합한 복합 공간으로 총 4개의 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우선 북 스테이 공간은 건물 3개 동으로 만들었는데 각각 2층짜리 독채 펜션이었다. 북 스테이용이 아닌 나머지 건물의 1층은 북 카페로 사용하고 2층은 스태프들이 거주하는 공간으로 사용하도록 구성했다. 그리고 이 4개의 동은 중앙 정원에 있는 유리로 된 식물원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정원을 중심으로 십자 모양으로 4개의 동이 들어서 있는 셈이다.

북 카페의 전면은 통유리 창으로 되어 있었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소양리 풍경은 자체로 그림이 되었다. 매화나무 너머로는 굽이굽이 이어진 산등성이가 보였다. 유진은 치맛자락이 너울대는 듯한 거대하고 부드러운 곡선을 보면서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서울 본토박이인 유진은 뾰족하고 높은 빌딩과 24시간 편의점,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 그리고 빽빽하게 연결된 지하철과 대단지 아파트로 구성된 도시가 이곳 소양리보다 훨씬 현실감 있게 느껴졌다.                     

                                                                                                    - 프롤로그 소양리 북스 키친


유진은 책 표지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다인을 생각했다. 책 표지에는 평화로운 풍경이 일러스트로 담겨 있었다. 초록색 체크무늬 테이블보가 단정하게 깔려 있고, 영국식 찻잔에 진한 아메리카노가 찰랑거렸다. 커피 옆으로는 샐러드가 놓여 있고, 커다란 창문 밖으로는 바다가 넘실대는 풍경이 보였다.

유진은 다인이 파도 소리를 실어 나르는 그곳을 여행하길 바랐다. 고양이가 하릴없이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고, 장난감 같은 벽돌색 지붕의 자그마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바다 내음을 나누고 있는 마을에서 잠시 쉴 수 있길 바랐다. 다인이 책을 펼치면 등장인물들이 반갑게 맞아줄 것이었다. 어쩌면 이 책은 오랜 시간 동안 다인을 향한 여행을 해온 것인지도 몰랐다. 유진은 페이지를 스르륵 넘겨보다가 한 문장에서 시선이 멈췄다. 마치 문장이 자신을 불러 세운 것 같았다.

여긴 생각하기에 좋은 장소야. 바닷가에 나가면 더 작아진 기분이 들거든.

내가 덜 중요해지는 것 같고. 그러면 모든 것이 알맞은 비율을 되찾게 되지.

유진은 그 페이지에 책갈피를 꽂아둔 채, 금빛 물방울무늬가 반짝이는 진한 빨간색 포장지로 책을 포장했다. 그리고 줄무늬가 없는 노트 한 장을 찢은 뒤 손바닥 크기만 하게 자르고 볼펜으로 꾹꾹 눌러 짧은 편지를 썼다.

‘당신만의 곳간채 창고를 찾길, 그곳에서 파도 소리를 듣길, 할머니의 손길을 닮은 따스한 순간을 만나기를 바라며…….’         - 1. 할머니와 밤하늘 중에서


북 카페 세미나실에서 낭독이 이어지고 있었다. 잔잔한 피아노 연주곡이 배경음악처럼 깔려 있었다. 길쭉한 원목 테이블에는 예닐곱 명의 사람이 앉아 있었고, 한 사람이 프로젝터 앞에 앉아 낭독 중이었다.

“남부의 겨울은 온화하게 다가와 슬며시 눌러앉는다. 담요처럼 포근한 햇살이 카야의 어깨를 감싸고 점점 더 깊은 습지로 유혹했다. 가끔 알 수 없는 밤의 소리가 들려오고 코앞에서 내리꽂힌 번개에 소스라쳐 놀랄 때도 있지만, 카야가 비틀거리면 언제나 습지의 땅이 붙잡아 주었다. 콕 집어 말할 수없는 때가 오자 심장의 아픔이 모래에 스며드는 바닷물처럼 스르르 스며들 었다. 아예 사라진 건 아니지만 더 깊은 데로 파고들었다. 카야는 숨을 쉬는 촉촉한 흙에 가만히 손을 대었다. 그러자 습지가 카야의 어머니가 되었다.”

책의 문장은 소리가 되어 공간에 퍼져나갔다. 종이에 인쇄된 글자가 누군가의 음성을 통해 갓 태어난 아기 동물처럼 현실 세계로 걸어 들어왔다. 어느새 작은 세미나실은 카야의 늪지가 되었다. 바깥에서 매미 소리가 풀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처럼 아득하게 깃들었고 유리창 바깥으로 반딧불이 몇 마리가 길을 잃은 별똥별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북클럽을 이끄는 유진이 입을 열었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의 카야에게서 누구나 자신과 닮은 구석을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카야가 다섯 살 때 엄마가 집을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아버지의 폭력에 맞설 힘이 없었던 형제자매도 하나둘씩 집을 벗어났고, 결국 술주정뱅이 아버지 마저 떠났죠. 그리고 습지와 늪만 가득한 자연에 아이는 버려졌던 겁니다.”

마리는 마음을 들킨 기분이었다. 그동안 꽁꽁 싸매고 또 싸맸던 비밀이 한낮에 내리쬐는 햇빛을 받아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자신의 얼굴에 피부처럼 붙어 있던 가면이 슬며시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마리는 어느새 카야의 물빛 눈동자를 상상하고 있었다.

유진이 말을 이었다.

“세상이 카야에 대한 온갖 루머를 만들어내는 동안, 카야는 외로움을 친구 삼으며 습지와 늪이 품어주는 위로의 힘으로 성장해 가요. 신비로운 카야의 미모에 매료되는 체이스와 카야의 어린 시절 유일한 친구였던 테이트가 인생에 등장한 뒤로, 카야의 인생은 변화의 급류를 타게 되지요. 작가가 카야의 외로운 투쟁과 테이트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통해 인생에 외로움이 무엇인지,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되묻고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4. 한여름밤의 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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