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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형일 Jun 12. 2022

우리의 밤이 시작되는 곳, 너의 하늘을 보아.

#22.05.21. 고요한, 박노해

고요한 (2022.5.13). 우리의 밤이 시작되는 곳제 18회 세계문학상 수상작나무옆의자

장례식장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진짜 우리의 밤이 시작된다! 서울의 밤을 떠도는 청춘들 삶과 죽음을 껴안는 애도와 성장의 서사. 

‘나(재호)’와 ‘마리’는 자정이 넘어 장례식장 일이 끝나면 새벽 첫 차가 다닐 때까지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낸다. 처음에는 도보로, 그다음에는 오토바이를 타고 밤새 불을 밝힌 맥도날드를 찾아 광화문 일대를 떠돈다. 

“그렇게 걷고 또 걷는 모습을 보여주기만 하는데, 소설은 삶과 죽음의 시간을 껴안고 우리 시대 젊은이들의 가슴 시린 초상에 이른다.”(문학평론가 정홍수)

고요한 작가의 고요하지만 가슴 시린 청춘의 밤. 


<책속으로..>

알바 자리가 없어 여기까지 왔어.

대학 졸업 후 나는 1년 넘게 취업 재수를 하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카페 아르바이트에서부터 백화점 일일 판매도 했고 식당에서 서빙도 했다. 분식집에서 하루 종일 김밥을 말기도 했다. 그때 얼마나 많은 김밥을 말았던지 종이만 보면 둘둘 마는 버릇이 생겼다. 분식집에서 김밥을 만 개 정도 만 후 그만두고 결혼식장에서 주차 안내 도우미 일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3개월간 일했는데 건물이 들어서는 바람에 더는 못 하고 장례식장으로 밀려났다. 이 일은 시간대가 일정치 않고 밤늦게까지 일했기 때문에 다른 아르바이트보다 보수가 사오천 원 많았지만 두 배는 더 피로했다. 마리는 이번 아르바이트가 스물다섯 번째라고 했다. 대학 졸업 후 마리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이 일을 한 것이다(pp.17~18).


밤에 불을 밝힌 곳은 맥도날드밖에 없네. 나는 손으로 맥도날드를 가리켰다.

마치 어둠 속에 떠 있는 배 같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배.

그럼 저 맥도날드 배에 승선해볼까?

횡단보도에 녹색불이 켜졌을 때 우리는 맥도날드를 향해 뛰어갔다. 맥도날드 앞에 서자 불빛이 인도까지 쏟아져 나왔다. 인도에 서서 나는 실내를 바라보았다. 군데군데 앉아 있는 사람들은 꾸벅꾸벅 졸거나 휴대폰을 쥐고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탁자에 엎어져 자는 사람도 있었고 신문을 펴서 보는 사람도 있었다. 혼자 구석 자리에서 햄버거를 먹는 사람도 보였다. 마리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창가에 앉았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속에 들어온 것 같아. 나는 어둠에 덮인 광화문과 실내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늦은 밤 술집 안에 한 부부와 등을 보이고 앉은 남자와 가게 주인이 있는 그림이야. 밖은 어둡고 적막한데 술집 안은 환해. 불이 켜진 술집으로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밤에 불이 켜진 맥도날드를 볼 때마다 난 호퍼 그림이 떠올라(pp.21~22).


거실 안으로 들어온 햇빛에 정신을 차린 나는 목을 잡은 손을 뗐다. 누나의 목에는 손가락 모양의 자국이 벌겋게 생겨 있었다. 누나의 눈은 감겨 있었고 입은 더 벌어져 있었다. 흔들어 깨워도 눈을 뜨지 않아 뺨을 후려쳤다. 그래도 누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눈 떠, 누나. 눈 뜨라고. 그때 벚나무 위에서 하얀 뱀이 마당을 날아 거실로 들어왔다. 하얀 뱀은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다 벌어진 누나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뱀이 목구멍을 타고 들어가자 누나의 배가 볼록해졌다. 하얀 뱀은 몸속을 헤집고 다니다 누나의 영혼을 꺼내 들고 하늘로 올라갔다. 그때 엄마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pp.42~43).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 이 정도면 괜찮은 이름인데.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죽는가도 중요해. 요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게 문제야. 타인이 죽는다는 건 인식하지만 자신이 죽는다는 건 인식하지 않더구나.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거지.

죽기 위해 사람들이 그 모임에 나오는 거 같아.

죽는 것도 중요하니까(pp.47~48)


어쩌다 나는 여기까지 흘러왔을까. 돌이켜 보면 난 안 해본 알바가 없어. 편의점, 카페, 레스토랑, 노래방, 가구점, 만홧가게, 과일가게……. 시급 육천 원대에서부터 만 원대까지 다 해봤어. 육천 원과 만 원 사이를 오가다 장례식장까지 온 거야. 이러다 알바가 평생직장이 될까 두려워.

나도 그래.

내가 동의하자 마리는 말을 이었다.

남들이 보면 장례식장에서 알바하는 내가 한심하겠지. 젊은 애가 그런 일을 한다고 친구들도 이상한 사람 취급했으니까. 하지만 우리도 언젠가 저 물고기처럼 훨훨 날아가는 날이 오겠지.

우리에게도 그런 날이 올 거야. 저 물고기도 자신이 날아갈 줄은 꿈에도 몰랐을 테니까. 우리도 언젠가는 정규직 일자리를 얻을 거야. 물고기처럼 훨훨 하늘을 날아갈 거야. 산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일할 날이 올 거라고(pp. 103~104).


나는 설거지를 하는 아버지의 등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이제껏 혼자라고 느낀 적은 없었는데 불현듯 혼자가 된 것 같았다. 10년이 흐르고 20년이 흐른 뒤에도 아버지가 내 곁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머잖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앞으로 아버지는 점점 더 작아질 것이다. 머리카락은 하얘지고 피부에는 하나둘 검버섯이 피고 이마의 주름살은 깊어지고 시력은 갈수록 나빠질 것이다. 아버지가 늙어갈 모습을 상상하자 말할 수 없이 쓸쓸해졌다. 아버지가 죽으면 난 가족이 없네(p.169).


우리의 밤은 죽은 자들이 있는 장례식장에서 시작되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장례식장에서 보았던 창밖 풍경. 상주들의 울음소리와 시끄럽게 떠들며 술을 마시던 조문객들. 그 사이로 피어오르던 육개장 냄새와 국화 냄새와 밤새도록 꺼지지 않고 타오르던 향 냄새. 그런 냄새 속에 우리의 밤이 있었다. 그리고 일이 끝나 장례식장을 나서면 진짜 우리의 밤이 시작되었다. 맥도날드를 찾아 서대문에서부터 광화문과 종로 일대까지 걸었고 그것도 성에 차지 않아 오토바이를 타고 돌아다녔다. 상조회사에 입사지원서를 넣음으로써 한 시절이 흘러간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우리의 밤은 다시 시작될 것이었다.

 

박노해 (2022.5.13). 너의 하늘을 보아느린걸음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이후 12년 만에 박노해 시인의 신작 시집 .

『너의 하늘을 보아』. 탄생과 사랑과 죽음이라는 인생의 굵직한 순간 사이로 아이와 부모, 교육과 배움, 연애와 이별, 청춘과 노년, 정원과 농사, 독서와 여행, 고독과 관계 등 삶의 모든 순간이 이 한 권의 시집에 담겨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란다. 기존의 박노해 작가 작품 처럼 내 영혼을 맑게 하는 시, 인생의 고비마다 꺼내 읽고 싶은 시가 가득하다고... .


<책속으로..>

“눈물이 날 때의 그 진실한 기분 / 허위가 씻겨져 내려가는 기분 // 비를 쏟은 하늘은 얼마나 해맑은가 // (…) 사랑은 우는 걸 좋아한다 / 하늘은 우는 걸 좋아한다 / 나는 우는 걸 좋아한다”('우는 걸 좋아한다'). 

"네가 자꾸 쓰러지는 것은 / 네가 꼭 이룰 것이 있기 때문이야 // 네가 지금 길을 잃어버린 것은/ 네가 가야만 하는 길이 있기 때문이야 // 네가 다시 울며 가는 것은 / 네가 꽃피워 낼 것이 있기 때문이야 // 힘들고 앞이 안 보일 때는 / 너의 하늘을 보아 // 네가 하늘처럼 생각하는 / 너를 하늘처럼 바라보는 // 너무 힘들어 눈물이 흐를 때는 / 가만히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 가 닿는 // 너의 하늘을 보아" ('너의 하늘을 보아')

"사람은 자신만의 / 어떤 사치의 감각이 있어야 한다 /자신이 정말로 좋아하는 것을 위해 / 나머지를 기꺼이 포기하는 것 /제대로 된 사치는 최고의 절약이고 / 최고의 자기 절제니까 //  사람은 자신만의 어떤 멋을 간직해야 한다 / 비할데 없는 어떤 고유한 그 무엇을 위해 / 나머지를 과감히 지워내는 것 / 진정한 멋은 궁극의 자기 비움이고 / 인간 그 자신이 빛나는 것이니까."('진정한 멋')

“산마을에 눈이 내리면/회상에 잠기기 좋은 밤이다/(…)/회상의 말은 나를 태우고/살아온 시간을 거슬러/주마등走馬燈처럼 달린다/(…)/내가 가야만 했으나 가지 못한 길들과/내가 해야만 했으나 주지 못한 사랑과/잘해주고 싶었으나 어찌하지 못해서/눈물겹고 애가 타던 회한의 자리로,/그 상처의 시간으로 날 데려가는 걸까”(‘회상回想의 말’)

“저기 허공에 사람이 있습니다/(…)/제발 좀 들어주세요/제발 좀 만나주세요//경제도 기업도/사람이 하는 것 아닙니까//정치도 법률도/사람이 하는 것 아닙니까//힘이 없어도 돈이 없어도/함께 살아야 할 나라 아닙니까/(…)/일하는 사람들의 존엄이/정의를 울부짖는 얼굴이//허공에 매달려 있습니다/여기 사람이 있습니다”(‘저기 사람이 있습니다’)

“가난이 서러울 땐 하늘을 보았어요 / 죽은 아빠가 그리울 땐 하늘을 보았어요 / 억울하고 따돌림당하고 외로운 날엔 / 홀로 먼 길을 돌아가며 하늘을 보았어요 // (…) 나는 하늘을 보는 소년이었어요 // (…) 나에겐 하늘이 있었어요 / 하늘이 눈에 담은 내가 있었어요 / 오늘도 난 하늘을 보는 소년이에요”(「하늘을 보는 소년」). 

우리 모두에게는 자신만의 하늘이 있다.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되는 순간조차. 하늘 같은 마음의 그대에게, 오래도록 사랑의 불씨를 품어온 박노해 시인의 시집 『너의 하늘을 보아』를 전한다. 지구의 끝간 데까지 밀어 나간 박노해 시인이 검푸른 우주를 품고 ‘끝에서 나오는 새로운 길’을 별의 지도처럼 펼쳐내는 시집. 어느 쪽을 펴 보아도, 삶으로 살아낸 지혜를 기꺼이 나눠주고, 나만의 길을 찾아갈 용기가 되어줄 것이다. 표제 시 「너의 하늘을 보아」가 수많은 10대들의 “내 인생의 시”가 된 이유이기도 하다. 별빛 쏟아지는 이 푸른빛의 시집을 아이들 곁에 꼭 놓아주면 좋겠다. “너무 힘들어 눈물이 흐를 때는 / 가만히 네 마음 가장 깊은 곳에 가 닿는 // 너의 하늘을 보아”(「너의 하늘을 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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