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우의 여름 (2)
삶을 산다는 것은 예기치 않은 일들, 인연들과의 마주침 같아요.
“연우야, 나 대신 소개팅 좀 나가줘.”
초등학교 동창 지완이의 예기치 않은 황당한 제안은 그 해 여름 제 삶에 많은 변화를 가져옵니다. 지완이의 간절한 표정, 그리고 저의 약간의 호기심이 마주하면서 전 ‘연우’가 아닌 ‘지완’이란 이름으로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이름은 김윤환. 증권회사 신입사원이라고 자기를 소개하더군요. 외교관인 아빠를 따라 해외에서 오래 살았다는데 첫 만남부터 티가 팍팍 났어요. 레스토랑을 데려갔는데 한 시간 웨이팅이고, 고깃집으로 노선을 선회했지만 거기도 연기가 자욱한 가게 밖에서 20분을 기다려야 했죠. 날은 덥고, 사람은 많고, 지완이가 빌려준 하이힐 때문에 발은 아프고, 미치겠더라구요.
결국 전 해외파~ 증권파~ 신입사원 윤환의 소매를 잡고 제가 좋아하는 곳으로 이끌었어요. 어디냐구요?
한강 고수부지.
편의점에서 캔 맥주 두 개를 사 바람이 시원한 벤치 한 켠에 자리를 잡았죠. 윤환씨는 미안한 마음인지, 어색한 마음인지,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 놓더라구요.
“아버지가 주재원이셔서 어릴 때부터 외국생활을 했거든요. 대학 때 한국에 들어왔는데 다들 너무 바쁜 거예요. 금융 삼종 세트 준비하고, 공모전도 참여하고, 취업하고서도 연수받고, 발령받고. 쉴 틈은 없고 오늘도 미리 예약을 한다는 게...”
바람이 시원했어요. 해질녘의 한강을 마주하니 괜히 마음도, 몸도 여유로워지는 거예요.
“너무 애쓰지 마세요.”
“네?”
“그냥 바람 맞으면서 시원하게 맥주 한 잔 하고 쉬어요, 우리.”
시원한 강바람을 마주하니 저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리게 되었어요. 나름 싱어송라이터잖아요. 제가.
하이힐을 벗어던지고 맨발로 잔디를 걷기 시작했어요. 윤환이 그런 저를 웃으며 바라보는데...
어라? 그 모습이 꽤 멋있는 거예요.
꽤 괜찮은 여름날의 밤이었죠.
윤환씨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르투고 도밍고 카페에 들렸어요. 저의 아지트죠.
<나의 아저씨>에 ‘정희네 술집’이 있다면, 제게는 ‘아르투고 도밍코 카페’가 있답니다. 몇 테이블에 단골 손님이 앉아 있었고, 단짝 친구면서 우리 밴드의 기타리스트 ‘기오’가 바에 앉아 기타를 튕기고 있었어요. 술과 음악을 애정하고 애정하는 아르투고 도밍고의 사장님! 지영언니는 오늘도 자유로운 영혼답게 술에 취해 있었죠. 매일 술에 취한 이유도 다채로운데, 오늘 지영 언니가 취한 이유는 월세 때문이래요.
“언니, 왜 벌써부터 취했어? 밥은? 밥은 먹었어? 어?”
“밥? 난 밥 싫어! 싫어! 싫어!: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건데, 밥이 왜 싫어.”
“난 밥 먹자고 일하는 거 싫다고!”
테이블에 고개를 쿵쿵 박는 언니를 보면서 기오에게 자초지종을 물었어요. 손님 좀 드나들고 하니깐 주인장이 바로 월세 올려달라고 했다는데... 쩝... 세상은 참 야박해요.
“니들 잘 들어. 내 이름이 78년생 중에 젤 흔한 이지영이라고 니들이 날 우습게보면 안 돼. 알아?! 나 초등학교때 공부 잘했다. 진짜야. 그지 기오야? 내 초등학교 때 성적이었음 나도 대학 갈 수 있었어. 그렇담 이 나이에 적금 삼천 만 원쯤은 가진 도도한 커리어 우먼으로 살았을 거고. 그럼, 주변 시세 어쩌네 들먹이며 빌어먹을 월세만 바락바락 올리는, 아트적인 거라곤 쥐뿔도 모르는 대머리랑은 상종도 안 했을 거고! 그럼! 고작 그 몇 푼 빌리겠다고 집에서 쓰레기 취급은 안 받았을 거고! 그렇담 내 인생의 오류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오류투성이 언니지만 전 이 언니를 정말 정말 좋아해요. 아트적 기질? 자유로운 영혼? 그런 것 때문은 아니에요. 이 언니는 맨날 술에 취해 있고, 맨날 실수를 하고, 맨날 후회를 하지만... 상큼한 유머와 적절한 멜랑콜리로 자신의 실수와 후회와 주사를 넘어서죠. 왜 주변을 보면 잘 차려 입은 정장, 번지르르한 말로 자신의 오류와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는 뻔뻔한 사람들 태산이잖아요. 위선적이고 뻔뻔한 사람들! 그 사람들 사이에서 지영 언니의 덜컥거림, 눈물, 실수, 후회, 사과, 웃음이 전 좋았어요. 그게 제가 아르투고 도밍고 카페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구요.
좋아하면 닮아가게 되는 걸까요? (너무 자뻑같지만~~)
제가 지영언니와 아르투고 도밍고 카페를 좋아하는 이유와 비슷한 이유로 윤환씨는 저를 좋아하기 시작했어요. 한여름 밤의 첫 만남 이후 윤환씨가 제게 신호를 보내기 시작한 것이죠.
좋아한다는 신호. 관심있다는 신호, 더 만나고 싶다는 신호.
“잘 들어갔어요?” “오늘 즐거웠어요.” “다음에 제가 만회할 기회를 주세요.” “이번 주말에 영화 볼래요?” “오늘 하루도 잘 보내요.”
그런데 어쩌죠? 윤환씨는 저를 '연우'가 아니라 '지완'으로 알고 있잖아요. 그가 보내는 카톡이나 문자도 제 핸드폰이 아니라 지완의 핸드폰으로 전송되잖아요. 예기치 않은 순간에 한 남자가 찾아왔는데, 이 남자 엉뚱한 곳에 신호를 보내기 시작합니다. 매일 아침. 매일 오후, 매일 저녁.
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남자, 괜찮단 말이다...
<3화에 계속>
<KBS 드라마스페셜 2024> 올해도 단막극은 계속됩니다. 많은 시청 부탁드려요.
★ <영복, 사치코> 다음주 KBS2TV 11월 26일(화) 밤 10시 45분 방송, 웨이브 다시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PFKRnMm-vVU (예고편)
★ <사관은 논한다> KBS2TV 11월 5일(화) 밤 10시 45분 방송, 웨이브 다시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0Rbo145-y9A&t=21s (하이라이트)
★ <핸섬을 찾아라> KBS2TV 11월 12일(화) 밤 10시 45분 방송, 웨이브 다시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2eDb7d3ikww&t=38s (하이라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