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브 본느프와의 시집 『두브의 운동과 부동에 대하여』
1. 다른 삶들은 있는가
이 문장의 물음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최초의 만남부터 지금까지 저 문장은 내 왼쪽 심장에 박혀서 매순간 뛰고 있는 근본 물음이다. 나는 저 문장을 1988년, 열여덟 살 여름에 처음 만났다. 열일곱 살의 봄을 앞두고 나는, 지상의 방 한 칸에서 혼자 살기 시작하였다. 그 방은 높고 춥고 외롭고 어두웠다. 혼자만의 밥을 짓기 위해 새벽에 일어났으며 도시락 두 개를 준비하여 학교에 갔다. 학교에서는 수업에 열중하였지만 삶의 어떤 방향성을 알려주는 스승은 드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멀고 희미하였다. 집에 도착하여 방문을 열 때마다 검푸른 어둠이 가득히 흘러나왔다. 나는 어디로 흘러가야 할지 모르는 그 방바닥에 엎드려 열일곱 살의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보냈다. 그리고 열여덟 살의 봄날. 나는, 이름도 낯선 미지의 이름, 아르뛰르 랭보(1854-1891). 그의 시집 『지옥에서 보낸 한 철』(민음사, 1974)을 문학평론가 김현(1942-1990)의 번역으로 읽었다. 한 번 읽었지만 읽었다, 라고 말할 수 없는 수준의 독서였다. 그러나 “결핍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헛소리 Ⅱ」)는 나를 위해 미리 준비한 시구처럼 읽혔고 “다른 삶들은 있는가Est-il d'autres vies”(「나쁜 피Mauvais Sang」)라는 물음은 단번에 심장에 박혔다. 그리하여 내가 당장 답할 수 없는 물음을 품은 그 시집은 쉽게 내려놓을 수 없었다. 학교에서 선택한 제2외국어는 프랑스어였다.
무더운 팔월의 광복절. 성당 선배를 따라나선 시화전에서 나는, 고교생 연합문학회에 가입하였다. 매주 일요일에 모인 ‘빛고을’ ‘남녀’ 고교생들이 한 편의 시를 놓고 서너 시간씩 합평회를 하는 문학회였다. 나는 ‘시’에서 ‘다른 삶들’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매주 합평회 시간에는 그 누구의 감시와 어떤 제약도 없이 말할 수 있었고 나와 ‘다른’ 삶의 이면을 살펴볼 수 있었다. ‘시’는 다른 삶으로 진입할 수 있는 입구이자 이행할 수 있는 통로였다. 이과생이었던 나는, 문과로 전과하였고 마침내, 시를 쓰려는 대학생이 되었다. 빛고을, ‘광주’를 문학과 함께 떠나면서 다른 삶의 성문을 처음 열었던 것이다.
대학에서 나는 독학자였다. 국문과 강의실에 앉아있었지만 펼쳐놓은 책은 외국문학 관련 서적이었다. 우선, 랭보의 시를 김현의 번역과 다른 이준오의 번역으로 『랭보 시선』(책세상, 1990)을 읽었다. 물론 원문과 대조하여 읽을 만한 프랑스어 실력이 여전히 없었기에 원문과 번역 사이의 간극을 직관과 상상력으로 채우면서 읽었다. 그리고 랭보의 ‘투시자(Voyant)’ 편지로 유명한 「폴 드므니에게 보낸 편지(1871.5.15.)」를 읽었다.
나는 17살 랭보의 놀라운 문장이 전개하는 ‘경이(la merveille)’ 앞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는데, 그 중에서도 “모든 감각들의 착란을 통해서 미지에 이르는 것”과 “나는 타자입니다”에서는 거의 정지 상태로 있었다. ‘미지(l'inconnu)’라는 낱말과 ‘타자(un autre)’라는 이름은 내가 줄곧 탐색해온 ‘다른 삶’과 다른 것이 아니었다. 시인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투시하고 미지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라는 것과 ‘지금’의 ‘나’와 ‘다른’ ‘타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랭보의 편지를 통해 직감하였다. 나중에서야 “나는 타자입니다”의 원문을 확인했을 때, 그것을 예감한 것처럼 결코 평범한 문장이 아니었다. 랭보는 “나는 타자입니다”를 “Je est un autre.”로 썼던 것이다. 그것은 영어에서 “I is an other.”라고 쓴 것과 다르지 않다. 1인칭 대명사 ‘I'에 대응하는 Be동사 ‘am’을 쓴 것이 아니라 3인칭 대명사에 대응하는 Be동사 ‘is'를 쓴 것이다. 즉, “Je suis un autre.”로 써야 하는데, 랭보는 의도적으로 “Je est un autre.”로 썼던 것이다. 랭보는 1인칭 ‘나’를 객관화된 3인칭 ‘나’로 거듭 태어나도록, 1인칭 ‘나’의 죽음 이후에 태어나는 3인칭 ‘나’, 다른 나, 타자, 나의 타자성을 표현하기 위해 “Je est un autre.”로 쓴 것이다. 나는 랭보를 통해 다른 삶에 대한 가능성은 무엇보다 내가 다른 나, 타자가 되는 지점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2. 『半獸神의 午後』에서 ‘파리, 데카르트 가(街)’까지
랭보의 시에 대한 직관적 독해는 프랑스 시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는데, 민희식과 이재호 편역의 『半獸神의 午後』(범한서적, 1970)에서 그 관심은 증폭되었다. 돈이 없으면서도 거의 매일 들렀던 헌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프랑스 시선집이었는데, 프랑수아 비용부터 르네 샤르까지 아우르는 시집이었다. 나는 말라르메의 시를 표제로 삼은 이 시선집에서 처음 이브 본느프와(Yves Bonnefoy, 1923-2016)를 만났다. 「시법Art poétique」이라는 단 한 편의 짧은 시였는데, “첫 나무가지들로부터 단절된 얼굴/낮으막한 하늘 아래 두려움으로 만들어진 美//어느 난로에다 네 얼굴의 불을 놓을 수 있을까/오 머리를 아래로 던진 채로 포로된 메나드여?”라는 시 전문에서 첫 두 시행만으로도 주목을 끌었다. 그것은 현실에 나타난 아름다운 얼굴이라는 것이 저 최초의 나무와 자연으로부터 단절된 두려움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시적 인식을 드러낸다. 아름다움은 현실에서 언제든지 파괴될 수 있는 것이고 그 아름다움 너머에는 미지의 어떤 실재가 있음을 암시하는 시행이었다. 나는 이브 본느프와의 시행 속에서 랭보의 ‘미지’와 ‘다른 삶’의 행간을 읽었다. 다른 한편으로 말라르메의 『시집』(황현산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5)이 출간되기 전의 1990년대였으므로 저 “하늘 아래 두려움”의 기원 한 줄기에 말라르메가 놓여있었는지는 아직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정기수 번역을 통해 보들레르의 『악의 꽃/파리의 우울/인공낙원/내면일기』(정음사, 1968) 읽었던 것을 떠올리면서 이브 본느프와 역시 보들레르의 후예임을 직감하였다. 여전히 한국에서 자주 언급되는 보들레르와 랭보와 말라르메의 전집 번역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브 본느프와에 대한 관심은 ‘열음세계시인선’에 포함된 이가림(1943-2015) 번역의 시선집 『살라망드르가 사는 곳』(열음사, 1987)을 통해 이어갈 수 있었다. 이번에 글을 쓰기 위해 이브 본느프와의 시집 『Poèmes: Du mouvement et de l'immobilité de Douve, Hier régnant désert, Pierre écrite, Dans le leurre du seuil』(Gallimard, 1982, 이하 인용은 책의 쪽수만 표기)과 비교하여 재독한 결과 『살라망드르가 사는 곳』(열음사, 1987)은 이브 본느프와의 초기 시집 3권에서 뽑은 시선집이었다. 팸플릿 형태의 비공식적 시집 『반플라톤Anti-Platon』(1947)을 제외한 그의 공식적인 첫 시집 『두브의 운동과 부동에 대하여Du mouvement et de l'immobilité de Douve』(1953)에서 13편, 두 번째 시집 『사막을 지배하는 어제Hier régnant désert』(1958)에서 12편, 세 번째 시집 『글이 쓰인 돌Pierre écrite』(1965)에서 16편을 번역한 것이어서 기존에 번역된 『세계전후문제시집』(신구문화사, 1964)을 포함한 7권의 세계시인선집들과는 그 분량과 집중도에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매우 중요한 번역본이었다. 그런 까닭에 이가림 번역의 시선집 『살라망드르가 사는 곳』은 한국에서 이브 본느프와의 초기 시세계에 대한 개괄적 소개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그 시편들의 순서가 일정하지 않고 섞여있을 뿐만 아니라 시편의 부분 번역만 되어있어서 오독의 여지도 있는 시선집이었다.
시선집 『살라망드르가 사는 곳』(열음사, 1987)만으로는 이브 본느프와에 대한 호기심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 찾아서 읽은 것은, 계간 『외국문학』과 『현대시세계』, 『현대시사상』과 『현대시학』 등에 실린 평론들이었다. 특히, 이브 본느프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정란의 세 편의 글, 「이브 본느프와 또는 알리바이의 거부」(『외국문학』15, 열음사, 1988.8.), 「詩, <희망>을 가질 의무; 이브 본느프와」(『현대시학』240, 현대시학사, 1989.3.), 「본느프와, 망설이는 사제」(『현대시사상』10, 고려원, 1992.3.)는 이브 본느프와에 대한 이해의 첫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한편으로 김현의 『행복의 시학/제강의 꿈』(문학과지성사, 1991)을 통해 알게 된 제네바 학파 평론가 쟝 삐에르 리샤르(J.P. Richard)의 이브 본느프와론 「사막을 지배하는 어제(상)Hier régnant désert」(이기언 옮김, 『현대시세계』3, 청하, 1989.6.)와 「사막을 지배하는 어제(하)Hier régnant désert」(이기언 옮김, 『현대시세계』4, 청하, 1989.9.)는 프랑스에서 수용되는 이브 본느프와를 살펴볼 수 있었다. 또 다른 글로는 민희식의 「사물·언어·경험: 이브·본느후아의 세계」(『청오』4, 1970.5.)와 이건수의 「본느프와의 처녀시집 『두브』」,(『현대시학』346, 현대시학사, 1998.1.) 등이 있었다.
이브 본느프와에 대한 국내 2차 저작물을 제외하고 이브 본느프와가 직접 쓴 산문의 번역본을 1990년대에 찾아서 읽을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민희식에 의해 ‘이브 본느후아’로 번역된 「시의 行爲와 場所」(『시인』 11, 한국시단사, 1969.11.)는 원문의 출처가 표기되지 않았었는데, 그 글은 누벨 바그 상을 수상한 이브 본느프와의 최초 시론집 『있음직하지 않은 것L'improbable』(Merure de France, 1959)에 수록된 「시의 행위와 장소L'acte et le lieu de la poésie」에 해당하며 이브 본느프와의 시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시론이다. 다른 글로는 이가림 번역의 「영국 시와 프랑스 시의 거리」(『불사조의 시학』, 정음사, 1978./Jaques Charpier․Pierre Sghers, L'Art poétique, Editions Seghers, Paris, 1956), 신교춘 번역의 「프랑스 문학과 동일성의 원칙」(『시운동 1984』, 청하, 1984), 장정애 번역의 「말라르메의 시학La poétique de Mallarmé」(『A. 랭보와 S. 말라르메』, 한국 A. 랭보연구회, 1999) 정도를 구해서 읽을 수 있었다.
2001년에서야 이브 본느프와의 첫 시집 『Du mouvement et de l'immobilité de Douve』(1953)은 이건수의 완역을 통해 『두브의 집과 길에 대하여』(민음사, 2001)라는 표제로 번역됨으로써 그의 시세계에 대해 국내 독자들은 정식으로 입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대학원 박사과정을 졸업하던 2008년 7월, 프랑스에 처음 갔을 때, 이브 본느프와를 의외의 장소에서 갑자기 만났다. 2008년 7월 23일. 파리, 소르본 대학의 뒷골목, 데카르트 가(街)(rue Descartes, paris)와 끌로비 가(街)(rue Clovis, paris)의 교차로에서 우연히 고개를 돌렸을 때, 데카르트 가(街) 40번지 건물벽에 그려진 푸른 나무 벽화가 문득, 솟아올랐다. 그 나무 벽화 옆에 새겨진 이브 본느프와의 이름과 시가 나타났다. 나는 돌기둥처럼 멈춰서 그 풍경을 사진으로 찍고 파리 15구의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 해 여름을 보내고 나는, 생 제르멩 가(街)의 서점 ‘지베르 조셉(Gibert Joshep)’에서 이브 본느프와의 시집을 비롯한 여러 시집들을 구입해서 귀국하였다. 고흐가 살던 아를(Arles), 헌책방에서 구한 삐에르 쟝 주브(Pierre Jean Jouve)의 시집 2권도 가방에 들어있었다. 삐에르 쟝 주브(Jouve)는 ‘두브(Douve)'의 이브 본느프와가 존경하는 시인이었다. 몇 해 후 한대균의 완역으로 시집 『빛 없이 있었던 것Ce qui fut sans lumière, 1987』(지식을만드는지식, 2011)이 출간되었다. 이브 본느프와가 자신의 글쓰기 작업의 후반부, 그 출발점이라고 언급한 주요 시집이었다. 그리고 2016년 7월 1일. 르몽드 인터넷 기사를 통해 이브 본느프와의 사망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는 93세의 일기로 작고할 때까지 시집 20여권, 시론집과 번역론을 포함한 산문집 50여권 이상을 출간하였다. 국내에서는 이브 본느프와의 번역론을 정식으로 살펴볼 수 있는 송진석 번역의 『햄릿의 망설임과 셰익스피어의 결단L'hésitation d'Hamlet et la décision de Shakespeare, Seuil, 2015』(한울, 2017)이 출간되었다. 국내 연구로는 1990년대 씌어진 4편의 석사논문과 2000년대에 씌어진 소논문 13편이 있다. 이것들이 2018년 1월, 한국에서 접할 수 있는 이브 본느프와에 관한 자료의 거의 모든 것이다.
3. 시의 성문, 두브 앞에서
이브 본느프와의 첫 시집 『두브의 운동과 부동에 대하여』(1953)에는 분명히 보들레르와 랭보와 말라르메의 시적 전통이 살아있다. 보들레르(1821-1867)가 『악의 꽃』(1861, 제2판)의 제1부 「우울과 이상Spleen et Idéal」에서 줄곧 보여준 것은 그 ‘이상’, 절대(absolu)에의 추구와 그 절대에 도달하지 못하는 한계에서 겪는 ‘우울’ 사이를 오르내리는 무한 ‘운동(mouvement)'이다. 그것은 시 「교감Correspondances」에서 “인간이 상징의 숲과 정다운 눈길”을 주고 받을 수 있었던 시간과 본원적 경험의 상실 이후에 발생하는 운동과 정지의 무한 반복 상태와 다르지 않다. 보들레르는 절대, 그 ‘상징의 숲’에 도달하고자 「상승Élévation」의 무한 운동을 시도하지만 그 한계 너머로 진입하지 못하고 추락한 「알바트로스L'Albatros」의 죽음에 가까운 상태를 그려낸 바 있다. 그러나 그는 죽음 앞에서도 결코 절대에의 추구를 포기하지 않는 태도를 견지하는 프랑스 현대시의 시적 전통을 확립하였는데, 이브 본느프와의 첫 시집 『두브의 운동과 부동에 대하여』(1953) 또한 그 시적 전통 속에서 절대에의 무한 추구와 그 한계에서의 죽음과 재생을 그려낸다.
다른 한편으로 그의 첫 시집은 랭보가 시집 『일뤼미나시옹Illuminations』을 통해 도달한 세계의 끝에서 출발한다. 지상의 “날들과 계절들이, 인간들과 나라들이 사라진 후Bien après les jours et les saisons, et les êtres et les pays”(「야만인Barbare」)에 나타나는 장소, 그 미지의 「진정한 장소vrai lieu」를 거듭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줄곧 지향한다. 아울러 그의 첫 시집은 말라르메(1842-1898)가 언어의 우연성과 인간의 유한성에도 불구하고 온전한 실재를 담아내려했던 언어의 무한한 시도와 그 실패의 태도를 담아낸다. 즉 이브 본느프와의 첫 시집 『두브의 운동과 부동에 대하여』(1953)는 절대에의 추구라는 무한 ‘운동과 부동’, ‘미지의 진정한 장소’와 그 실재를 담지하려는 ‘언어의 시도와 실패’를 그려내는데, 그것은 단 한 번의 시도로서 출현한 것이 아니라 이브 본느프와, 그 자신이 평생에 걸쳐서 추구하는 시학의 첫 「싸움터Lieu du combat」로서 출현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이브 본느프와의 첫 시집 『두브의 운동과 부동에 대하여』(1953)는 프랑스 현대시의 시적 전통을 계승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독자들에게 그 시적 전통의 이해와 시적 사유의 통찰을 무엇보다 요구한다.
이브 본느프와는 절대에의 추구와 실패 사이에 놓인 그 간극을 시집의 표제로 제시한 대문자 ‘두브(Douve)’를 통해 암시한다. ‘해자(垓字)’라고 번역되는 일반 여성 명사 두브(Douve)는 사전적인 의미에서 방어를 위해 성(城) 주위를 둘러서 물을 채운 도랑을 가리키는데, 성의 안팎의 거대한 틈, 성을 둘러싼 외곽의 경계, 성문의 도개교가 내려오지 않는 한 성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한계의 장소를 함의하기도 한다.
두브는 저 멀리 돌들 틈에서 너의 이름이 될 것이다
깊고 검은 두브
노력이 사라지는 줄어들지 않는 얕은 물
― 「정의Justice」 부분(104)
두브는 전쟁 시에 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의 수많은 죽음들, 그 장소를 감싸고 있으면서 줄어들지 않는 죽음의 얕은 물이며 성의 내부를 들여다보지 못하고 죽은 자들의 돌무덤, 그 “깊고 검은” 틈이다. 닫힌 성문을 포기하지 않고 문을 열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있는 한, 물의 운동과 돌의 부동, 그 삶과 죽음의 변증법이 줄어들지 않고 전개되는 장소이다. 그 성의 바깥, 죽음의 장소에서 다른 삶의 가능성을 묻는 랭보가 미지의 환상들, ‘일뤼미나시옹(Illuminations)’을 보았다면 말라르메는 언어의 모든 의미가 소멸되는 부재(不在), 그 무(無, Néant)를 경험한다
우리 내부에 있는 장차 다가올 의식에 페르스발(Perceval)이 자문해야 할 일은 사물이나 존재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고 다음과 같은 것이다. 왜 그것들이 우리가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장소에 존재하는가. 그리고 얼마나 어둡고 깊은 대답을 그것들은 우리가 묻는 소리에 대해서 지니게 될 것인가. 그러한 사물이나 존재를 지탱하는 우연성에 경탄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갑자기 볼 것이다. 마땅히 그것은 이 불확실한 지식의 최초의 운동에 있어서, 그들의 사물과 존재로 머물며, 그리고 그것들을 시들게 하는 그 죽음, 무명성(無名聲), 유한성을 인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죽어야 할 사물에 대한 사랑이라는 보들레르의 발자취를 다시 한 번 더듬기를 나는 제안한다. 닫혀져 있다고 그가 믿은 입구에 밤의 가장 슬픈 증거 앞에 다시 한 번 서보기로 하자. 모든 미래, 모든 계획은 흩어진다. 허무는 사물을 무로 돌리고 우리는 바람 속에서 맑은 이 불꽃에 사로잡힌다. 이미 우리를 지탱하는 어떤 신념도 공식도 어떠한 신호도 없이 제 아무리 엄격한 눈초리도 결국은 절망하고 시든다. 하지만 이 형상 없이 자기를 상실한 지점에 머무르자. 이 걸음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획득한 걸음이니까. 사실 하나의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 이브 본느프와, 「시의 행위와 장소(1959)」(민희식 옮김, 1969) 부분
페르스발(Perceval)은 12세기의 프랑스 작가 크레티앵 드 트루아가 쓴 미완작 『페르스발의 로망 또는 그라알 이야기Le Roman de Perceval Ou Le Conte Du Graal, 1185년경』(최애리 옮김, 을유문화사, 2009)에 등장하는 주인공인데, 이 ‘로망(roman)’은 아더 왕 이야기와 흔히 ‘성배 전설’로 알려진 어부왕 이야기의 원형이다. 페르스발은 제 이름도 모른 채 홀어머니의 슬하에서 외지고 거친 숲에서 자란 무명(無名)의 소년이다. 어느 날 페르스발은 무장한 기사들의 쇠사슬 갑옷과 빛나는 투구를 보고 그들이 세상에서 진정 아름다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소년은 아르뛰르(Arthur), 즉 아더 왕이 그들을 기사로 임명하고 갑옷과 투구를 주었다는 것을 듣는다. 소년은 아더 왕의 기사가 되기 위해 어머니의 집을 떠난다. 소년은 아더 왕을 만나고 잇따른 모험을 거치면서 성숙해지고 아름다운 연인을 얻는다. 청년은 결혼을 위해 어머니를 찾아가는 길에 하룻밤 머무는 낯선 성에서 불수의 성주로부터 커다란 환대를 받는다. 그날 밤에 그는 ‘피가 흘러내리는 창’과 찬란한 금빛 ‘그라알(Graal)’의 신비한 행렬을 목도하면서도 “왜 창에서는 피가 흐르는가”, “그라알은 어디로 가져가는가”라고 묻지 않는다. 다음날 아침에 아무도 없는 성을 떠나기 위해 그가 성문의 도개교를 건너자마자 다리가 올라가고 성문은 닫혀버린다. 그는 우연히 만난 사촌누이로부터 낯선 성주는 어부왕인데, 왜 창에서는 피가 흐르고 그라알은 어디로 가져가는지를 묻지 않았냐고 질책 받는다. 어머니의 죽음을 전하는 사촌누이가 이름을 묻자 제 이름도 모르는 그는 짐작으로 ‘페르스발 르 갈루아(Perceval li Galois, 웨일스 사람 페르스발)’라고 대답한다. 사촌누이는 그가 그 모든 것을 묻지 않아서 부유한 어부왕(漁夫王)의 상처는 낫지 않고 그의 땅은 황폐해질 것이며 페르스발에게도 큰 불행이 닥칠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에 페르스발은 아더 왕과 재회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더 왕의 성에 안주하지 않는다. 그는 ‘왜 창에는 피가 흐르고 그라알은 어디로 가져가는지’에 대한 진실을 알아내고자 결코 포기하지 않는 모험을 떠난다.
이브 본느프와는 『페르스발의 로망 또는 그라알 이야기』를 통해 이름 없는 소년이 아름다운 갑옷과 투구를 얻기 위해 아더 왕을 만나고 기사가 되는 모험에서 대답한 ‘페르스발’이라는 임의의 이름을 주목한 것처럼 보인다. ‘페르스발’은 무명의 소년이 ‘기사’, 즉 타자가 되기 위해 다른 삶과 다른 세계로 나아가면서 겪는 모험과 뜻밖의 사건 속에서 발화한 ‘우연’한 이름이다. 그 ‘페르스발’은 연약한 여성들을 구하고 연이은 무공을 세우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명예롭고 아름다운 이름이 된다. 그러나 신비한 ‘창과 그라알’에 대해 묻지 않은 자신의 무지(無知), 그 정신의 유한성 앞에서 제 이름은 진정한 의미가 부재한 불운의 무의미한 이름이 되고 만다. 어부왕의 성안에서 ‘창과 그라알’에 대한 물음을 통해 어부왕의 상처를 치유하고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한 죽음, 그 이름이 된 것이다.
여기 패배한 슬픔의 기사가 있다.
그가 샘을 지키고 있었듯이, 여기서
나는 잠에서 깨어나고 나무들 덕분에
물소리 속에서, 이어지는 꿈.
그는 침묵한다. 그의 얼굴은 내가 찾는 것
모든 샘들 또는 절벽 위에서, 죽은 형제의 얼굴.
정복당한 밤의 얼굴, 기울이는
찢어진 어깨의 새벽 너머로.
그는 침묵한다. 명확한 언어로 패배한 자는
싸움의 끝에서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그는 참혹한 얼굴을 땅바닥으로 돌린다,
죽는다는 것이 그의 유일한 외침, 진정한 휴식이다.
― 「싸움터ⅠLieu du combatⅠ」 부분(109)
그런 점에서 “패배한 슬픔의 기사”, ‘페르스발’은 닫힌 성문 바깥에서, 내려오지 않는 도개교 아래의 두브 앞에서 존재의 위기와 우연한 이름의 죽음을 겪고 있는 ‘현존(présence)’, 그 ‘언어’에 대한 메타포이다. “첫 나무가지들로부터 단절된 얼굴/낮으막한 하늘 아래 두려움으로 만들어진 美”(「시법Art poétique」)처럼 실재의 의미가 부재한 언어가 순간적으로 빛났다가 사라지는 이름, 그 언어의 아름다움이다.
페르스발은 자신의 유한성을 자각하자마자 제 이름의 우연성과 이제는 무의미한 아더 왕과의 생활에 안주하지 않고 결코 포기하지 않는 모험을 떠난다. 그는 ‘창과 그라알’이 소재한 장소로 향하여 그가 목도한 그것들에 대한 ‘물음’을 통해 불수의 어부왕을 치유하고 어부왕의 ‘황무지’를 구원하면서 자신의 죄를 정화하고자 한다. ‘창과 그라알’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와 그것들의 행방을 묻지 못했기에 그것들이 있는 진정한 장소로 향한다. 그리하여 페르스발이라는 이름, 그 언어가 향하는 장소의 두브는, 매번 죽음을 겪으면서도 진정한 이름을 획득하기 위해 재생하고 현존하는 글쓰기의 운동과 부동, 그것이다. T.S. 엘리엇이 시 「황무지The Waste Land, 1922」에서 ‘어부왕 이야기’를 통해 현대 사회의 불구성과 황폐화된 세계만을 비극적으로 형식화했던 것과 달리 이브 본느프와는 페르스발을 통해 거듭된 실패와 죽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이름과 진정한 장소를 얻기 위한 무한한 모험의 글쓰기, 그 실재를 향한 시쓰기를 주목한 것이다.
너의 존재였던 이 성(城)을 나는 사막으로 부르리라,
이 목소리를 밤으로, 너의 얼굴을 부재로,
그리고 네가 불모의 땅 속으로 쓰러질 때
나는 네가 실어온 번개를 무(無)라고 부르리라.
죽음은 네가 사랑했던 나라. 나는 온다
그러나 언제나 너의 어두운 길을 따라
나는 너의 욕망, 너의 형태, 너의 기억을 부순다,
나는 연민 없는 너의 적이다.
나는 너를 전쟁으로 명명하고 나는 빼앗으리라
네게서 전쟁의 자유를 그리고 나는 가질 것이다
내 손 안에 너의 어둡고 가로지른 얼굴을
내 마음 안에 뇌우(雷雨)가 불 밝히는 이 나라를.
깊은 빛은 필요하다 나타내기 위하여
차형(車刑) 당한 대지와 바스락거리는 밤을.
불꽃은 어두운 숲에서 타오른다.
언어에게도 필요한 것은 하나의 물질,
모든 노래 너머 저 움직이지 않는 기슭.
너는 살기 위하여 죽음을 뛰어넘어야 한다,
가장 순수한 현존은 쏟아진 피.
― 「진정한 이름Vrai nom」 전문(73-74)
페르스발처럼 명명된 존재의 모든 이름은 실재와는 무관하게 우연히 발화된 이름이기에 그 이름의 기원에 있는 실재의 진정한 장소에 대한 물음 앞에서 페르스발, 그 현존은 명명과 재명명의 무한 반복 속에서 매번 죽었다가 매번 다른 이름으로 되살아나는 순간만을 산다. 이브 본느프와는 부재와 죽음 앞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시쓰기, 사물의 이름을 명명하는 순간 그 이름이 말라르메가 경험한 무(無)가 됨에도 불구하고 페르스발처럼 물러서지 않는다. 이브 본느프와는 그 무(無), 죽음의 경험 이후에도 두브 앞에 머무를 때 나타나는 “하나의 변화”, 다른 삶을 향한 가능성, 그것을 “희망(espoir)”이라고 말한다.
시, 그것은 땅 위의 현존의 층위에서 사물(언제나 하나의 삶)을 취하는 것이며, 여기에서 사물은 여러 장소 가운데 한 장소에서 한순간 실존할 따름이고 바로 이 사실로 이내 그것을 꺾는 이에게는 실재이며, 그러므로 잠재적으로 존재에 속한다. 시, 그것은 가장 작은 단어 안에서 그것의 개념적 사용으로부터, 담론으로부터, 사물들을 호출하는 힘을 향해, 말을 향해 오르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단어가 다른 단어들과 결합하며 모두 고유명사가 되는 가운데, 그 단어 안에서 꽃다발이나 화환의 경험을 다시 사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정신이 꽃에서 발견하는 자산이라고 부를 것이다.
― 이브 본느프와의 『햄릿의 망설임과 셰익스피어의 결단』 부분(141)
그 희망으로서의 시, 잠재적으로 솟아오른 꽃다발 같은 낱말들로 지은 시, 그 시가 한순간 현존하는 언어는, 진정한 이름과 다른 삶의 가능성을 갖는 것이다. “글쓰기? 그것은 사용된 각각의 단어 속에서 언제나 좌절되는 어떤 가능성에 대한 귀 기울임”(72)인 것이다.
시인 이브 본느프와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다섯 번이나 재번역하여 출간했을 뿐만 아니라 다수의 셰익스피어와 예이츠 작품을 옮긴 번역가이기도 하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처음 번역한 1957년부터 『소네트』를 번역한 2007년에 이르기까지 셰익스피어 번역에 집중하였다. 『햄릿』에서 대신(大臣) 폴로니어스의 아들, 레어티스는 아버지 폴로니어스가 신뢰하고 구축한 현실의 질서를 의심없이 수용하며 그 현실의 질서와 개념을 계승하고자 한다. 이에 반하여 햄릿은 선왕(先王)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과 진실 규명이 이뤄지지 않는 현실을 수용할 수 없다.
이브 본느프와는 햄릿의 물음을 주목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니면 개선해야 하는가?”(58) 햄릿의 물음은, “진정한 삶은 부재하다. 우리는 이 세계에 있지 않다La vrai vie est absente. Nous ne sommes pas au monde”며 “삶을 바꾸기changer la vie?”(「지옥에서 보낸 한 철」)를 제안한 랭보의 시구와 다르지 않다. 아버지를 살해한 삼촌이며 의붓 아버지가 된 클로디어스, 왕 클로디어스에 협력하는 폴로니어스가 지배하는 현실 세계. 햄릿이 그 권력 질서와 진실이 부재한 현실 세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살아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죽은 ‘비존재’가 되는 것이다. 햄릿에게 현실 세계의 수용 여부는 “존재냐 비존재냐To be or not to be”의 문제인 것이다. 햄릿은 진정한 삶을 살기 위하여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결투장으로 향한다. 이 세계에서 살아있는 ‘비존재’가 되기보다 다른 세계의 진정한 장소, 거기서 죽어서 진정 살아있는 ‘존재’가 되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햄릿과 페르스발, 보들레르와 랭보와 말라르메는 모두 다른 이름들이지만 ‘지금-여기’의 죽음과 부재의 비존재가 아니라 ‘미지-거기’의 다른 삶과 진정한 장소로 향한 존재, 모두 동일하게 ‘시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름들의 현존이다. 그 이름들은 죽더라도 결코 죽지 않는다. 그 이름들은 죽음 속에서 태어나는 「불사조Phénix」와 「불도마뱀La salamandre」이고 그녀의 이름으로 명명된 ‘두브(Douve)’이며 거듭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는 ‘나’의 시쓰기이다. 그것들은 죽음과 부재의 현실 세계에서 순간의 현존을 살 수 있도록 다른 삶과 진정한 장소에서 들려오는 「어떤 목소리Un voix」, 그리고 「다른 목소리Une autre voix」이다. 그 목소리들은 남편 “오시리스”(「유일한 증인Le seul témoin」)의 죽은 시체를 재결합하여 부활시킨 이집트 신화, 이시스(Isis)의 외침이며 이시스처럼 디오니소스를 섬기는 무녀이자 영매인 “메나드(Ménade)”(「유일한 증인Le seul témoin」)가 불러낸 타자의 목소리이다. “어느 난로에다 네 얼굴의 불을 놓을 수 있을까/오 머리를 아래로 던진 채로 포로된 메나드여?”(「시법Art poétique」)라고 호명하는 두브의 목소리이다.
그리하여 시집 『두브의 운동과 부동에 대하여』(1953)는 그 수많은 이름들, 삶과 죽음의 변증법과 무한 운동을 거느리고 있다. 하나의 완결된 시극 형식처럼 시집은 「연극Théàtre」, 「마지막 몸짓Derniers gestes」, 「두브는 말한다Douve parle」, 「오랑주리L'Orangerie」, 「진정한 장소Vrai lieu」의 총 5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표제가 암시하고 있듯이 시집은 운동에서 부동으로, 삶에서 죽음으로 치닫고 있다. 「연극Théàtre」과 「마지막 몸짓Derniers gestes」이 두브의 운동이고 「두브는 말한다Douve parle」가 두브의 말이라면 「오랑주리L'Orangerie」와 「진정한 장소Vrai lieu」는 부활과 재생으로 이어지는 두브의 죽음을 암시한다. 그 이름들의 죽음, 다른 삶을 향한 무한 운동과 부동 속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피 흘리는 창’과 ‘그라알’처럼 개념으로 포착할 수 없는 불과 돌, 물과 나무와 같은 실재이다. 그것들은 언어 이전에 거기에 있다. 두브는 죽음을 무릅쓰면서 그 진정한 장소에 있는 실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명명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그 아름다운 현존의 순간적인 삶을 산다.
이제 나는 다른 삶들은 있는가, 라는 물음과 함께 떠난 미지의 모험에서 만난 시의 성문, 두브 앞에 서 있다. 나는 ‘모든 사물의 완전한 지식’을 추구한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그의 이름이 붙여진 거리의 40번지 건물벽에 그려진 푸른 나무 벽화와 그 나무 벽화 옆에 새겨진 이브 본느프와의 시를 떠올렸다.
그의 제목 없는 시를 읽고 노트에 옮겨 적으며 천천히 행간을 음미해보곤 했는데, 이번에 그 시를 번역해보았다. 가끔씩 구글맵으로 검색하면 그 건물 벽에 있는 푸른 나무의 벽화 시였다. 시는 순간 나타났다가 사라지리라. 그러나 나무는 그 자리에 현존하리라. 철학의 개념을 거부하고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나무, 그 실재가 현존하는 진정한 장소임을 암시하는 그의 시처럼. 나는 나무들 사이를 거닐며 나의 손이 욕망하는 하늘과 바람과 새를 바라본다.
거닐어라,
이 거대한 나무를 보라
그 사이를 지나는 것으로 충분하다.
비록 찢기고 더럽혀진 거리의 나무일지라도,
모든 자연, 모든 하늘, 새는 거기에 머무르고, 바람은 나무를 흔들고, 태양은 죽음을 무릅쓴 희망처럼 나무를 말한다.
철학자여,
너의 길에서 나무를 가져보았는가,
네 사유가 덜 고통스럽고,
네 눈이 더 자유롭고,
네 손이 밤보다 더 많은 것을 욕망할 나무를.
― 이브 본느프와, 파리 데카르트 가(街) 40번지의 벽화 시 전문
송승환
시인. 문학평론가.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2003년 문학동네 신인상에 시가, 2005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에 평론이 각각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시집 『드라이아이스』(문학동네, 2007) 『클로로포름』(문학과지성사, 2011) 『마침내 당신이 밝혀진다면』(문학동네, 근간) 문학평론집 『측위의 감각』(서정시학, 2010) 공저 『시네리테르』(문예중앙, 201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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