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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승환 Jul 15. 2018

사물의 이름과 실재의 응시

― 이제니와 박지혜의 시

김춘수와 오규원 이후로 2000년대 한국시의 지형도에서 언어 자체를 탐구하는 젊은 시인들의 시적 흐름이 발생한 현상은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 김언의 『거인』(2005)과 『소설을 쓰자』(2009), 이준규의 『흑백』(2006), 최하연의 『피아노』(2007) 등은 사물과 언어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과 언어에 대한 깊은 회의에서 비롯된 언어의 재창조를 주요한 시적 모티프로 삼고 있다. 사물의 완전한 재현은 언어로 가능한가. 사물의 이름은 사물과 필연적 관계를 맺고 있는가. 사물의 이름은 사물의 본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사물의 본질 탐구는 언어를 통해 가능한가. 이미 주어진 언어 체계는 자명한 것인가. 이 모든 물음은 시의 근본 문제와 맞닿아 있다.

김수영이 역사적 삶의 의미와 성찰하는 개인의 삶의 의미를 가로질러 그 모든 의미의 극단에서 사물의 실재와 대면하는 순간의 무의미를 지향했던 것과 달리 김춘수는 역사적인 것의 의미와 인간적인 것의 의미를 모두 지운 상태의 무의미를 지향했다. 김춘수는 역사적 의미와 인간적인 것의 의미를 담고 있는 언어의 의미를 지우기 위해 음운 단위까지 분절하는 언어까지 나아갔고 더 나아가 백지의 언어에 도달했다. 김수영이 의미의 과잉을 통해 모든 실재의 무의미를 지향했다면 김춘수는 의미의 지움을 통해 모든 실재의 무의미를 지향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규원은 김춘수의 무의미시에서 출발하여 ‘사물이 다만 거기 있음’을 온전히 그려내는 묘사의 언술 방식을 극단으로 밀고 나가 날이미지시를 구축했다. 날이미지시는 사물 자체를 ‘날 것’으로 보여주려는 환유의 언어였다. 

김언과 이준규와 최하연 등의 시는 김춘수와 오규원의 언어가 나아간 길을 복기(復棋)하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물을 재정의하고 명명하거나 모든 사물의 이름을 지우고 최초의 시를 쓰려 하거나 이미 주어진 언어의 의미를 절합하고 새로운 언어 문법을 창조하는 언어로 나아갔다. 그들 모두는 실재를 재현할 수 없는 언어의 한계를 정확히 인식하면서도 실재에 닿으려는 언어주의자의 면모를 지녔던 것이다.

이러한 2000년대 젊은 시인들의 자생적 언어 운동의 흐름 속에서 200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제니는 그 언어주의자의 길을 인식하고 선택한 또 다른 시인 ― 언어주의자이다. 그녀의 시에서 “빈번히 사용되는 이국의 이름과 무의미한 언어의 반복은 시의 언어로 말할 수 없는 사물과 존재를 가리키기 위해 창조한 운율”로서 이제니는 “일상 언어의 죽은 의미를 지우면서 자신만의 언어를 새롭게 창조하기 위한 음악(「졸고, 「사물의 부재와 언어의 운율」, 『측위의 감각』)”을 시도했다.      


그곳은 멀지 않았다. 한낮인데도 별자리의 그림자가 수풀 여기저기를 검게 물들였다. 나무그늘은 그저 움직일 뿐이었다. 바람을 따라 흐르듯이, 구름을 따라 번지듯이.   

  

굴러가는 것, 기어가는 것, 

엎드려 있는 것, 절룩이는 것, 

헤매는 것들의 세계가 돌연 보였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심장의 흑점 한켠에.      


고요 속에서 작은 것들이 말하고 있었습니다.     


너의 시간과 나의 시간은 다르다.

너의 색깔과 나의 색깔은 다르다.     


환청과 색맹의 날들이 소리 없이 흐를 때     


녹색의 입구

끝없는 녹색의 입구     


녹색의 내부의 내부의 내부가

녹색의 내부의 내부의 내부의 외부가

내부의 외부의 내부의 외부의 내부가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머리카락이 자라나듯이, 너의 암흑이, 너의 검정이, 너의 하양이, 흑백의 밝고도 어두운 광선이. 흑백은 깨어 있지 않았다. 흑백은 누구도 깨우지 않는다. 흑백은 그저 간신히 그 자신만을 깨울 수 있을 뿐이다.     


물결은 어디에서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물결은 무한 증식하는 액체의 메아리. 땅끝으로 밀려와서 하얗게 토해진 백지의 울음.      


아무것도 조직하지 않을 것이며 아무것도 통제하지 않으리라. 매 순간 모양을 바꾸는 구름이 말했습니다. 바람은 조언하거나 참견하지 않는다. 바람은 아무것도 돕지 않는다. 의지 없이, 의식 없이, 그 모든 것들을 돕는다. 여기에서 저기로 꽃가루들이 날린다. 검은 비닐봉지가 날아간다.     


나의 바람은 나무가 되는 것이었다.     


세계는 물결치고 있었다. 

어떤 마음이 어떤 마음에게로 흘러가고 있었다. 물결은 춤추는 자에게는 흔들리고, 분노하는 자에게는 흩어진다. 감정이 들끓는 것은 나무 밖의 일이다. 사건은 언제나 나무 밖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나무는 나무로만 서 있었다.      


그늘이 짙어진다, 들판이 넓어진다.     


마음이 넓어진 것 같다고 어제의 너는 말했습니다.     


구름의 바람은 나무가 되는 것이었다. 나무의 바람은 구름이 되는 것이었다. 바람의 바람은 바람이 되는 것이었다. 나무의 구름이 바람이듯이. 바람의 나무가 구름이듯이. 세계는 너의 마음속에서 작고 넓다. 녹색 그늘 아래에서는 더 작고 더 넓다.      


나무의 구름은 바람 곁에서, 

바람의 나무는 구름 아래에서, 

구름의 바람이 나무를 스쳐지나간다.     

― 이제니의 「나무 구름 바람」 전문(『문학과사회』 2010년 가을)     


그녀의 첫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창작과비평, 2010)에도 수록된 「나무 구름 바람」은 언어의 한계를 인식하면서도 그녀의 언어가 더욱 밀고 나아가 사물의 실재를 대면한 풍경을 보여준다. 「나무 구름 바람」은 사물의 이름(언어)에 대한 회의에서 출발하여 이름 붙일 수 없는 사물을 지시하면서 이름 없이 사물 자체로 실재하는 ‘것들’과 ‘그것들’의 유동하는 흐름과 변전을 목도하는 시인의 내면을 그려내고 있다. 

각각의 사물을 가리키는 ‘나무’, ‘구름’, ‘바람’은 사물의 이름이다. 시인은 이름으로 구성된 언어의 짜임으로 사물과 풍경을 재현한다. 언어로 재현된 사물을 통해 시적 순간은 탄생한다. 시적 순간을 통해 시인과 독자는 우주적 합일을 체험한다. 그러나 언어주의자는 그 시적 순간을 이루게 하는 이름들은 올바른 것인가, 묻는다. 이 물음은 시적 순간의 현현과 체험의 진위를 묻는 근원적인 것이다. 이 물음은 플라톤 또한 제기했던 것이다. 이름의 올바름이 ‘있는 것들’ 각각에 자연적으로 있는가, 아니면 합의나 관습에 의해서 있는가.

이제니는 사회적 합의나 관습에 의해 명명된 이름과 사물의 본성을 모방한 이름 모두를 회의하고 거부한다. 언어주의자로서 그녀는 이름이 사물의 본질과 실재를 완전히 재현할 수 없다는 한계를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모든 이름 이전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 자체에 닿으려 한다. 그녀는 이름 없이 ‘있는 것’들이 있는 “그곳”을 응시하고 그곳을 향해 나아간다. 그곳은 “굴러가는 것, 기어가는 것,/엎드려 있는 것, 절룩이는 것,/헤매는 것들의 세계”이다. 그곳의 그것들은 이름 붙일 수 없고 ‘이름 없이’ 있는 것들이다. “그곳은 멀지 않”다. 그곳의 “고요 속에서 작은 것들”은 이렇게 말한다.      


너의 시간과 나의 시간은 다르다.

너의 색깔과 나의 색깔은 다르다.     


“작은 것들” ― 그곳에 ‘있는 것들’이 ‘거기 있음 자체’로 시인에게 전하는 말이다. 사물이 사물인 채로 그곳에 있고 시인이 언어로 사유하고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인 채로 남아있는 한 사물과 시인은 각각 다른 시간으로 살고 다른 색깔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곳의 “작은 것들”이 지금 눈앞에 현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사물들의 시간과 색깔에 다다르지 못한다. 사물에 대한 고정관념과 사물에 대한 사유와 사물에 의미 부여한 언어를 완전히 지우고 언어 없이 실재할 수 있는 사물 자체가 되지 못한다면 시의 언어는 실재 없는 기표일 뿐이다. 시인은 멀지 않은 그곳 ― 바로 눈앞의 실재를 대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재와 동일한 시간과 색깔로 살 수 없고 만질 수도 없다. 그러나 실재에 닿으려는 시인의 욕망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시인에게 실재는 곧 ‘시’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실존적 비애가 발생하는 지점이다.

이제 시인에게 각각의 사물을 지시하는 ‘나무’, ‘구름’, ‘바람’은 실재가 결핍된 언어인 까닭에 더 이상 각각의 사물을 가리키는 명사가 되지 못한다. 「나무 구름 바람」은 그녀의 다른 작품 「분홍 설탕 코끼리」, 「독일 사탕 개미」, 「녹색 감정 식물」에서처럼 ‘나무’, ‘구름’, ‘바람’은 각각의 사물을 가리키는 단순 명사 성격의 보통 명사가 아니라 ‘나무 구름 바람’이라는 복합 명사 성격의 보통 명사로 전환됨으로써 전혀 다른 사물을 지시하는 이름이 된다. ‘나무’, ‘구름’, ‘바람’이 ‘나무 구름 바람’이 되는 순간 각각 사물의 경계는 흐릿해지고 사물의 구별은 불가능해지고 ‘나무 구름 바람’은 이름 붙일 수 없는 실재의 임의적 이름이 된다. 그것들의 세계에 대한 메타포가 된다. 그 메타포가 “녹색”이다. 이름 붙일 수 없고 이름 붙일 수 없어서 사물의 구분과 인식을 할 수 없는 그것들의 세계를 호명하는 임의적 이름. “환청과 색맹의 날들이 소리없이 흐”르는 녹색. 그것들은 끝없이 펼쳐지고 이어져 있어서 어느 것이든 실재의 “입구”이다. “녹색의 입구” 앞에서 이름은 불투명해지고 흐릿해지고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이름의 소멸과 함께 사물의 윤곽과 색깔은 모두 지워지고 “녹색의 내부의 내부의 내부의 외부”가 열린다. “녹색의 내부의 내부의 내부의 외부”는 오직 “흑백”으로 된 사물들의 세계이다. 시인은 흑백을 응시한다. “흑백은 깨어 있지 않았다. 흑백은 누구도 깨우지 않는다. 흑백은 그저 간신히 그 자신만을 깨울 수 있을 뿐”임을 시인은 직시한다. 흑백의 사물들은 멈춰 있지 않고 끝없이 흘러간다. 시인은 흘러가는 흑백의 방향을 알 수 없다. 시인이 흑백 ― 실재를 응시하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름 없는 사물들의 끝없는 파동을 바라볼 뿐이다.     


물결은 어디에서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물결은 무한 증식하는 액체의 메아리. 땅끝으로 밀려와서 하얗게 토해진 백지의 울음.      


“물결”은 이름 붙일 수 없는 사물들의 무한한 운동이다. 운동은 “무한 증식하는 액체의 메아리”로서 검은 잉크로 씌어진 언어가 모두 지워지고 사물들이 인간의 “땅끝으로 밀려와서 하얗게 토해진 백지의 울음”이다. 시인은 그 울음을 듣는다. 인간의 의지와 인간의 언어 밖에서 구름이라는 임의적 이름으로 호명되는 실재의 “아무것도 조직하지 않을 것이며 아무것도 통제하지 않으리라”는 말을 듣는다. “바람은 조언하거나 참견하지 않는다. 바람은 아무것도 돕지 않는다. 의지 없이, 의식 없이, 그 모든 것들을 돕는다”는 것을 다시 인식한다. 실재에 대한 시적 인식 속에서 시인의 “바람은 나무가 되는 것이었”다. 죽음을 통해 가능한 실재되기. 언어 없이 실재 자체로 시쓰기. 언어 자체가 곧 실재였던 시원으로의 회귀. 인간의 언어가 사라진 사물들의 세계.      


세계는 물결치고 있었다. 

어떤 마음이 어떤 마음에게로 흘러가고 있었다. 물결은 춤추는 자에게는 흔들리고, 분노하는 자에게는 흩어진다. 감정이 들끓는 것은 나무 밖의 일이다. 사건은 언제나 나무 밖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나무는 나무로만 서 있었다.      


언어 없이 감정 없이 사건 없이 “나무는 나무로만 서 있”고 물결치는 세계. 이제니는 그 세계를 목격했던 순간을 과거 시제로 묘사하고 있다. 「나무 구름 바람」은 첫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가 밀고 나아간 극점으로서 자신이 목격했던 세계를 증언하고 있다. 이제 이제니는 실재와 닿을 수 없다는 비애 때문에 흘려왔던 눈물과 울음을 멈춘다. 그녀는 실재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다시 나아가는 좌표에 서 있다.     


이곳에는 소리를 내는 물건이 있다, 물건은 움직이고 나는 이름을 모른다, 아직 그것에 대해 한번도 말하지 않았다, 어제의 거짓처럼 진지해진 나는 토끼굴로 사라진 토끼를 불러내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녹슨 문을 열어놓고 비가 들이치는 방에서 모국어로 시를 썼다, 삐걱거리는 나선형 계단의 불꽃나무아이를 본 적이 있니, 불꽃나무 속으로 들어가는 아이는 혼자 자란다, 그건 박쥐의 소란한 비행처럼 어지럽고 마운틴고릴라 집단의 표정처럼 초현실적이야, 서투른 표현이 점점 솔직해져 갔다, 솔직함으로 가장하고 있는 건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것들은 쑥쑥 자라나 침묵 속으로 줄지어 들어갔다, 차양 아래에는 낯선 눈동자들이 모여 똑같은 인사를 했지만 말을 잃어가는 나는 이곳과 저곳의 사이에서 나오지 않는다, 토끼굴로 사라진 토끼처럼, 토끼굴로 사라진 토끼는 언제 나타날까, 나는 아직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이번에는 멸종동물과 멸종위기동물을 적는다, 바바리사자 분홍머리오리 분홍돌고래 샴악어 수마트라오랑우탄 설표 판다 랫서팬더 반달가슴곰 큰개미핥기 코뿔소 하마 미어캣 붉은여우 붉은 박쥐 사향노루 시카사슴 산양 봉고 딩고 늑대 표범 아무르호랑이 하프물범 북극곰 블랙스완 알바트로스 이라와디돌고래, 이것을 계속 적는 것은 사랑받지 못한 아이의 모자처럼 우울하지만 멈추고 싶지 않았다, 당신은 에트랑제입니다 당신은 에트랑제입니다, 너에게 검은 펠트천의 페도라를 선물할게, 그 모습이 슬퍼도 좋아, 페도라를 쓰고 검게 걸어가 줘, 죽기 직전에 레몬 향기가 맡고 싶다던 시인이 떠올ㄴ다, 유언치고는 참 멋지다고 중얼거리다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들판을 달리는 토끼처럼, 산등성이에 내린 구름그림자처럼 나선형 계단의 불꽃나무아이는 사라진다, 그것은 제문을 읽을 때의 엄숙함처럼 즐겁거나 슬프다, 줄타기하는 뒤꿈치에 눈부신 꽃비가 쏟아진다, 나는 아직 한번도 말한 적 없는 입술로 토끼굴로 사라진 토끼를 불러낼 것이다, 늙은 여자의 바느질처럼 다정하게, 빨랫줄 위의 이불홑청처럼 쓸쓸하게, 어제의 거짓과 어제의 참과 무성한 침묵으로 너를 부를 수 있을까, 창가를 돌다 다시 날아가는 검은 새, 끝없이 떠다니는 몰락의 시간, 재떨이 위의 담배연기를 바라보는 것은 가끔 결정적이다, 커피 잔에 떨어지는 눈물처럼, 시인의 목적 없는 손가락처럼, 이렇게 쓰고 나면 더 빛나는 것들이 있다, 어둠은 오래된 계단을 덮고 새들의 자리를 덮고 눈물을 덮고 하늘구멍을 덮고 모든 것을 천천히 드러냈다, 시적 상태가 과잉의 지속음을 내고 있는 곳에서 나는 토끼굴로 사라진 토끼를 부르기 시작했다,

― 박지혜의 「에트랑제 에트랑제」 전문(『현대시』 2010년 11월호)   

  

2010년 『시와반시』 상반기 신인상으로 등단한 박지혜는 당선작 「다시」, 「센티멘털왕」, 「그것」, 「얼룩」, 「사냥철」에서부터 언어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모든 의미가 증발하는 자리에서 되돌려지는 소리”를 언어로 포착하려는 시인의 탄생을 예고한다. 박지혜는 “백지와 지운 문장 사이에 흐르는”(「그것」) 실재의 “의미는 없는 채 있었다”(「그것」)는 시적 인식을 분명히 드러낸다. 그녀에게 실재의 의미를 담은 언어를 지우고 남는 “얼룩”은 이름 붙일 수 없는 실재를 가리키면서도 실재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언어의 실패를 가리킨다. “얼룩은 얼룩을 지우며 끝없이 얼룩을 드러내고 있었고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얼룩」)음을 인식하고 있다. 아직 그 어떤 언어도 실재를 완전히 재현하거나 실재 자체의 언어가 된 적이 없었음을 인식한다.

「에트랑제 에트랑제」는 사물의 실재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언어의 실패를 무한히 반복하면서도 실재를 포착하는 언어로 시쓰기를 포기하지 않는 시인의 일관된 태도를 보여준다. “이곳에 소리를 내는 물건”이 있지만 “나는 이름을 모른”다. 소리를 내는 물건에 가장 적확한 이름은 인간의 언어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그 누구도 “아직 그것에 대해 한번도 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말하고 싶다. 그것을 “모국어로 시를” 쓰고 싶다. 그러나 시인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실재를 지시하는 언어의 부재 속에서 실재가 결핍된 언어로 시쓰기. “토끼굴로 사라진 토끼를 불러내”기. 실재가 사라진 구멍을 바라보며 실재를 끝없이 호명하기. 멸종하거나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의 이름들을 끝없이 쓰기. 사라지고 결핍된 실재의 허명(虛名)으로 실재를 말하기. 이것이 박지혜의 멈출 수 없는 시쓰기이다.      

바바리사자 분홍머리오리 분홍돌고래 샴악어 수마트라오랑우탄 설표 판다 랫서팬더 반달가슴곰 큰개미핥기 코뿔소 하마 미어캣 붉은여우 붉은 박쥐 사향노루 시카사슴 산양 봉고 딩고 늑대 표범 아무르호랑이 하프물범 북극곰 블랙스완 알바트로스 이라와디돌고래, 이것을 계속 적는 것은 사랑받지 못한 아이의 모자처럼 우울하지만 멈추고 싶지 않았다,      

저 동물들의 이름에 대한 끝없는 호명은 단순한 언어 유희가 아니라 실재와 만나고 싶다는 절박한 갈망이다. 동시에 실재가 멸종되거나 멸종되고 있는 까닭에 의미가 비어있거나 의미가 비어가고 있는 이름들의 무한한 반복이다. “우울”은 그 무의미한 이름들의 무한한 반복에서 발생한다. 실재가 결핍되어 무의미한 이름들의 모국어로 시를 쓰는 시인은 실재의 세계로 편입되지 못한 영원한 이방인 ― 이제니의 어법으로 표현하면 “고아”(「고아의 말」, 『아마도 아프리카』) ― 에트랑제(étranger)이다. “당신은 에트랑제입니다 당신은 에트랑제입니다” 중얼거리듯 이름들을 무한히 호명하다 보면 어느 순간 모국어는 외국어처럼 이상하다(étrange). 실재가 결핍된 이름의 모국어마저 이상하게 사라진다. “불꽃나무아이는 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지혜는 “아직 한번도 말한 적 없는 입술로 토끼굴로 사라진 토끼를 불러낼 것”임을 표명한다. 이것은 이준규와 이제니의 시가 도달한 시세계를 복기하면서 한번도 말한 적 없는 그녀만의 언어로 실재를 호명하는 시쓰기로 나아가려는 박지혜 시의 기원이다.







송승환     


시인. 문학평론가.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2003년 문학동네 신인상에 시가, 2005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에 평론이 각각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시집 『드라이아이스』(문학동네, 2007) 『클로로포름』(문학과지성사, 2011) 『마침내 당신이 밝혀진다면』(문학동네, 근간) 문학평론집 『측위의 감각』(서정시학, 2010) 공저 『시네리테르』(문예중앙, 2011) 등이 있다.


poetik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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